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바꿈 - 탈핵으로 바꾸고 꿈꾸는 세상
탈바꿈프로젝트 엮음, 히로세 다카시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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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핵발전소라는 주제가 아직도 어려운 당신에게, <탈바꿈>

 

알고는 있었다. 들려오는 말처럼 원자력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싸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까지도. ‘탈핵이라는 가치에는 동의했지만 구체적으로 탈핵에 대한 이런 저런 공방을 들으면 뭐가 옳고 그른 소리인지 헷갈렸다. 20113월의 후쿠시마 사고 이후 너무나 많은 핵관련 뉴스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후쿠시마 이후 대략적으로 핵발전소가 위험하단 것을 감지했지만 핵관련 기사에 난무하는 전문 용어와 숫자들 때문에 겁먹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5. 핵발전소? 원자력발전소랑 다른 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똑같다. 같은 것을 지칭하나 다른 언어로 말할 때, 언어는 정치적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교할 때 누군가는 정상인/장애인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비장애인/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과 비교하여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를 정상인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장애를 가진 것은 비정상이라는 전제를 둔 것이다. 핵발전소를 원자력발전소라고 말할 때, 이는 원자력이 핵을 이용해 만드는 에너지라는 것을 숨기는 수단이 된다. <탈바꿈>의 첫 페이지는 이를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책에서는 원자력발전소를 핵발전소라고 표기합니다. 핵발전소는 원자력이 아니라 핵에너지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자로나 원전처럼 관행으로 굳어진 경우는 부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탈바꿈 4p

 

탈핵의 가치에 찬성하면서도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도 많다. 핵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가 같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그저 관행을 따라 써왔을 수도 있다.

 

#4. 한국에서 터질까?

2013년에는 최근 14년간의 연평균 지진 발생횟수의 두 배에 달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하나, 지진이 많아졌다.

둘, 지진 위험 지대인 영덕-경주 일대에 핵발전소가 몰려있다. 부산과 울산, 경주를 이은 고리, 월성, 동해안 일대에 총 18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예정이며 이 인근 30km반경에 4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몰려있다.

셋, 수명 완료된 원전이 2호나 운영 중이고 전체 원전 23기 중 절반이 2028년에 수명이 만료된다. 그만큼 노후된 원전이다. 지진지대 위에 그 노후된 원전이 서있다는 것이다. 특히 월성원전과 신월성원전은 국내에서 가장 약한 내진설계로 30년 전 토목건축 기술로 건설됐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공포스럽지 않은가? 여기에 핵발전소 사고 대비가 미흡한 한국의 상황까지 더해진다. 방사선 비상계획 구역은 벨기에 10km, 미국 16km, 일본 30km인 반면 한국은 3km이며 구호소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 수는 극히 적다. 핵발전소 가까이에 구호소가 위치하기도 한 곳도 있다. 방사능방재훈련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핵발전소 사고는 발생하기만 하면 사고가 아닌 참사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예견된 인재’. ‘사고를 참사로 만드는 구조’. 세월호 이후 모든 재난에 따라붙는 수사다. 핵발전소 사고야 말로 예견되고 있는 참사다

 

#3. 방사능 걱정하다 보면 도대체 뭘 먹을 수 있나? 그냥 대충 먹자?

일본산 물고기, 식품뿐 아니라 국내산 녹차에서 발견된 세슘, 2013년 국정감사때 공개된 블루베리 등의 베리류에서 검출된 세슘, 어묵, 맛살, 소시지, 가다랑어 포 등 가공식품까지......도처에 널부러진 위험은 오히려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방사능은 외부 피폭뿐 아니라 내부피폭 또한 위험하다. 방사능으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에서는 피폭의 80~95%가 음식으로 인한 내부피폭이었고 먹이사슬에 의한 방사능 농축이 심각했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은 얼마나 농축된 방사능을 먹는 걸까.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뭘 먹느냐’ ‘먹고 그냥 일찍 죽어같은 농담까지 익숙해 졌다. 하지만 찾아보면 독자적인 방사능 기준치를 마련해 정밀검사 결과를 공개하고 검사시설을 마련하고 식품을 제공하는 생협(생활협동조합)이 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생협 한살림이 그렇다. 최근 생협들은 인터넷 쇼핑몰도 개장했기에 인터넷으로 둘러보고 손쉽게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 밖에서 나가 사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집밥에서만큼은 내부피폭 걱정을 덜을 수 있다.

