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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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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한 선배와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던 길이었다. 선배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이름을 나에게 가르쳐줬다. 무식한 대학생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모를 순 없었다. 아는 척을 했더니 선배는 다른 열사의 이름을 하나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 당시 나는 그 이름들을 외우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금도 노동현장에서는 많은 이가 죽고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기사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이름들을 다 기억하기엔 무리였다. 그렇게 머리 속에 파편화된 정보만 흩날리고 있을 무렵. 또 다른 이가 나타나 노동현장의 이름들을 불렀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노동현장을 지켜온 박점규 씨는 <노동여지도>에서 전국의 노동활동가의 이름을 부른다. 삼성의 도시 수원부터 울산, 인천 등을 지나 서울 구로와 여의도, 파주까지 35곳을 돌아다니며 노동현장을 찾았다. 각 지역의 주요 노동운동사와 함께 현재까지 주요 기업의 비정규직 현황과 투쟁 상황을 설명한다. 각 지역마다 특색과 기업의 성질은 다르지만 노조와 노조조합원들이 탄압받는 상황을 똑같다.

 

사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주요 도시와 이름을 되도록 머리에 새기며 읽으려 했지만 수많은 사례 모두를 기억할 순 없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었다.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이번만큼은 주요 노동현장의 활동을 머리에 되새기려 노력했다. 엑셀파일로 주요도시와 노동조합이 투쟁을 하게 된 이유, 성과를 정리하게 된 이유다.

 

 

 

 ▲<노동여지도>를 읽고 2000년대 이후 노동현장을 정리한 엑셀파일 캡쳐

실제 엑셀파일은 블로그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알라딘 서재는 파일첨부가 불가능)

엑셀 다운:  http://blog.naver.com/pukeng/220408339107

 

약 80여 사업장의 노동현장 상황을 정리하면서, 가장 충격적인 상황은 전주 신성여객의 故  진기승 씨의 죽음이었다. 그는 2009년 신성여객에 입사해 민주노총 소속 노조에 가입했다. 2012년 파업에 참가한 그는 해고됐고 부당해고가 확실한 상황이었음에도 사법이 판결을 내리는 기간동안 그는 생계가 막막해졌다. 회사의 민주노총을 탈퇴하면 복직시켜주겠다는 말에 진기승 씨는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약속은 말뿐이었다. 그는 복직되지 못했다. 그는 2014년 4월 30일 목숨을 끊었다. 법원은 5월 1일 부당해고 판결을 내놨다. 활자로 읽기만 해도 충격적이고 가슴이 아련한 사연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부당해고임을 알고도 사법처리가 더딘 것을 알고 이러한 전횡을 부린다. 사법처리 전까지 노동자가 버틸 방법은 요원하다.

 

또한 순천 지도에서 소개된 포스코의 사례에서 포스코가 올해 초 국가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직원들의 스마트폰에 깔게 한 '포스코 소프트맨' 어플도 충격 그 자체였다. 책에 따르면 정규직은 물론이고 비정규직 모두 이 어플을 깔아야 했는데, 이 어플을 깔면 문제메시지나 카카오톡의 내용까지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노동자를 기업의 부속품으로 여겨도, 애인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카카오톡을 회사가 모두 본다니 소름이 끼쳤다.

 

책 속 부록처럼 끼워져 있는 <각 지역 주요 기업의 비정규직 현황>은 한눈에 각 지역의 비정규직 비율을 알 수 있는 시각자료다. 이 자료에 따르면 기업 내 비정규직이 가장 높은 사업장은 인천국제공항공사로 85.9%가 비정규직이다. 이에 이어 맥도날드(80.9%), 롯데리아(77.3%)였고 희성전자(78%)와 현대삼호중공업(71.5%)가 비정규직 비율 70%가 넘는 기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높은 비정규직비율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운송수단 서비스 기업이나 의료 기업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인천공항(85.9%), 제주항공(52.2%)이 대표적이다. 새정치연합 김경협 의원이 2014년 5월 8일에 선원 등 국민 생명과 안전에 밀접한 업무에 대해선 계약직 노동자 채용을 금지하는 기간제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가슴 아픈 사연이 더 많지만 희망의 사연도 적잖다. 군포의 현대케피코는 연구원부터 운전기사 모두가 정규직인 사업장이다. 노조의 25년 투쟁의 결과다.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도 식당과 경비직을 제외한 모두가 정규직이다. 2000년 5명의 노조 조합원들이 만든 성과다. 사장이 노조를 인정해 좋은 사업장을 함께 꾸려가는 모범사례도 있다. 파주의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의 김현승원장은 노조와 함께 임금을 동결하며 적자였던 병원을 흑자로 만들고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는 과정에 서있다.

