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동의보감 세트 - 전3권 - MBC 특별 기획 <구암 허준> 드라마 원작 소설 동의보감
이은성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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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허준의 생모 손씨의 집안은 인종 1년 윤임(尹任)이 사사당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일족이 몰락했는데, 하천으로 떨어진 손씨가 해미 군관 허륜의 첩이 된 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허준(許浚)이다.


명종이 승하하고 14대 임금 선조가 즉위한 즈음, 허준은 첩의 자식이면서도 아버지 그늘 아래서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하나 둘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헛헛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실 추씨 몰래 글을 배우고 아버지 위세를 빌려 큰 갓을 썼지만 자신이 천첩의 아들임은 변함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용천에 유의태라는 명의를 쫓아온 부녀가 있었다. 하지만 유의태와 길이 엇갈려 아버지는 객사하고 딸인 다희는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된다. 한눈에 다희에게 반한 허준이 그녀를 도와 장사를 치뤄준 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마지우가 있는 경상도 땅 산음현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 유민이 많은 시기이므로 관의 도움을 빈다면 적당히 신분을 속이고 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산음현으로 가는 동안 패물과 돈을 꾸려 맡았던 장번사령이 도망쳐 허준 일가는 빈털털이가 된다. 게다가 겨우 찾아간 산음현 현감도 이미 바뀐 터라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전임 현감과 각별한 사이였다던 구일서가 허준이 살 곳을 제공해주어 겨우 터를 잡는다. 게다가 산음 땅은 "3년만 꿈지럭거리면 3년 먹을 걸 들고 나간다"는 말이 있는 고장이었다. 당귀와 오미자 등 약초가 최상급이었고 마연동 사철광에서 품을 팔아도 호구지책은 되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허준이 유의태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어머니 손씨가 여독으로 인해 체기가 있어 의원을 찾아 갔는데 그가 바로 유의태였다. 유의태는 손씨가 배를 타고 왔다는 사실을 보지 않고도 알아 맞혔고,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판가름하여 칼로 베듯이 처방을 내렸다. 허준은 그의 압도적인 실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문하가 되기로 결심한다.


유의태 문하는 고달팠다. 일단 텃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허준은 매일같이 그들의 '악의'에 의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유의태의 태도였다. 유의태는 문하에 든 자들에게 의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약초를 캐오라, 병자를 수발들라, 따위 허드렛 일만 시켰을 뿐 배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게다가 야속한 것은 문하에 든 자들이 조금이라도 서운한 감정을 비칠라 치면 '언제 있으라 했나' 하는 식으로 내쳤다.

허준이 유의태를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의술에 대한 태도' 정도였고, 그것도 유의태가 삼적대사나 안광익과 같은 동료 의원들과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였다. 오로지 어깨 너머로, 빌려다 본 의서로, 그리고 유의태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 눈여겨 본 짐작으로 의술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준의 집에 응급환자가 들이닥쳤다. 허준은 자신이 아직 의원이 아니므로 고칠 수 없다 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소문 나 허준 집으로 돈이 없는 자들이 병을 고쳐달라고 드나들기 시작했다. 영달이 등이 이를 눈치채고 유의태에게 '허준이 허락없이 의원을 열어 돈을 취한다'고 일러바쳤다. 욕심 많은 유의태의 아내는 이를 듣고 눈이 뒤집히지만 유의태는 사정을 들어보더니 허준이 환자에게 처방한 내역을 가져오라 이른다. 그리고 허준의 처방에 대해 평을 해준다. 이것이 유의태가 허준에게 내려준 최초의 직접적인 가르침이었다. 


본래 유의태는 젊었을 적 어의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당시 내의원 일인자인 양예수가 유의태의 뛰어난 의술을 경계하는 바람에 어의가 되지 못했다. 비분을 금치 못한 유의태가 양예수에게 대들다 마침내 구침지희(九鍼之戱)로 실력을 가름한 일화는 유명하다. 구침지희에서 승리한 유의태의 버선코에 양예수는 '조선 제일 의원은 산음의 유의태다'라고 조아려야만 했다. 

하지만 승리도 젊었을 적의 치기에서 비롯된 허망한 결과였을 뿐, 유의태는 의술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닫고 산음에 묻혀 의원을 연다. 그런 유의태가 아들 도지가 아닌 다른 자에게 최초로 의술을 가르치니 허준의 정성이 갸륵했음이다.  

