‘이곳에서는 누구도 고향을 보는 사람은 없다. 고향은 멀리 있고 삶은 삶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중이다.’ (49쪽)

 

 모어(母語)를 잊고 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설령 모어를 잃어버렸다 해도 말이다. 어쩌면 말은 음식과 같아서 그 맛을 영원히 간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잊을 수 없어 언제나 그리워한다. 독일 뮌스터에서 23년째 살고 있는 시인 허수경도 그럴까? 타국에서의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뮌스터의 산책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시인의 산책기는 달랐다. 그녀는 독일 뮌스터를 걷는 동안 독일 시인의 시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시와 함께 걷는 뮌스터라 할 수 있다. 산책의 처음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로렐라이」다. 청아하고도 슬픈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하다. 마치 뭔스터는 반드시 저녁에 걸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공기는 차고 어두워지네, 그리고 라인 강은 조용히 흘러가네 산꼭대기는 반짝인다 저녁 햇살 속에서’

 

 허수경이 걷고 바라보는 뭔스터는 이상하게 아련하게 다가온다. 어느 도시든 마주하게 되는 박물관, 성당, 시장, 그곳에서 마주하는 삶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치의 지독한 만행으로 물든 도시도 아닌데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잠재적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특히 사진으로 만나는 츠빙어는 어떤 먹먹함을 몰고 온다. 도시의 방어를 위해 내벽과 외벽 사이에 지어진 공간이지만 나치가 장악했을 당시는 감금과 죽음으로 채워진다.

 

 사라진 존재에 대한 기록과 기억은 무엇으로 존재하며 누구에 의해 전해지는가? 그가 요절한 시인의 시와 삶을 나직하게 들려주며 뮌스터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든다. 전쟁을 기억하는 도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옛 시청과 분주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중앙시장. 그 안에서 저마다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든 기억을 우리는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그것은 모든 과거 위에서 현재를 사는 인간의 일이다. 미래의 인간들은 옛날로 들어간 우리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남긴 흔적으로만 우리를 복원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미래에 가공될 통조림 속의 꽁치 같은 우리다. 우리가 과거를 박물관에 넣어 보관한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105쪽)

 

 이상하게도 뭔스터를 상상할 수가 없다. 내게는 멀고도 아득한 그곳이다. 긴 시간의 끝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거리를 실감한다.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지도를 펼치고 시인이 걸어온 곳곳을 짚어봐도 뮌스터가 아닌 그 도시의 벼룩시장을 홀로 걷고 있을 작은 얼굴의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천천히 다가오는 저녁의 그늘 속에서 누군가를 이름을 부르는 모습만 생각난다.

 

 ‘삶이라는 것은 버릇을 되풀이하며 기억을 재생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뜻한’ 기억에 대한 소망은 그 안에서 부풀어오른다. 기억 앞에 ‘차갑다’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해도 지나간 것들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진저리가 쳐진다 해도 그리운 그 무언가를 품고 있다. 지나간 것이니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까.’ (151쪽)

 

 그리움이란 말로 남은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기록을 담은 『길모퉁이의 중국 식당』과 함께 읽으면 허수경의 숨결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이 향한 곳에 수많은 그대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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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2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2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2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2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더위가 끈적하게 달라붙던 날들에는 짧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느라 애를 먹었다. 바람이 가을을 데리고 오는 요즘은 목덜미를 매만지는 바람이 좋아서 제법 자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싶다. 조만간 미용실에 다녀올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무엇일까? 반드시 무언가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쓸쓸한 마음을 숨길 필요까지는 없다.

 

 영원한 여름과 8월은 나를 밀어내고 재촉하듯 9월이 왔다. 하루 세 번 밥을 잘 먹고 있다. 이상하면서도 이상하지 않은 꿈과 새벽에 한 차례 깨어 화장실에 가는 횟수도 줄어든다. 받지 않는 전화기는 알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몰입할 대상이 있다는 건 중요하다. 하루에 한 번씩 여름 이불을 빨고 도저히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을 정리한다. 제목부터 묵직한 외로움 덩어리를 안겨주는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를 조금씩 읽고 있으며 이런 책을 샀다.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 기다림을 선물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참 좋구나 생각했다.

 

 보르헤스를 거의 읽지 않았어도 보르헤스의 말을 통해 그를 만난다. 내게는 상실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메이블 이야기』, 조해진이라서, 제목이여름을 지나가다  이유만으로 곁에 둔다. 정한아의 애니와 구병모의 빨간구두당도 기다리는 책이다. 소장용으로 탐나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 중 , 행인도 몰입하고 싶은 대상이다. 9월에 해야 할 일의 목록과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작성한다.

 

 

 

 

 

 

 

 

 

 

 

 

 

 

 

 

 

 어제는 친구와 선배 언니에게 가을 인사를 전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참 좋다. 선배 언니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고 친구는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해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혹은 올해에는 꼭 만나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하며 살아간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참 고맙고 기쁜 일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쌓여야 만날 수 있을까? 가을이 시작되니 다시 또 당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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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9-0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름에 머리를 묶다가 이제 머리를 잘랐어요.

[그장소] 2015-09-06 02:51   좋아요 0 | URL
저도 댕강~하고 머릴~ ㅋㅋㅋ
머리카락을 싹둑하니, 짧게 단발로 쳐냈어요. 그게 벌써 한달이나 되었어요.
이제 조금 머리칼이 잡혀 핀을 할 지경은 되네요!

