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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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긍정의 힘>과 <시크릿>, <오프라 윈프리 쇼>가 긍정주의 전도사의 대표자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 우리나라도 그 이념을 열렬히 신봉하며 수많은 긍정주의 철학서를 발간하곤 했다. 그러나 딱히 기억에 남는 긍정주의 전도서가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미국 전도서의 번역판정도였으며 내용도 대동소이 했기때문일 것이다.

 

한국판 전도서라면 긍정주의 이후의 힐링이었다. 이는 이미 충분히 난도질당하여 다시 찌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긍정주의와 힐링의 공통점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여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나의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를 위해 돈을 지불해야한다. 책 한 권을 사보는 것, 정신개조를 위해 세미나에 참여하거나 발우공양을 하러 떠나기 등 긍정 혹은 힐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마치 마약처럼 점점 그 약효를 오해동안 지속하려면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력구제에 대한 실패역시 자력구제에 맞긴다는 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세일즈 포인트라면 지식인의 자기고백이다. 그녀와 같이 박사학위를 받고, 시민운동을 하던 이도 암에 걸리고 실업을 하면 긍정주의의 손 내밈을 받는다. 그만큼 긍정주의의 손 내밈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는 달라 보이는 이’의 ‘나와의 동일한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경향이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나, (요새는 이도 안하는 것 같지만) 몇 년 전만해도 기자들이 공장에 취직하거나 노숙을 하면서 체험기 등을 내민 적이 있다. 물론 그들의 노고는 알겠지만 그게 엘리트들의 가짜 경험이며 그 진짜 경험을 하고 있는 누군가는 기만당하고 있다는 오만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 있다. 이런 미묘한 지점에서 이 책의 ‘진짜 경험’은 확실한 세일즈 포인트다.

 

 “이들은 가두시위에 나서거나, 정치적 신념을 바꾸거나, 자동화기를 들고 직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 본문 173p

 

본문에서 종종 나오는, 긍정주의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 우리가 진짜 해야 할 것들로 들리는 제안들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안이다. 2008년 한국을 휩쓸었던 ‘짱돌을 들라’며 끝나는 책이 떠오른다.

 

하지만 짱돌을 든 결과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비슷했다. 스스로가 99%라며 결집한 미국인들은 여전히 굳건한 금융자본주의아래 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침 이슬’을 듣게 만들었던 시민들에게 남은 건 집시법을 위반했다는 고지와 벌금이었다. 짱돌을 들 힘이 없어 조용히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 최대한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대안은 매력적인 사례들과 현상 분석에 비해 힘이 달렸다. 하기사, 누군가 매력적인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11p. 긍정주의는 원래 가혹한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철교도적 칼뱅주의에 반발하는 `신사상 운동`으로 태동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소비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한다. (한명숙의 추천사 중)

24p. 희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상태이자 갈망이다. 반면 낙천주의는 인지 상태이며 의식적인 기대이므로 누구든 수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다.

65p. 이라크 전의 병력 증강을 두고 `배타적 증폭`(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말만 들음으로써 판단 착오나 실수를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말을 그대로 적용해도 좋다.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얼마나 신나는 생각인가? 행동과학자들이 그렇게 해서 열차에 올라탈 표를 거머쥔 것이다. 암 관련 연구에는 엄청난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행동과학자들은 거기 매달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암퇴치를 위한 연구에 달리 어떠게 기여하겠습니까?

72p. 그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부정하고, 불행에 즐겁게 굴복하고, 닥친 운명에 대해 오직 자기 자신을 비난하라고 말한다.

81p. P.T. 바넘효과: 19세기 말 곡에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을을 알아맞혔던 인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경향을 `바넘 효과`라고 한다.

107p. 수많은 사람들이 그걸 믿고 있기 때문에 양자물리학을 그릇되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서 좋을 것 없다고 말했다.

125p.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밖에 없었다.

133p. 칼뱅주의는 사악한 성향을 이유로, 긍정적 사고는 `부정성`을 이유로 자아를 공격한다.

140p. 이제 긍정적 사고는 불안한 사람을 위한 진정제, 심리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한 치료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가 되었다.