허준은 유의태의 신임을 받아 세도가인 창녕 성대감의 안부인 병을 고치러 떠난다. 성대감은 처음에 유의태가 아닌 허준이 온 것에 실망하나, 허준이 정성으로 병자를 돌본 끝에 풍병을 낫게 하자 감동하여 내의원이 될 수 있는 소개장을 써준다.

뜻밖의 결과에 허준은 어리둥절 하면서도 소개장이 제시하는 희망에 도취되어 이제 면천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냥 들떠 산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임오근 등의 비방이었다. 허준이 병자를 낫워주고 받은 소개장으로 내의원이 되려 한다는 생각에 분개한 유의태는 허준으로 부터 소개장을 빼앗아 불태워버린 뒤 문하에서 내쫓는다. 


상심한 허준은 스승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의원 되기를 포기한다. 고흥 나로도의 구일서라도 찾아가 남은 삶을 의탁해야겠다는 생각은 임시변통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허준은 길을 떠난다. 그리고 우연히 두 냥 짜리 산삼을 발견한다. 두 냥이면 부르는 게 값이었다. 면천은 못 해도 남은 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허준의 거동을 수상쩍게 생각한 심마니들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 맞고 산삼까지 빼앗긴 것이다. 피떡이 되어 있는 허준을 안광익과 김민세가 우연히 발견해 구해준다. 

깨어난 허준에게 김민세는 허준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면천시켜 주랴" 라는 말을 반복해서 묻는다. 허준은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고 김민세의 기세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힌다.

기운을 차린 허준은 김민세라는 인물이 궁금하기도 하고 면천이라는 단어에 매혹되기도 해서 그를 찾아간다. 그러나 김민세는 산에서 문둥병자들을 고치며 원수의 아들과 살아가고 있었다. 허준이 의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허준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내의원 취재에 응하기로 작정한다. 유의태의 오해도 어느 정도 풀렸고, 유의태 문하의 상화라는 상냥한 젊은이가 의서도 구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유의태의 아들 도지와 나란히 한양으로 취재 시험을 보러간 허준은 그러나, 취재에 응하지 못한다. 가는 도중 주막에서 병자들을 고쳐주다가 결국 버드내라는 마을까지 가서 '한 사람만이라도 더' 고쳐주려다 결국 취재 시험에 맞춰 한양에 가지 못한 것이다. 

낙심한 허준이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도지의 합격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유의태는 기뻐하기는 커녕 도지에게 허준이 과장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추궁하고, 의술을 져버린 아들에게 크게 실망하여 의절하고 만다.  얼마 뒤 유의태 문하의 임오근이 패악질을 부리고 떠나는 바람에 유의태가 팔을 다치자 허준이 그를 대신 병자를 돌보게 된다. 유의태와 허준이 화해함과 동시에 '비인부전(非人不傳)'이 이루어지는 계기였다. 얼마 뒤 유의태는 반위로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몸을 허준에게 남긴다. 허준은 울면서 스승의 몸을 해부한다.


유의태가 사망하고 허준은 취재에 다시 응해 수석으로 합격한다. 양예수의 견제로 허준은 혜민서와 같이 힘든 곳으로 돌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지만 공빈의 아우를 고치면서 선조의 눈에 든다. 

공빈의 아우는 구안와사였는데 양예수는 구안와사만 극적으로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허준은 진맥 중 그가 반위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 결국 반위를 고친 것이다. 


허준은 또한 중국의 이시진이 본초강목(本草鋼目)을 지어 의술에 크게 기여한 바를 보고 감명받아 자신도 동의보감(東醫寶鑑)과 같은 방대한 의서를 집필할 계획을 세운다.

왜란 중에는 의원들이 제 한몸 지키기에 급급할 때 혜민서 서고의 비망록과 처방전을 보물과 같이 챙겨 맨 마지막으로 피난을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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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자율학습 시간에 맨 뒷자리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보던 소설인데 당시에는 중편 쯤 읽다 작파했다가, 이번에 다시 완독하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로 주로 활동하던 이은성의 유작으로, 본래 춘하추동 4부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심장발작으로 작가가 사망하는 바람에 추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소설이 끝이 난다. 그래서 의녀 미사(美史)와의 관계 등이 시작 부분에서 마무리되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신영복 선생은 <동의보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건들이 허준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가공의 사실이라 해도, 허준이 내놓은 결과물들에 비춰봤을 때 '사실은 아닐지언정 진실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그의 혜안에 동감하는 바이다. 


스승 유의태가 의사를 여덟 가지로 나누어 놓았기에 여기 적어 본다.