 

#2. 원전사고, 먹거리만 조심하면 방사선 노출 걱정은 안해도 되나?

자주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건강검진엔 의레 엑스레이, CT촬영이 포함된다. 병원을 옮기기라도 하면 며칠 전 했던 검사를 또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슴 엑스레이 정면 1회에는 0.02밀리시버트, 암 정밀검진 시 복부/골반 CT촬영은 1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된다. 일반인의 연간 선량한도는 1밀리시버트다.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은 안정량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노출된 양만큼 비례하여 암 발병률이 높아진다. 암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암 발병률을 높이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엑스레이나 CT촬영이 아닌 초음파 혹은 MRI검사로 대체할 수 있다면 대체하고, 불필요한 검사는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1. 해결책은 개인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결국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개개인'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는 해결책은 어딘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고 정말 뭐가 달라질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핵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위하여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관건은 아니다. 에너지 절약의 주체는 개인보다 정부와 기업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 효율 개선과 절약의 핵심 주체는 개인과 가정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되어야 한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소소한 수준이며 개인은 갖춰진 에너지 시스템에서 게 벗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 전력 소비의 절반 가량은 제조업이 차지한다. 주택용은 20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탈바꿈, 183p

 

 

많은 에너지 관련 글에서 해결책은 ‘1인당 전력 사용량을 줄이라는 충고로 끝나곤 했다. 하지만 한국은 민간 전력 사용량이 적지만 1인당 전력 사용량은 높게 나타난다. 그렇기에 종종 많은 글에서 개인이 스스로 전력 사용량을 줄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주택용과 산업용으로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왔다. 나라 전체로 보면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칼럼에서 보듯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주택용 소비와 산업용 소비를 구분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주택용 전력 소비량은 2010년 기준으로 1,240kwh. OECD 평균 2,448kwh의 절반 수준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1인당 주택용 전력 소비량은 2,384kwh를 사용한다. 민간에서의 전기 사용은 일본이 한국에 비해 2배나 높다.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일본의 1.5라는 둥 에너지 소비가 높게 인식해 온 것은 한국의 산업용 전력 소비량이 OECD나라 중 세계 4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인당 에너지 소비가 높으니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주장은 주체의 문제를 혼란시킨다. 다시 한 번, 에너지를 절약할 주체는 민간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다.

 

Tip : 이를 외울 방법은, 복습, 또 복습하는 것이다. 탈핵의 가치에는 찬성해왔으나 반대파(?)의 끊임없는 질문이 두려워 입을 막고 있던 당신이라면 <탈바꿈>을 국어사전마냥 자주자주 들춰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미국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사고에 조사단으로 참여한 사회학자 찰스 페로(Charles Perrow)는 핵발전소 사고를 비롯한 국가적 재난들을 `정상 사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사고가 비정상적이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핵발전소와 같은 첨단 복합시스템에는 구조, 조직, 건설에 사고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65p)

방사선량이 어느 수준까지 누적된 후에야 암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방사선에 노출되면 아무리 적은 성량이라도 그 수준에 비례하는 확률로 암이 발생할 수 있다. 노출되는 방사선량이 0일때만 암 발생 확률만 0이라는 결론이다.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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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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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하우스>의 평행이론

올리버 색스의 1985년 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는 내내 미국 의학 드라마 <하우스>의 장면들과 겹쳤다. 데이비드 쇼어의 의학드라마 <하우스>(House M.D.)는 천재이자 우울증환자인 괴팍한 진단의학과 의사의 이야기다. <하우스>의 시작이 2004년이니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는 2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러나 책의 세련됨 덕분인지 머리 속에서 두 작품을 ‘평행이론’을 적용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소재가 의학이라는 기본적인 공통점을 넘어 두 콘텐츠가 겹쳐진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질병을 환자의 ‘이야기’로부터 풀려는 접근이 그렇다. ‘질병을 처음으로 병력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본 사람은 히포크라테스’라고 책이 말했던 바와 같이 히포크라테스의 관점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환자 자체를 어떠한 병의 증상처럼 대한다.