165p. 적절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해, 혹은 더 인간적인 기업 정책을 요구하기 위해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평생 노력을 바쳐야 한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 뿐이다.

168p. 무엇보다 정리해고는 돌연히 전면적으로 실시해 희생자들이 해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불만을 전염시킬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173p. 아름다운 포스터와 멋진 문구만으로 의욕이 샘솟는다면 당신은 몹시 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로봇이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172p. 한편으로 노먼 빈센트 필 방식의 구식 긍정적 사고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코치들은 "훌륭한 팀원은 예외없이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늘 미소 띤 얼굴에 불평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친 비판을 경계하며, 상사가 어떤 요구를 해도 우아하게 따르는 그런 사람 말이다.

202p. 요즘에는 어디를 가든 `유인제공`이나 `부가가치`같은 기업 용어와 맞닥뜨리게 된다. 똑같은 지휘 계통에, 똑같은 책상 배치에, 미학을 경시하는 똑같은 밋밋한 기능주의에 똑같이 동기유발 및 인위적으로 조성된 팀 정신에 의존하는 것 천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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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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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여름. 한 예술가의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광주 비엔날레에 <세월오월>이라는 대통령 풍자화를 그렸던 홍성담 씨는 결국 작품을 철거했다. 예술이라는 농담거짓말로 받아들여져서다. 그랬던 그가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FP)‘2014 올해의 사상가중 예술가 부문에 뽑혔다. (IS의 수장 등이 사상가의 다른 목록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상가의 평가에 대한 부분은 제외한 것 같다.) 한 나라는 예술가의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다른 나라는 그 농담을 만든 자를 사상가로 인정했다.

 

 

 

홍성담 작가의 세월 오월부분

 

밀란 쿤데라가 이 상황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는 최근작 <무의미의 축제>에서 더 이상 농담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비꼰다. (쿤데라에게 비판한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는 그의 첫 소설집 <농담>부터 시작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도 꾸준히 보이는 모티프다. 쿤데라 본인 역시 검열이 삼엄한 시대에 프랑스로 망명을 간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농담은 위험한 게 됐지. ... 농담의 황혼! 장난-후의 시대!” (라몽) (98p)

 

쿤데라는 스탈린 시대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장난-후의 시대라고 부른다. 풍자 그림이 검열대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를 쿤데라는 포스트-농담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또 그런 예술가를 사상가로 지정하는 사회를 쿤데라가 좋아할 것 같진 않다. 그는 농담이 거짓말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싫어할 테지만, 농담이 의미를 가진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도 고개를 저을 것 같다.

 

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장난이 힘을 잃었다는 게 보인다. 너는 기를 쓰고 파키스탄 어를 해서 흥을 돋우려 하고 있어. 그래 봐야 안 돼. 너는 피곤하고 지겹기만 할 뿐이야.” (라몽) (96p)

 

사상가들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함과 권리에 대해서도 콧방귀를 뀐다. 어쩌면 인간의 권리였어야 할 것들은 쟁취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인간이 쟁취해서 얻을 수 있는 권리는 무의미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저 사람들 전부 좀 봐라! 한번 봐! 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이 못생겼지. 못생겼다는 것, 그것도 역시 인간의 권리에 속하나? 그리고 한평생 짐처럼 추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아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네 성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알랭의 어머니) (133p)

 

쿤데라는 농담이 거짓말로 받아들여지는 전체주의의 사회도, 농담이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의 사회도 거부한다. 쿤데라가 원하는 세상은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 받아지는 세상이다. 농담이 농담 그자체로 받아들여지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농담이라는 것은 그 농담을 듣는 구성원이 어떤 전제를 공유하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웃찾사의 갑과 을을 보고 함께 웃으려면 이 세상의 갑과 을이라는 지위가 있고 갑이 을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는 상황을 경험하거나 이해한 적이 있어야 웃음이 터진다. 많은 이들이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개그 코드, 즉 함께 농담을 던지며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곧 가치관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농담이 통하는 가치관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수가 많을 것이다. 쿤데라 역시 자신의 가치관을 제시한다. 이 가치관은 남에게 죄를 전가하지 않는 것이다. 행인과 어깨를 부딪치고 애꿎은 사과를 하고 돌아온 알랭이 말한다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알랭) (57p)

 

현대사회는 서로에게 죄를 전가하는 방식으로 만인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투쟁이 없을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은 이미 전쟁터다. 어쩌면 삶을 시작해 버린 것, 우리의 의지 없이 중요한 것들은 모두 무의미하게 시작 돼 버리는 삶에서, 쿤데라의 말처럼 우리는 사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수도 있다.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들며 농담을 거짓말로 만드는 삶을 살아갈 테니까 말이다. 몇 년 전 언니네 이발관도 말했더랬다.