첫째는 심의(心醫)로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로서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하여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둘째가 식의(食醫)로 병자의 병세를 판단함에 항상 정성이 모자라며 병자가 말하는 병명만 기억하고 약을 지어먹이는 자다.


셋째가 약의(藥醫)로 스스로 병자의 성색을 판단하여 병의 경중을 찾아내려 않고 병자가 구술하는 대로 약방문에 의지해 약을 짓되 병이 조석으로 성쇠가 있는 법과 병자의 근력과 내장의 허실까지를 비교하지 않고 병자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부위의 약만 마냥 먹이며 차도를 기다리는 자다.


넷째가 혼의(昏醫)로 병자가 위급해하면 저도 덩달아 허둥대고 병자가 쓰러져 잠들면 저도 궁둥이 붙이고 앉아 눈만 뒤룩거리며 오로지 비싼 약 팔 궁리만 일삼는 자다.


다섯째가 광의(狂醫)로 병자란 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항상 과장된다는 걸 모르고 오로지 병자의 말만 듣고 매운 약을 함부로 지어먹이는 자다.


여섯째가 망의(妄醫)로 병자의 고통보다 병자의 의복을 보아 약값을 많이 내는 인가 아닌가에 더 관심이 있고 또한 밤중에 찾아오면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행색이 가난하면 따돌리기 일쑤인 자로 낮에 찾아가도 병자의 마르고 부한 것조차 보지 않으며 오로지 전에 누굴 무슨 약으로 고쳤다는 것만 증험 삼아서 비싼 약이 잘 낫는다고 우기는 자다.


일곱째가 사의(詐醫)로 오로지 의원의 행색만 흉내내며 스스로 안 아픈 이도 찾아다니며 병을 보는 체하다가 그저 제가 꾸미는 한 가지 약으로 만병통치라 우기는 자다.


여덟째가 살의(殺醫)로 춘하추동 계절이 바뀌는 이치와 생명이 살고 죽는 이치를 알지 못하며 하물며 아파 고통받는 이를 보고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고 나아가 남이 지은 약방문에 일일이 이다 아니다 요란을 떨어 제 이름만 파는 자다.


유의태의 말에 아들 도지가 말한다. 


"결국 본받을 만한 의원은 심의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유의태가 답한다.


"그러니까 저마다 의원이노라 행세할지라도 이 세상이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는 의원은 오로지 한 부류 심의뿐이다."


의사 수를 늘린다고 하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패악을 떨고, 결국 응급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은 살의(殺醫)쯤으로 분류하면 될까. 

국가로부터 라이센스를 강력하게 보호받는 집단들은 자신들이 받는 혜택에 대한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한순간도 망각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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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가 아닌 남자 다크 시크릿 1
미카엘 요르트.한스 로센펠트 지음, 홍이정 옮김 / 가치창조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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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중남부 멜라렌호에 있는 도시 베스테로스에서 한 소년이 실종된다. 올해 16세가 된 소년의 이름은 로저 에릭손으로, 실종 전날 여자친구 리자의 집에서 밤 10시경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종신고를 접수한 지역 경찰은 주말 이틀동안 관계자 진술을 받는 데 허비하고 월요일이 되서야 정식 수사를 개시한다. 

로저 에릭손은 습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온 몸에는 칼자국 투성이었고, 심장은 적출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특별살인사건 전담반이 투입되어 지역경찰로부터 사건을 인계받는다. 팀장 토르켈, 행동파 반야, 컴퓨 전문가 빌리, 그리고 감식전문가 우르줄라 팀은 로저가 다녔던 팔름뢰브스카 고등학교를 중심을 관계자 진술을 청취하며 수사를 시작한다.


한편, 연쇄살인범 힌데를 잡아 넣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며 범죄 심리학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던 세바스찬 베르크만은 아내 릴리와 딸 자비네를 쓰나미로 잃고난 뒤 약물에 의존하며 완전히 망가진 삶을 살고 있었다. 특별살인사건 전담반 구성원으로부터 배척되어 쫓겨나다시피 한 뒤 겨우 약물은 끊었지만 여전히 딸을 잃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었으며,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무 여자하고나 병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런 세바스찬에게 어머니의 사망은 처리해야 할 또다른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세바스찬은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물건들을 처분한 뒤 하루속히 부동산을 팔아버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유품을 뒤적거린 것도 그런 실무적인 처리 작업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편지는 안나 에릭손이라는 여자가 보낸 것으로, 내용은 세바스찬의 아이를 임신해서 하루 속히 세바스찬과 연락이 닿아야 하는 데 그가 어디 사는 지 몰라 어머니에게로 편지를 부친다는 것이었다. 1979년의 일이니 30년 전이었다. 세바스찬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안나 에릭손이라는 여자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편지가 사실이라면, 어딘가에 세바스찬의 아들, 혹은 딸이 살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비네를 잃고 폐인처럼 살아가는 세바스찬에게 이러한 상상은 묘한 삶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안나 에릭손을 어디가서 찾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왠만한 개인정보가 보호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그녀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특별살인사건 전담반에 다시 합류하는 길밖에 없어보였다.