보물선 2015-09-06 08:53   좋아요 1 | URL
머리카락을 자른건데 맨날 이렇게 쓰게 되네요 ㅋ

자목련 2015-09-07 11:05   좋아요 1 | URL
가을엔 단발머리^^

[그장소] 2015-09-06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에 구름 떠나네
보라색 그 향기도
이 몸이 하늘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곁에 사랑도 가네
빨간 입맞춤도
시간이 멈춰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 맞은 태양도 목 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 있네
아무런 미련없이 그대 행복 위해 돌아 설까나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 하리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 하리

내 곁에 사랑도 가네
빨간 입맞춤도
시간이 멈춰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 맞은 태양도 목 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 있네
아무런 미련없이 그대 행복 위해 돌아 설까나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 하리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모두 다 사랑 하리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 하리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 하리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 하리

...................................................................

이건 김경호의 미성을 들어 줘야 한다는!

비 맞은 태양도, 목 마른 저, 달도!
봐 줘야..하니까..시선 들어서..
들려 갑니다...^^

자목련 2015-09-07 11:07   좋아요 1 | URL
김경호의 목소리는 가을이군요. 그러고보니 요즘 방송에 뜸한 것 같아요. 그장소 님 덕분에 저도 이 노래를 듣습니다^^

프레이야 2015-09-0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마음이 얼마나 쌓여야 ‥
울컥해지네요. 아, 가을이 어서 지나가면 좋겠어요^^

자목련 2015-09-09 20:27   좋아요 0 | URL
평생 그 마음을 쌓아두기만 하는 마음도 존재한다는 게 서글퍼요. 가을이라서 그렇겠지요?
 

 

 

 

 

 

 

 

 

 

 

 열어둔 현관문에 붉은 기운이 스민다. 여름의 끝에 마주한 노을은 펄떡이는 생선처럼 생기가 가득하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노을인데 누군가는 이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서럽고 서럽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거나 기록하지 않고 보낸 날들에게 미안하고 안부를 전하고 싶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는 멀리 달아났다. 삶이라는 게 이러하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 있는 나는 여전히 입구를 알 수 없는 미로를 헤매는 듯하다.

 

 하나의 여름이 사라지는 시간, 하나의 여름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여름이 된다. 불을 꺼도 거실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이 뜬 밤, 가만히 소리 없는 목소리로 당신을 불러본다. 하루하루 습관처럼 닿을 수 없는 당신과의 거리를 측정하며 그것을 인식하며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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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8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8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8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렇게 울어댈까? 그저 본능적인 몸짓에 불과한 것일까? 새벽부터 울어대는 매미를 곁에서 지켜본다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것만 같다. 그러니까 매미의 몸부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과 다른 사람 말이다. 작년보다 훨씬 힘겨운 여름을 나고 있다. 나뿐이 아니다. 아마도 이 여름을 사는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만 국한된 어떤 여름이 있다고 여기는 건 나의 이기심 때문이다.

 

 입맛이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굶는 건 아니다. 자두, 복숭아, 냉커피, 비빔면 이런 것들을 먹고 있다. 여름밤처럼 차가운 캔맥주를 먹고 싶은 날들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맥주 금지령이다. 이른 아침에 오는 문자는 신간 알림이 대부분이고 첫 문자는 제임스 설터의 마지막 소설 올 댓 이즈였다.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번역자의 이름이 낯설다. 기다리고 있는 책은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한국이 싫어서』와는 다른 느낌을 기대한다. 읽고 싶고 궁금한 책은 전영애의 시인의과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로 두 권 다 같은 출판사, 시인이라는 교집합이 있다. 2015년 퓰리처 수상작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아름다운 소설이다. 작가는 눈이 아닌 귀로 듣고 보는 세상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올여름은 아마도 충동구매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이들이 일어나는 여름이다. 우리가 안다고 확신하는 것들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매미는 멈추지 않고 울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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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 2015-08-06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안녕하세요? <시인의 집>을 만든 편집자입니다.
책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만드는 내내 행복했던 책이에요.
충동구매일지언정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자목련 2015-08-06 17:18   좋아요 0 | URL
소로 님, 반갑습니다.
계획충동구매로 지금 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을 안겨준 책이라니, 더욱 궁금하네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만들어주세요^^
 

 

 책을 읽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사들이는 책에 비해 읽는 책은 적다. 읽고 싶은 책은 사두기만 하고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결국 정리하고, 사라진 책을 찾고 주문하기도 한다. 엊그제 도착한 요리책은 아직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두껍지 않은 소설책의 첫 장도 만나지 않았다. 주말에 강하게 불어닥친 태풍의 흔적을 기억하면서도 텁텁한 오후가 싫어 비를 기다린다.

 

 책을 사는 것도 즐겁지만 책을 선물하는 것도 기쁘다. 괜히 책 어딘가에 나의 마음이 함께 붙어있을 것 같다고 할까. 읽지 않았지만 그 책의 제목만 봐도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래서 선물은 좋은 것이다. 뭔가 줄 수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는 작가는 한은형이다. 우선은 제목 때문에 더 끌린다. 노희경의 드라마 <거짓말>로 시작한 나의 거짓말 사랑은 끝이 나지 않는다. <거짓말>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기대가 크다. 그 기대가 조금 크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클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는 기대만 키운다. 이장욱의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은 여름보다는 다른 계절에 읽고 싶은 소설집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소설집을 당장 읽지 않을 거라는...) 김태형의 <고백이라는 장르>는 예쁜 동생에게 안긴 시집이다. <처음 만나는 그림>은 표지 속 소녀가 나를 유혹했다.

 

 나희덕의 <그녀에게>는 곧 만나려고 한다. 여자를 말하는 시집, 그것만으로도 곁에 둘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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