 

언젠가 우리 별이 되어 사라지겠죠/ 모두의 맘이 아파올걸 나는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정해져 있는걸/ 세상을 만든 이에겐 아무 일도 아닐 테니까/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먼저 나온 사람의 말이/ 사랑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네 (언니네 이발관, ‘인생은 금물가운데)

 

언제나 비유를 사용해서 인지 쿤데라가 주창하거나, 바랬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책과 전작을 통틀어서 가장 간절하게 쓰였다고 느낀 문장이 있다.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샤를) (58p)

쿤데라가 바라는 세상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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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거야. 재치 있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어. 여자가 마음을 탁 놓게 만들고, 그러니 접근이 더 쉬워지지. (25p)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57p)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샤를) (58p)

지루한 거 말이야, 그거보다 나쁜 건 없거든. 바로 그래서 내가 여자를 자꾸 바꾸는 거야. 그렇게 안하면 좋은 기분일 수가 없어. (카클리크) (85p)

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 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장난이 힘을 잃었다는 게 보인다. 너는 기를 쓰고 파키스탄어를 해서 흥을 돋우려 하고 있어. 그래 봐야 안돼. 너는 피곤하고 지겹기만 할 뿐이야. (라몽) (96p)

우스운 것에 대한 성찰에서 헤겔은 진정한 유머란 무한히 좋은 기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 잘 들어, 그가 한 말 그대로 하는거야, ‘무한히 좋은 기분’, 말이지. 조롱, 풍자, 빈정거림이 아니야. 오로지 무한히 좋은 기분이라는 저 높은 곳에서만 너는 사람들의 영원한 어리석음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 있는 거라고. ... 그런데 어떻게 찾지, 좋은 기분을? ...그걸 어떻게 찾는냐고, 좋은 기분을? (라몽) (99p)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사상은 말이오, 동지들,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는 거요. 이말은 즉, 우리가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떠한 실재도 없다, 물자체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표상을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이 실재가 되게 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부과하는 막대한 의지 말이오. (스탈린) (116p)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세계의 표상이 있다는 것. 그건 필연적으로 혼돈을 말들이죠. 이 혼돈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까요? 답은 분명해요.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표상만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의지에 의해서만, 단 하나의 막대한 의지, 모든 의지 위의 의지에 의해서만 부과될 수 있어요. ...커다란 의지의 지배 아래 놓이면 사람들은 결국 아무거나 다 믿게 되는 법이거든. (스탈린) (117p)

모두가 인간의 권리에 대해 떠들어 대지. 얼마나 우습니! 너는 무슨 권리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야. 자기 의지로 삶을 끝내는 일까지도 그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는 기사들은 허락해 주지 않아. (알랭의 어머니) (132p)

저 사람들 전부 좀 봐라! 한번 봐! 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이 못생겼지. 못생겼다는 것, 그것도 역시 인간의 권리에 속하나? 그리고 한평생 짐처럼 추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아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네 성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알랭의 어머니) (133p)

(샤갈전에 몇 번이 갔지만 들어가지 않는 라몽) 사실 여기에 샤갈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한 주 한 주 지나며 줄이 더 길어지는 걸, 그러니까 지구에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걸 확인하러 오는 거지. 저 사람들 봐! 저 사람들이 느닷없이 샤갈을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해?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가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 (136p)

물론 획일성은 어디에나 퍼져있지만, 그래도 이 공원에서는 획일성이 좀 다양하게 있잖아. 그러니까 너는 네 개별성의 환상을 지킬 수 있는 거지. (라몽) (136p)

한 가지는 분명해.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 태아. ...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알랭) (1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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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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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라인업이 훌륭. 헤드라이너들이 하루에 4~5개 있는 공연을 보는 듯했다. 세월호에 관한 글을 엮은 책에 대해 이렇게 가비얍게 평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만큼 세월호에 관한 뭐든지 조심스러워진다. 이 때문에 피로감이라는 말도 나올 수도.. 있었..겠지. 물론 피로감 같은 말을 하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예의라고는 없는 이들이지만.