세바스찬은 토르켈을 만나 다시 한번 함께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토르켈은 세바스찬에게서 알 수 없는 간절함을 엿보아서였는지 그를 다시 팀에 합류시킨다.


우르줄라가 질색팔색을 하는 통에 그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토르켈 곤란해졌고, 반야 역시 직설적이고 반사회적인 세바스찬과 팀을 이루는 데 고충을 겪는다. 하지만 범인의 심리에 대한 세바스찬의 탁월한 분석 덕택에 특별살인사건 전담반은 한발짝씩 범인을 향해 나아간다.


가장 먼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중학교 동창 레오였다. 레오가 로저를 폭행한 것과 시계를 빼앗은 정황은 분명했다. 하지만 '살인자가 아닌 남자'가 로저를 범인으로 만들려는 섣부른 시도, 즉 죽은 로저의 피묻은 자켓을 레오의 차고지에 가져다 놓은 행동, 때문에 레오는 범인에서 제외된다.


다음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학교 수위 악셀 요한손. 그는 학생들에게 알코올을 팔았다가 로저의 밀고로 학교에서 해고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로저가 악셀을 밀고한 이유는 동업자로서 정당한 몫을 분배받지 못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을 뿐이고 딱히 살인을 할 만큼의 적개심도 없어 보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독교 원리주의를 표방한 팔름뢰브스카 고등학교의 치부가 속속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자가 바로 팔름뢰브스카 고등학교 교장 라그나르 그로스다. CCTV를 기반으로 사건 당일 로저의 동선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모텔에 주목하게 된다. 혹시 로저가 모텔에서 무언가 봐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사건 당일 모텔에 교장 라그나르 그로스가 동성애인과 투숙했던 정황이 드러난다. 수사팀은 교장을 압박하고 압수수색을 진행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로저의 심리상담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점점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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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프로듀서이자 연출가이며 시나리오 작가인 미카엘 요르트와 마찬가지로 시나리오 작가이자 TV 진행자인 한스 로센펠트가 함께 집필한 <살인자가 아닌 남자>는 공동집필 소설 특유의 정교한 균형감을 보여준다.

작품은 <다크 시크릿> 시리즈 1편으로 2편이 바로 <그가 알던 여자들>이다. 순서를 바꿔 읽어도 큰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 1편을 먼저 읽는 편이 2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편은 세바스찬이 자신의 딸이 다름아닌 반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끝이나고, 2편은 세바스찬이 반야의 양아버지 뒷조사를 하는 등 치졸한 짓을 벌여서라도 딸과 관계를 맺어보려는 눈물 겨운 노력이 배경 이야기로 깔리기 때문이다. 

3편은 <아무도 찾지 않는 자들의 죽음> 인데 번역이 잘 되어 있을 지 걱정이다. <그가 알던 여자들>은 무수한 오타로 점철되어 있고, 특히 안나와 세바스찬이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연도 오기가 있어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안나가 세바스찬에게 15년 쯤 전, 1966년에 세바스찬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1996년을 잘 못 써 놓은 것이다. 안나가 세바스찬에게 아이를 임신했다고 편지를 쓴 것이 1979년이고, 그로부터 30년 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로저를 죽인 것은 같은 반 급우인 요한이었다. 요한은 로저가 자신의 어머니 베아트리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친구인 로저를 등 뒤에서 사살하고,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요한의 아버지가 현장에 왔다가 탄흔을 제거하기 위해 심장을 적출하게 된다. 

