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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소설은 10여년 전 작가가 고향에 들렀다가 우연히 <오봉선생 실기> 라는 책을 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실기의 주인공은 확고한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고도 집안의 관심 있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로 성은 채(蔡), 이름은 이항(以恒)이며 자는 여구(汝久), 호는 오봉(五峰)이다. 이 소설은 채이항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 채동구(東求)의 네 번의 가출기이다.
채동구는 과거에 나아가기에는 글이 부족했고, 무관이 되기에는 근골이 약했다. 그는 벼슬 없는 한미한 시골 선비로 살았지만, '충성'과 '숭명대의(崇明大義)'라는 신념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 채동구는 그러라고 시킨 이도 없고, 그럴 이유도 꼭 집기 어려웠으나, 어쨌든 가출을 했다. 이괄의 난에는 근왕을 위해 공주로 갔고, 정묘호란에는 강화도에 갔다.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으로 가 오랑캐를 멀리서 바라봤고, 끝내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가 원인이 되어 심양까지 끌려간다.
어찌 보면 그의 가출은 미욱해 보인다. 특히나 뽑히지 않는 칼을 차고 명선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가는 모습은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난 이 어른이 뭘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이 어른은 초지일관해서 당신 가실 길을 가셨네. 남들이 우습다고 하고, 미쳤다고도 했지만 어른은 신념을 지키셨네. 신념이 옳다 그르다가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그걸 지킨 것. 난 바로 그게 사람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작가는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신념을 지킨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힘이라고.
잘 쓴 소설이다. 채동구의 일생을 조롱의 빛을 띄고 서술하던 작가의 어조가 차츰 공감과 감동으로 변화하는 대목도 자연스럽고, 액자식 구성으로 현대와 과거를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솜씨도 멋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과거의 어느 한 때라면 이 책을 읽고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저지르던 자들, 8.15에 코로나 확산 파티를 벌이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의 '신념'을 보고난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코미디언이 한 말인지, 원래 있던 말인지 모르겠으나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이 오히려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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