 

박민규작가의 글이 가장 잘 쓰여진 글이라 생각했다. 책 제목부터 박민규 글의 제목으로 따왔으니 편집부도 그리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박민규작가의 글은 최근에 안읽어봤다. 박민규라는 작가가 이렇게도 쓰는 사람이구나, 생각할 정도로 깔끔했다. 저널리즘 글쓰기로도 손색없을만큼 짧고 명쾌한 문장과 꼼꼼한 사실관계까지 갖췄다. 특히나 '사고'와 '사건'을 비교하며 세월호를 '사건'이라 규정한 부분이 날카롭고 깊이있다.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주로 개인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57p)

 

대한민국을 세월호와 비유한 부분 역시 탁월했다. 여지껏 대한민국을 세월호라 비유한 글들을 많이 봐왔지만 이토록 짝 달라붙는 글은 없었다. 소름 돋았다. 

 

-내릴 수 없는 배다일본이 36년간 운항하던 배였고 우리가 자력으로 구입한 선박이 아니었다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생각했다배는 늘 통제되고 관리되어왔다. 2층 객실에서 3층 객실로이어 4층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나 좁고 미어터졌다붐비는 통로에서 또 복도에서 우리는 늘 방송을 들었다잘살아보자는 방송하면 된다는 방송이었다올라가기 위해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발전과 번영은 종교가 되었고 배가 왜 이렇게 기울었지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이란 이름의 이단으로 몰려야 했다우리는 태생적으로 기울어야 했던 국민이다기울어진 배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에게 이 기울기는 안정적인 것이었다. (64p)

 

박민규의 글이 가장 잘 쓰여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잘 쓰여진 것과 좋아하는 글은 다르다. 가장 좋았던 글은 황정은 작가의 글과 진은영 작가의 글. 


황정은 작가의 '앨리스씨'를 읽었을 때도 느낀거지만 그의 글에선 츤데레스러움이 느껴진다. 항상 '망했어'를 연발하는, 말하기 좋아하고 잘난척 좋아하는 이들에 둘러쌓여있지만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오고간 대화를 곰곰이 곱씹는 친구가 생각나는 글이었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고백을 해보자. 4월 16일 이후로 많은 날들에게 나는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 말하고 다녔다무력해서 단념하고 온갖 것을 다 혐오했다그것 역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여유라는 것을 나는 7월 24일 서울광장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말했다엄마아빠는 이제 울고만 있지 않을 거고싸울 거야. (...)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97p)

 

-조금도 상처입지 않으면서 보답받고 응답받는 신뢰같은 거나는 믿지 않겠다조금 더 상처입어도 좋다그것을 감내하고 믿어보겠다. (93p)

 

진은영 작가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제목처럼 세련된 글이다. 잘 설명하지 않으면 반감을 일으키는 개념을 사용한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거지를 때리는 시인 이야기를 삽입했다. 대학 교양시간에 보들레르의 연민을 증오하는 태도에 동의를 표했더니 반에서 개객끼가 되었던 경험이 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탓이겠지. 연민이라는 개념이 그저 상황을 '관조'하는 자에게서 나온다는, 즉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못하는 순진무구한 악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수백명의 죽음앞에서  연민조차 느끼지 않는 이 현실에서 큰 환영을 얻기엔 힘든 개념일 수도 있겠다 싶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73p, 수전 손택타인의 고통 가운데 인용)

-누구도 구조될 가능성이 사라진 어느 날 (한 달 후)논란이 불거지자 민간업체의 이사가 TV에 나와서 말했다. 우리는 사실 구조업체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양을 하러 온 업체라고. 그가 말했다. 그럼 구조는 누가 맡은거냐는 질문에

구조는 국가의 업무죠.