 

보통 의학에 관련된 이야기는 '병'이 그들의 삶을 바꾼 원인이거나 결과가 된다. 병을 얻어 사람이 변하거나, 그들의 삶이 어떠했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식이다. 그러나 두 작품에 나오는 환자들은 병이 그 환자의 정체성이며 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올리버 색스가 신경학 전문의인 것과 <하우스>의 그레고리 박사가 특이한 질병만을 고치는 진단의학 전문의인 것도 두 작품이 갖는 차별성에 기여하는 듯하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올리버 색스의 문장이 옛것임에도 세련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비유와 상징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문장 곳곳에서 철학을 인용한다. 니체, 쇼펜하우어, 흄, 프로이트와 같은 철학자뿐 아니라 각종 문헌들을 넘나들며 환자의 케이스에 적용한다. 드라마 <하우스> 역시 비유와 상징을 이용한 대화와 철학적 명언이 난무하기로 유명하다. 심지어는 <하우스 박사와 철학하기(원제: House and Philosophy: Everybody lies)>라는 철학안내서까지 출판됐다.

 

책을 사면 하우스가 자주 쓰는 빨간 머그도 줬나보다. 출처는 Yes24.

 

내용과 형식의 공통점 때문인지 각 에피소드의 모양새도 닮았다. 매독에 걸려 조증이 걸린 할머니의 에피소드는 <하우스>의 시즌1 에피소드8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같다. 그 둘의 차이점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할머니 스스로 이를 ‘큐피드병’으로 진단해 의사를 놀라게했지만 <하우스>에서는 닥터 그레고리가 선수를 친다. 환자인 할머니가 “색깔도 더 구별 잘되고 음악도 너무 더 잘 들려요. 난 82세이고 다른 할머니들이랑 카드놀이나 해야하는데 엉덩이가 깜찍한 남자를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자마자 “매독입니다.”하고 명쾌한 진단을 내려버린다.

 

그 외에도 환상에 시달리는 환자(<아내>-‘회상’, ‘억누를 길 없는 향수’)에 관한 에피소드는 <하우스>의 시즌5 에피소드15 ‘unfaithful’에서 예수의 환상에 시달리는 신부의 이야기와 겹치며, 얼굴인식에 장애를 가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p선생은 <하우스> 시즌 5의 세 번째 에피소드 ‘Advers events’의 왜곡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증세와 비슷하다. 하나하나 매치하자면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유사성을 띤다. 물론 환자의 병명은 달라도 비슷한 증상과 인물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드라마 <하우스>의 시즌5 에피소드 3에 나오는 왜곡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

 

이렇게나 유사한 두 작품이지만 인상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저자인 의사와 그레고리 의사와의 차이다. <하우스>의 그레고리 박사는 훌륭한 의사인 동시에 고칠 수 없는 환자다. 그레고리 박사를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중 하나의 에피소드로 끼워넣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는 제 2부 ‘과잉’의 에피소드 ‘익살꾼 틱 레이’뒤 편에 들어간다면 딱 알맞을 환자 케이스다. 투렛 증후군으로 인해 틱 장애를 앓고 있는 레이는 증상이 일어나는 시간동안에만 천재적인 드러머가 되고 뛰어난 운동선수가 된다. 그가 처방받는 약물에 의해 ‘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그는 그저그런 인간이 되버린다. 그렇기에 그는 이 병이 ‘자신에게 그것이 재능인지 저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우스>의 그레고리 박사는 교통사고 이후 수술로 허벅지 근육을 잃은 뒤 끊임없는 진통제(마약 성분의 바이코딘)에 중독되어 있는 우울증 환자다. 하지만 바이코딘 중독으로 인한 만성적인 예민함과 우울증이 주는 현실감각은 그가 ‘천재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가 바이코딘 대신 새로운 약물의 도움을 받으며 진통이 사라지려고 하는 시기, 의학 능률이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 ‘비참한’ 상태에 있는 편이 의사로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상태임을 알게 된다. 그레고리는 스스로 환자로 남는다. 틱 환자 레이는 말한다.