로저의 어머니는 아들이 베아트리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중지시키기는 커녕 평판에 죽고 못 사는 교장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다. 마지막에 S60이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경찰로 부터 전해들은 로저의 어머니는 분명히 그 차를 교장이 이용했을 것이라 생각하여 교장을 추궁하다가 사고사 한다. 교장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로저의 어머니가 눈 앞에서 사망하자 자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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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장의 살인 시인장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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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하무라 유즈루는 본래 미스터리 연구회에 가입했으나 동아리의 낮은 수준에 실망하다가 '신코의 홈즈'로 불리는 아케치 교스케의 권유에 의해 동아리를 탈퇴, 미스터리 애호회에 가입한다. 그런데 막상 가입하고 보니 미스터리 애호회의 회원은 본인 하나 뿐이었다. 

어쨌든 아케치와 하무라는 그럭저럭 미스터리를 도락 삼아 갖가지 추리를 펼치며 흥미로운 나날을 보냈는데, 그들이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영화 연구부가 추진하고 있는 합숙에 참가하는 것이다.

영화 연구부는 매년 여름 방학에 심령 영상을 찍는다는 미명 하에 남녀 부원이 함께하는 합숙을 추진해 왔다. 일단 이런 컨셉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작년에 합숙에 참가했던 여성부원 하나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둘에게는 너무나 구미가 당기는 합숙이었다. 하지만 영화 연구부 부장 신도 아유무는 이들의 참가 의사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했다.

마침 그때 나타난 것이 겐자키 히루코이다. 그녀는 문학부 2년생으로 여러 범죄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겐자키 히루코는 자신과 함께 팀을 이루면 합숙에 참가할 수 있다며 하무라 등에게 같이 갈 것을 제안해 왔다. '올해의 희생양은 누구냐' 라는 협박장까지 날아온 합숙.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클로즈드 서클'.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지금, 작가는 어떻게 클로즈드 서클을 만들어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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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드 서클을 만들어 내는 것은 뜻밖에도 '마다라메' 라는 정체 불명의 기관이 만들고 유포한 좀비 바이러스 때문이다. 합숙소 인근에서 열린 록 페스티발에 마다라메가 좀비 바이러스를 유포하자 인근 지역을 격리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클로즈드 서클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마다라메 기관에 대한 설명이 얼렁뚱땅이라서 그저 격리 상태를 만들기 위해 '있다 치는' 조직에 불과하다. 그들의 의도나 지향점이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신코의 홈즈'가 초반에 좀비가 되는 과정도 불성실하게 처리되며, 하무라와 히루코의 러브라인도 어정쩡하다. 대량 살인을 벌인 범행에 우연의 요소가 너무 많고, 범행 동기가 같은 동네 살던 언니의 죽음이라는 것도 납득이 안된다. 201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와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의 영예를 차지한 작품이지만, 서사구조도 수수께끼 풀이도 모두 기대 이하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10123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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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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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0여년 전 작가가 고향에 들렀다가 우연히 <오봉선생 실기> 라는 책을 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실기의 주인공은 확고한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고도 집안의 관심 있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로 성은 채(蔡), 이름은 이항(以恒)이며 자는 여구(汝久), 호는 오봉(五峰)이다. 이 소설은 채이항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 채동구(東求)의 네 번의 가출기이다.


채동구는 과거에 나아가기에는 글이 부족했고, 무관이 되기에는 근골이 약했다. 그는 벼슬 없는 한미한 시골 선비로 살았지만, '충성'과 '숭명대의(崇明大義)'라는 신념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 채동구는 그러라고 시킨 이도 없고, 그럴 이유도 꼭 집기 어려웠으나, 어쨌든 가출을 했다. 이괄의 난에는 근왕을 위해 공주로 갔고, 정묘호란에는 강화도에 갔다.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으로 가 오랑캐를 멀리서 바라봤고, 끝내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가 원인이 되어 심양까지 끌려간다. 


어찌 보면 그의 가출은 미욱해 보인다. 특히나 뽑히지 않는 칼을 차고 명선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가는 모습은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난 이 어른이 뭘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이 어른은 초지일관해서 당신 가실 길을 가셨네. 남들이 우습다고 하고, 미쳤다고도 했지만 어른은 신념을 지키셨네. 신념이 옳다 그르다가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그걸 지킨 것. 난 바로 그게 사람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작가는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신념을 지킨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힘이라고.