라는, 너무나 당연한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50p)

-한 여당 의원은 말했다. 유가족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준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것과 같다고.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럼 가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여줘야 하냐고. 공공의 적이 공공일 때

공공의 적인 공공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 때

그 공공을 심판할 수 있는 건

누구냐고 묻고 싶다. (53p)

-나는 어렸을 때 에밀레 종의 실제 타종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 그 소리는 매우 슬펐으나 어떤 슬픔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나긴 여운을 간직한 것이었다. 우리가 탄 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월호라는 배를 망각의 고털덩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밝여낸 진실을 통해 커다란 종을 만들고 내가 들었던 소리보다 적어도 삼백 배는 더 큰, 기나긴 여운의 종소리를 후손에게 들려줘야 한다. (65p)

니체는 인간이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너무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니체에 따르면,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가 갖는 감정이다. (72p)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73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가운데 인용)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93p)

조금도 상처입지 않으면서 보답받고 응답받는 신뢰같은 거, 나는 믿지 않겠다. 조금 더 상처입어도 좋다. 그것을 감내하고 믿어보겠다. (93p)

컬럼비아호 사고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좋아한다. 2003년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던 중 날개가 과열되면서 공중 폭발한 사고에 관한 조사결과 보고서다. 영화 <그래비티>를 통해서도 잘 알려졌다. (...) 사고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위원회는 우주왕복선 발사과정 전체를 하나하나 재점검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고가 없었다면 알아내기 힘들었을 재미있는 단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형태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103p)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김홍중

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41p)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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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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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줄 알았던 우울증은 종종 뉴스를 접한 후 다시 도졌다. 의료사고 피해자의 실상, 경영상의 어려움을 꾸며낸 회사가 저지른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 두 뉴스를 연달아 접한 뒤였다. 우울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디서 기분 나쁜 것들만 모아놓곤 뉴스라니.

 

한 웹툰이 떠올랐다. 푸드 파이트에서 승리한 한국인에 대한 뉴스를 신문 구석에 박아 놓았다고 투덜거린다. 그의 독백은 책 <뉴스의 시대>에서 보여주는 알랭 드 보통의 성찰 못지않다.

 

TV 뉴스는 늘 그런식일까? 왜 늘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섭고 슬프고 한심하다고 얘기하는 걸까? 왜 언제나 과장된 오프닝 음악과 경직된 얼굴로 그날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우울한 사건사고들을 헤드라인으로 소개하는 걸까? 왜 일방적으로 문제와 의문만 무책임하게 내던지고 대답은 회피하는 걸까?’ (<오무라이스 잼잼> 45화 가운데, 조경규)​

 

조경규의 <오무라이스 잼잼> 45화  가운데 캡쳐. (다음 웹툰)

여기에 알랭 드 보통은 답한다. 흉악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을 뉴스를 사람들이 찾는 이유를 말해준다.

 

이런 사건들은 분명 말도 안되는 일인지라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상적이고 축복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나면 예측 가능한 일상의 쳇바퀴 앞에서, 우리의 이상한 욕망을 우리가 정말 단단히 비끄러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동료를 독살하거나 친척을 안뜰에 묻어버린 적 없는 자신의 자제심 앞에서 안도한다. (<뉴스의 시대> 16p)

 

책의 제목은 뉴스의 시대’, 원제는 ‘The News: The user’s manual’이다. 뉴스의 시대가 오게된 역사적 설명보다는 원제인 뉴스 보는 법에 가깝기에 한국어판 제목보단 원제가 낫다는 말이 많다. 뉴스를 정치, 해외, 경제, 재난, 셀러브리티, 소비로 카테고리화 한 뒤 각각의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각 뉴스의 임무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뉴스를 자주 보고, 만들어본 자들이라면 식상한 설명과 임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다. 사실 즉 중립을 위한 뉴스보다는 관점이 있는 뉴스를 제공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만을 제공하는 뉴스가 아니라 카테고리화된 뉴스, 뉴스를 삶에 적용하게 만드는 뉴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핵심은 계속 강조된다. 효율적인 독재는 뉴스검열이 아니라 사실만을 나열한, 파편화된 뉴스 제공이라고 말하기까지 할 정도다.