 

틱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 다음엔 뭐가 남나요? 전 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188p)

 

반면에 <아내>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이상적인 의사다. 그는 모든 환자를 소개할 때마다 사랑스러운 수사를 늘어놓는다. ‘지적인’, ‘재능있는’, ‘멋진’과 같은 수사들이 심각한 질병을 갖은 환자들에게 붙는다. 그는 환자 이전에 사람을 사랑하는 의사임이 분명하다. 병은 너무나 멋진 사람에게도 예외없이 찾아온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올리버 색스가 바라보는 병은 불행으로만 여겨지는 병이 아닌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서의 병이다. 책의 마지막 역자의 후기가 와닿는다.

 

만일 그가 병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병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의사이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걸작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4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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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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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현의 도끼와 카프카의 도끼]

 

꼭 인문학 열풍 때문이 아니라도 종종 이런 류의 책에 손이 간다. 이런 류의 책이란 지식 소매상 같은 책이다. 쉽게 말하면 책에 관한 책. 물론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퀄리티는 크게 달라지므로, 유혹에 빠지는 것이 꼭 나쁜 결과를 부르지 않을 때도 있다. (가령 이현우의 <아주 사적인 독서>나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와 같은 책이 그랬다.)

 

책에 관한 책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게으름이다. 하나하나 가시를 발라가며 책을 읽지 않고도 통통한 속살만 쏙 빼먹을 수 있을 거란 유혹은 강렬하다. 우등생의 노트를 빌리기 하면 그날은 일단 뿌듯한 것처럼 이런 책을 읽으면 일단 뿌듯하다. 하지만 양념통닭도 제 손에 들고 온갖 양념을 묻히며 먹어야 제 맛이듯, 누군가가 살을 발라 입에 쏙쏙 넣어주는 것은 편할 진 몰라도 제대로 된 맛을 느끼긴 어렵다.

 

게으름을 제외하고 이런 책을 골랐다면 인문학 열풍 때문일까? 이제는 인문학 열풍이 지나 ‘인문학 열풍 까기’의 유행까지도 지난 것 같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선 꼭 해야 하는 이야기다.

 

두 글이 있다.

 

1.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1904년, 1월 카프카.

-<책은 도끼다>, 박웅현, 129p

 

2.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해.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 그렇지만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오스카 폴라크에게, 1904년 1월 27일 수요일.

-<카프카의 편지 100선> 18p

 

두 글 모두 도끼가 등장하나 두 도끼는 다른 도끼다. 첫 번째 글에서 박웅현이 말하는 도끼는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꽁꽁 언 얼음을 단 한 번에 쩍하고 깨버리는 상쾌함, 거기에 따라오는 행복까지 연상된다. 카프카가 쓴 편지에서 ‘도끼’는 위협이다. 재앙 같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자살 같은 도끼. 널따란 바다에 표류해 작은 얼음조각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데, 그걸 깨버리는 도끼다. 행복감은커녕 불쾌와 불편함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인문학 열풍’이라 불리는 것의 인문학은 카프카의 도끼가 갖는 속성보다 시장의 속성과 가깝다. 인문학을 가지고 광고를 만들었다는 박웅현에게서 그 속성이 잘 드러난다. (스티브 잡스를 이길 사람은 없겠지만.) 시장에서 승리하고 1등을 할 수 있게 알려주는 학문을 우리는 경영학이라 불렀다. 이제는 이를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영학의 ‘자기계발’이 촌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영학의 수단으로 전락한 인문학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대학에서 자신이 다니던 과가 없어질 위기에 놓인 학생들과 그 선생들 외에 몇이나 있을까.