잘 쓴 소설이다. 채동구의 일생을 조롱의 빛을 띄고 서술하던 작가의 어조가 차츰 공감과 감동으로 변화하는 대목도 자연스럽고, 액자식 구성으로 현대와 과거를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솜씨도 멋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과거의 어느 한 때라면 이 책을 읽고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저지르던 자들, 8.15에 코로나 확산 파티를 벌이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의 '신념'을 보고난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코미디언이 한 말인지, 원래 있던 말인지 모르겠으나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이 오히려 와닿는 요즘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09790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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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 물건을 버린 후 찾아온 12가지 놀라운 인생의 변화
사사키 후미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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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90년대 초, 인하대학교 앞에는 '길' 이라는 서점과, '새벽' 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두 서점 모두 책을 사면 비닐로 포장을 해주었다. '길' 서점은 내가 3학년 때인가 흉흉한 소문과 함께 사라졌다. '새벽' 서점은 주인장이 만화책방을 겸영하며 '도서 판매량 저하 경향'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해 갔다.


당시 용돈을 타거나 가욋돈이 생기면 서점에 갔다. 서점에 들어가기 전엔 졸밋한 기분이 들며 요의가 느껴지므로 화장실에 들른 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렇지 않으면 도서 선정을 그르치기 쉽다.

제일 먼저 주인장이 중앙에 진열해 놓은 권장도서를 훑어 본다. 사회과학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적당히 조합한 그 권장도서들은 물론 구미가 당긴다. 하지만 민음사에서 한창 새로이 번역하여 발간하기 시작한 세계문학들도 만만치 않다. 아, 책등 한가운데 빨간색 네모 안에 <문학과 지성사>가 박힌 소설들도 나를 유혹한다. 그렇지만 역시 <창작과 비평> 사의 소설들 쪽이? 아니야.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아직 읽지 못했잖아... 나는 한시간여를 그렇게 구경만 하다 겨우 한 두권을 아쉽게 사서 탐닉하듯 읽었다. 


그러다 작가들의 서재를 찍은 사진 등에 매료되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마쓰모토 세이초, 고은, 심지어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나오는 유교수의 서재까지... 책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그 사진과 그림들에서 나는 묘한 위안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취직을 한 뒤 책들을 살 여유가 더 많이 생겼다. 술을 마시지 않고, 별다른 취미도 없는 나에게 독서는 그야말로 맞춤한 취미였다. 월급에서 얼마간의 돈을 헐어 책을 사고, 그 책들을 읽는 것. 건강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나의 방은 책들에 점령되기 시작하였다. 


5천권 가량 된 시점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7천권이 되었을 때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책은 내 방 4면을 모두 채우고, 거실을 잠식한 뒤, 복도의 자투리 공간까지 빠짐없이 요구하더니 마침내 책장들 앞에 2중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이사를 한번 하려면 10만원에서 20만원의 추가 견적이 나왔다. 책은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며 위안했지만 단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책이기 때문에 사서 꽂아놓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책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년필이나 볼펜도, 컴퓨터와 노트북도, 다운로드 받은 영화들도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물건으로부터의 '소외' 상태가 더욱 심각해지리라는 위기의식이 들었다. 그때 읽게 된 책이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이다.


...전자책에 대해 느꼈던 위화감은, 사실은 종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읽어도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위해 모으는 거라고 믿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은 실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과시욕의 산물이었다.

...나는 가득 쌓인 책으로 나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흔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저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이, 언제부터인가 과시욕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물건을 늘리면 늘릴수록...'침묵의 To Do 리스트'가 늘어난다. 


그래서 최근 나는 허접한 책들을 '읽어치우는' 데 골몰하기도 했다. 과거에 돈이 없어 책을 사기 어려웠을 때는 정말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소중하게 읽었다. 하지만 책을 구입할 여유가 된 후에 급격히 책이 불어나 보관할 공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허접한 책을 먼저 읽고 북스캐너로 해치우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된 독서생활이었다.


지난 주부터 2주간 50리터 쓰레기 봉투 20여개 분량을 내다 버렸다. 쓰지 않는 전자기기와 옷가지들을 분리수거함에 넣었음에도 쓰레기가 저렇게나 나왔다. 


북스캐너도 바삐 돌아가고 있다. 침묵의 To Do 리스트를 줄이니 현재가 보인다. 그리고 내가 가진 물건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새삼 생겼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크게 어렵지 않은 것들이지만 공감이 간다. 실천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주위에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다음은 사사키 후미오가 말하는 물건을 줄인 후 찾아온 12가지 변화이다.


01. 시간이 생긴다.

02. 생활이 즐거워진다.

03.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04.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05.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06.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07. 집중력이 높아진다.

08. 절약하고 환경을 생각한다.

09. 건강하고 안전하다.

10. 인간관계가 달라진다.

11.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12. 감사하는 삶은 산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09667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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