 

민주정치의 진정한 적은 다름아닌 뉴스에 대한 적극적인 검열이라고 여기기 쉽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시대>, 37p)

 

이 책의 탁월한 지점은 뉴스의 시대에 대한 설명이나 뉴스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혹은 뉴스의 임무에 대한, ‘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그 때는 바로 뉴스가 불러들이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각종 뉴스들은 우리에게 분노, 슬픔, 숭배, 질투,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불어 일으킨다. 우리가 뉴스를 보는 이유는 사실 이 감정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다. 이 감정들을 느끼고 분출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그 감정에 대한 분석, 그 감정을 뉴스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다.

 

가령 우리는 정치뉴스에서는 분노를 느낀다.

 

뉴스는 분노에 찬 반응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뉴스는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정당한 수준에서, 저당한 시간동안 화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건설적인 기획의 일부가 되도록 말이다. (<뉴스의 시대>, 66p)

 

유명인에 대한 뉴스에선 숭배와 질투가 섞인다.

 

누군가를 동경하려는 욕구는 우리 심성의 뿌리깊고 중요한 특징이다. 무시하거나 비난한다고 해서 없앨 수가 없다. 그런 무시나 비난은 동경의 욕구를 단순히 저 아래로 밀어넣을 뿐이고, 그럴 경우 이 욕구는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미성숙한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부적절한 대상에 달라부기 십상이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사랑을 억압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지적이고 생산적인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뉴스의 시대>, 184p)

 

시기심은 언제나 맹렬한 도덕주의적 비판의 표적이 되어왔지만, 이는 품위 있는 삶에 꼭 필요한 감정이기도 하다. 시기심은 신중해져야 한다는 신호다. 이 감정에는 우리 인격의 혼란스럽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보내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뒤틀린 메시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기심을 주의깊게 응시하는 건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발걸음을 떼는 데 도움이 된다. (<뉴스의 시대>, 197p)

 

재난뉴스에선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삶을 재조정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 속에서 우리가 응당 알고 있는 바대로 삶을 이끌어갈 기회를 부여한다. (<뉴스의 시대>, 233p)

 

이렇듯 알랭 드 보통은 뉴스 그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 뉴스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뉴스가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감정에 대해 말하기. 이는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잘하던 일이다. 그의 최고작으로 뽑히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등이 그랬던 것같이 말이다. 결국 책은 현대인의 감성을 분석한 것이며 현대인의 감성을 빚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뉴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뉴스의 시대 이전에 종교가 사람들의 감정을 만들어냈듯 말이다. 종교가 지배하던 것을 뉴스가 지배한다. 그렇기에 다시, 책 제목은 원제 ‘User’s manual’보다 뉴스의 시대가 맞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의 뉴스 유저들이, 혹은 뉴스를 만드는 언론계가 이 책을 모두 읽는다 하여 알랭 드 보통이 제안하는 적절한 감정을 배출하고 만드는 사회가 될진 의문이다. 마지막 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무차별적인 뉴스가 아닌 개인이 원하는 뉴스만을 보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그러니까 괴로운 정치 뉴스 같은 것에는 비위가 약하고 패션과 연예 뉴스에만 다이얼을 맞추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맞춤 뉴스가 어떤 효과를 발위했을지 상상해보라. ... 또는 협소한 시야를 가진 건 매한가지지만 관심분야는 좀 달라서 국가의 비극에 대해서만 듣고 싶어하느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아와 학살에 대한 이런 배타적인 관심이, 실은 더 잘살지만 대하기는 더 부담스러운 이웃에 관심을 표하지 않으려는, 고상하지만 감정적으로 안이한 변명으로 활용되는 것이라면?(<뉴스의 시대>, 279p)

 