 

2003년 이후 대학의 전체 학과 수는 16% 늘었으나 인문학과는 43개 이상 통폐합됐다. 인문학 주전공에 또 다른 인문학을 복수전공한 나로서는 진짜 인문학은 대학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의 탈을 쓴 인문학만이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영화의 스토리처럼 진짜 인문학은 가짜에 의해 어딘가에 갇혀 있었지만 가짜는 거리로 나가 활개를 쳤다. 하지만 모두가 말랑말랑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그를 사랑한다니, 걘 가짜라고 외치기도 뻘쭘한 상황이다.

 

한창 인문학 열풍이 불 때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고, 가이드 역할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생각난다. 물론 가이드는 필요하다. 하지만 가이드의 말이 전부라면 곤란하다. 강의를 들은 이들 중 몇 명이나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까는 의문이다. 책을 읽고 스스로의 거친 생각을 말하기보다 저명인사의 평가를 듣고 나서야 입을 뗄 줄 알며, 강의실에 앉아 ‘Entertain us’의 자세로 웃고 떠들다 인문학을 읽었다는 이들에게 드는 반감은 어쩔 수가 없다.

 

사실 누군들 도끼에 찍히고 싶을까. 스스로가 찍히기보다, 박웅현의 도끼처럼 수단으로서 도끼를 갈망할 것이다. 도끼에 찍힐 대상이 ‘나 자신’이냐, 내가 깨뜨리고 싶은 ‘대상’이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구별된다고 말하고 싶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것, 그것은 쉽게 만나기도 어렵고 말랑말랑하지도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이 전쟁이라고 말했다. 전쟁에서 지든 이기든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고, 모두가 끔찍해지기 때문이다.

 

안다. 카프카의 도끼 같은, 칸트의 전쟁 같은 인문학은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전쟁을 치르자는 과격분자들이 언제나 소외당하듯 말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시대. 이제 가짜를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싸가지 없는 놈’ 취급당하기 일쑤다. 진짜와 함께 곳간에 처박혀 울 것이냐, 가짜와 함께 거리를 쏘다닐 것이냐. 우리는 모든 보기가 암담한 선택지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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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몇 권을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34p)

-앤디 워홀의 캠벨 통조림: 시릴 코널 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요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 반열(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것)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알랭 드 보통) 115p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삭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있는 사람이 된다. (알랭 드 보통) (118p)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버트런트 러셀) (120p)

-프루스트는 신문기사를 싫어했다. 모든 문맥을 빼버리고 말하기 때문.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그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리진>이라는 소설은 신경숙 김탁환 두 작가가 썼다. 신문 어딘가에 짧은 기사 한 줄이 나왔다. 조선주재 초대 프랑스영사를 지낸 사람이 궁중무희와 함께 귀국해 살다가, 그 궁중무희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였는데 이 짧은 한 줄이 소설이 된 것. (장주네의 하녀들) / 신문과 소설의 차이(131p)

-마르셀 프루스트: "언어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135p)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느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192p)

-연민으로 사랑을 시작해 한없이 작아진 남자. 밀란 쿤데라는 이 사랑이야말로 진자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연민, 즉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장 최상의 감정이라는 겁니다. (249p)

-바람기는 다른 말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에요. 다른 곳에 더 나은 인생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동경이죠.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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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에서 만난다면 절대 친구하고 싶지 않은 주인공의 조금은 까칠한 먹방. 마음이 깨끗하여 화가 없는 이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음. 하지만 화가많고 언제나 불만으로 궁시렁거린다면 속씨원함을 느낄 수 있다. 심야식당처럼 훈훈하지도, 오무라이스잼잼처럼 음식퀄리티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존재'에대한 사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춫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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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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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서적계의 '사전'과 같은 책. 처음부터 죽 읽어도 좋고, 책꽂이에 모셔두었다가 한 챕터 한 챕터 들춰봐도 좋다. 읽고 나서 문장보는 눈이 승격되고 문장을 쓸 때도 조심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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