스스로 믿는 것만 보고, 듣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뉴스는 그 믿음을 공고화시키는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엔 철학자 헤겔의 주장이 나온다.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라는 말이. 근대화된 사회. 뉴스가 종교를 대체했지만 뉴스의 진화가, 즉 맞춤형 뉴스는 곧 다시 종교가 뉴스를 대체하는 날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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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듯,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11p)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뉴스는 공적인 삶의 풍조를 조성하고 우리 각자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힘이다. (13p)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하게 퍼져있다. 이를테면 CNN의 슬로건은 ‘여러분께 사실을 제공합니다’이다. 네덜란드의 NRC 한델스블란트는 ‘의견이 아닌, 사실을 전달하는’자신들의 능력을 줄기차게 홍보한다. 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32p)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뉴스 순환 속도가 요구하는 것만큼 빨리 상황을 변화시켜내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67p)

저널리즘은 특정부류의 권력을 감시하는 일만을 자신의 역할로 규정하면서 너무 무던하거나 비겁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저널리즘은 그저 현실의 경찰서나 세무서가 아니다. 저널리즘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안하려는 목적으로 국가적 삶의 모든 사안을 다루는 망명정부다.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77p)

문제는 현대의 뉴스 매체가 발전시킨 보도 방법론(다른 방법은 거의 모두 배제한 채,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신속하지만 비인간적인데다 위기에만 초점을 맞춘 보도 방침)이 일종의 세계화된 배타적 편협함 속으로 잘못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로인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만 그에 대해 실제로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잘못된 종류의 얕은 지식이 우리 호기심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보다 좁혀버렸다. (108p)

우리가 어떤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면, 그 나라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좀더 깊은 흥미를 유발하는 사소한 이미지나 감각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118p)

나는 전쟁이 어쨌든 좋은 게 아니고, 때로 무고한 사람들이 십자포화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외교적 시도도 가려서는 안된다고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한 피로 물든 앙들 앞에서 통곡하는 아버지가 생기지 않도록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대한 전략적 이점 같은 건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138p)

우리는 빼어난 셀러브리티들을 고작해야 소극적인 궁금증이나 엉큼한 호기심에 걸맞은 신비한 유령처럼 대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은 성실함과 전략적 사고를 통해 특별한 위업을 이룬 보통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사례연구 대상으로 삼아 자세히 뜯어보고 엄밀히 분석해야 한다. (190p)

우리는 셀러브리티는 ‘똑같이 따라하는’ 사람을 두고 안쓰러운 가짜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선망에 기초한 모방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훌륭한 삶의 필수 요소가 된다.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것, 성공한 사람의 성취에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안호는 것은 타당한 근거없이 오만하게 자신을 중요한 앎으로부터 떼어내버리는 짓이다. (191p)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는 수시로 사건에 개입하여 감정의 뱡향을 조정하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풍부한 맥락을 부여했다. 코로스는 주인공이 어떤 죄를 저질렀건 간에 그에 대해 엄숙한 조경을 담아 표현한다. 그런 섬세함 덕에 <오이디푸스 왕>공연을 보며 불운한 중심인물을을 ‘패배자’나 ‘정신병자’로 치부하는 관객은 드물었다. 뉴스의 서술방식은 이보다 덜 싱중하다. (221p)

레스토랑으로 먼걸음을 하고픈 표면적인 이유는 우리가 뭔가 간단히 한입 먹고싶어서다. 하지만 우리 욕망의 실질적이고 어쩌면 심지어 결정적일 수도 있는 부분은 보다 덜 밋밋하고 보다 미묘한 심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레스토랑 자체의 가치를 흡수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레스토랑처럼 되고 싶어 한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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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행복사회 시리즈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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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지 없는 증세시대, 한국도 복지국가가 될 수 있을까?

[서평]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증세 없는 복지라는 표어는 복지 없는 증세라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담뱃세, 주민세, 자동차세는 올랐지만 어린이집 보육료는 예산에서 빠졌고 토요일 오전 진료비는 올라갔다. 몇 번의 큰 선거를 겪으며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로 걸음을 띄었다고 하지만 상황은 나쁘게만 느껴진다. 북유럽을 비롯한 복지국가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났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오마이뉴스>의 대표이자 기자인 오연호의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덴마크의 사례를 한국사회에 적용해 보자는 제안서다.

 

저자는 덴마크가 행복한 이유를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이라는 6가지 키워드로 분류해 설명한다. 직접적으로 어떤 한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는 말하진 않지만 맥락상 그 중에 제일은 자유다. 덴마크인 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결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는 질문에 저자는 덴마크인 들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지 여유를 두고 스스로 선택한다”(본문 193p)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국가와 사회가 그런 환경을 보장해준다

 

단순히 생각하면 자유와 안정은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유는 안정에서 나온다. 책 중에서 덴마크의 공립학교 발뷔스콜레를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덴마크 공립학교는 9년 내내 같은 담임이 학생을 맡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동안 담임선생님이 한명인 것이다. 한 한생은 11년간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지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학생의 말에서 어떻게 자유가 안정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같은 반이면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에 학생들이 더 창의적인 도전을 하게 돼요. 반드시 옳다는 확신이 덜 들어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거든요. 누군가가 발표 중에 실수를 해도 비웃지 않아요. 모두가 그 학생을 전부터 잘 알아왔으니까요” (본문 167p)

  

안정적인 환경이 그들을 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생각이 쌓여 결국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안전한 환경에는 재정도 들어간다. 우선 덴마크는 병원 진료비가 무상이며 대학등록금도 무료이고 대학생이 되면 자취생에겐 약 120만원(6000크로네), 부모님 집에서 사는 대학생에겐 그 절반을 생활비로 지급한다. ‘취준생이나 실업자 같은 경우 최대 2년 동안 최소 약 200만원(1860크로네)에서 최대 약 300만원(16300크로네)까지 받을 수 있다. 사실 이쯤 되면 덴마크인 이 행복한 이유는 앞에 제시한 수많은 키워드들보다 복지라는 것이 더 와 닿는게 사실이다.

 

복지국가인 덴마크를 만든 역사를 저자는 크게 교육부분과 농업부분으로 나눠 설명한다. 교육부분에서는 덴마크의 정치가이자 목회자였던 덴마크 교육의 아버지니콜라이 그룬트비를, 농업부분에서는 군인출신으로 덴마크 국토 개간 운동을 펼친 달가스를 언급한다. 달가스의 황무지 개간과 함께 그룬트비의 주체적인 시민교육으로 일어난 시민들이 행복사회 덴마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들의 공통점을 깨어있는 시민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달가스 운동으로 깨어있는 농민이 덴마크의 산업화 과정에서 깨어 있는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으로 진화했고 이들이 덴마크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중심축이 됐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에 덴마크를 배우자는 시도가 있었다. 새마을운동과 같이 덴마크의 농업운동처럼 비슷한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덴마크의 운동과 한국의 운동에는 차이가 있었다. 저자는 군사독재와 깨어있는 시민은 함께 갈 수 없는 한계를 가졌다며 그 차이를 설명한다. 또한 덴마크의 운동이 아래에서 위로의 운동이었다면 한국의 운동은 위에서 아래로 운동이었기에 행복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현실에 저자는 결국 행복사회를 만드는 일엔 시민이 관건이며 정치권에 기대지 말고 우리 스스로 내일을 만들어가자고 조언한다. 하지만 깨어있는 시민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본문 중에 그룬트비가 농민과 시민들을 교육했던 방향이 힌트가 될 수 있을 듯싶다.

 

그룬트비는 농민들과 시민들에게 무조건 교육을 강조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농민과 시민이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또 더불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문262p)

 

깨어있는 상태가 중요하다고, 깨어있는 시민이 되라고 하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깨어있지 않은 상태를 전제한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더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들을 수도 있다. 내가 깨어있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상대와 이야기하는 과정이 더불어즐거울 수 있을까? 한국사회가 위에서 아래로 운동의 후유증으로 복지국가와 행복사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요즘. 후유증을 극복하자고 말하는 자세도 위에서 아래로의 자세는 아닌지 돌아보는 게 먼저일 지도 모른다.

덴마크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신의 나라도 아니다. 다만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그들의 장범부터 먼저 배워보면 어떨까.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치유하는데 그들의 잠정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285p)

덴마크인들에게 행복인생을 위한 관습법이 있다면 ‘여유를 두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여러 선택지 가운데 살펴보고, 남의 눈치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서 즐겁게 살자’가 제 1조가 될 것이다. (3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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