 

<노동여지도>는 파편화된 노동현장의 정보를 집대성하고 다양한 통계와 사법부의 판결까지 훑을 수 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책 속의 좋은 사례에서 마냥 좋게만 볼 수는 없는 사례가 있다. 책의 마지막 챕터<파주-책의 도시가 품은 명암>에 소개된 보리출판사의 상황이다.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에 대해 긍정적인 노동자의 입장만을 전했다.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현재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가 경향신문에 소개되는 과정에서(관련기사: ['하루 6시간 노동제' 보리출판사의 실험]윤구병 대표 "나누는 데 관심 두지 않아 우리사회 노동시간 길어진 것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702&artid=201506192115185) 페이스북 댓글에 보리출판사에 대한 비판이 올라오며 논란이 됐다.

 

 

 

이 과정에서 2013년 진보넷에 올라온 "보리출판사 6시간제 - 노동자가 주인이 되지 못한 정책의 한계"(관련 링크: http://blog.jinbo.net/stego/608)라는 글이 회자됐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윤구병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보리출판사 6시간제도가 1년 동안 모든 직원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준비했다고 이야기한다. 거짓말이다."라고 썼다. 또한 그는 그 외의 많은 과정에서 윤구병 사장이 노동자와의 합의 보다 통보가 많았고 6시간 노동제를 협박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논란이 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설명한 책의 말미는 이 책의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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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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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é chanté. chanter라는 프랑스어는 노래한다는 동사다. 영화를 노래한다는 뜻이겠다. 철학자 강신주와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진행한 <씨네토크>를 책으로 엮어낼 때는 <씨네 샹떼>로 바뀐 것이다. 그저 영화에 대해 말한다기보다는, 철학자와 영화평론가의 두 시선이 만나 어떠한 시너지를 만들어 냈기에 함께 노래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이 책은 영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철학자와 평론가가 부른 이중주로 볼 수 있다.

 

노래는 영화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보통 이렇게 두 유명인(?)이 영화를 고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영화선정의 기준은 자신의 인생영화같이 취향이 드러나는 영화를 고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을 죽 읽어보니 영화선정은 이상용 영화평론가가 주도적으로 한 것같다. 종종 강신주 철학자가 혼자서는 보지 못했을 영화를 소개시켜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영화선정의 기준은 영화사를 훓을 수 있는 의의를 가진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죽 읽으면, 영화사에 대한 교양수업을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라는 장르가 태동됐던 19세기 후반의 뤼미에르 형제의 영상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까지 다루게된다.

    

 

 

▲<씨네샹떼>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부터 시작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시기까지 영화사 전반을 꿰뚫는다. (알라딘 책소개 페이지 갈무리)

 

이 영화사라는 이중주를 부르며 철학자와 영화평론가는 의견을 같이하며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기도 하고, 서로 해석을 달리하며 갈등의 멜로디를 부르기도 한다. 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 버스터 키튼과 같은 초창기 영화작업에 대한 부분을 다룬 1부는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이고, 거의 설명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중주가 빛나는 구간은 아니다. 하지만 책 전반에 나오는 개념인 조르조 아감벤의 몸짓’(gesture), ‘어트랙션 시네마등의 설명은 앞으로의 노래를 듣기 위한 필수 준비운동이다.

 

아무래도 흥미로운 부분은 철학자와 영화평론가가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리는 영화를 다룰 때다.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나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 <동경이야기>의 엔딩신을 두고 강신주 철학자는 이 영화의 보수성을 이야기한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식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남자 주인공이 며느리에게 시계를 주는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잃은 며느리에게 말로는 어서 다른 곳에 시집을 가라고 하며 시계를 준다. 이 장면을 두고 철학자와 영화비평가는 이렇게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를 다룬 <씨네 샹떼>의 페이지. (알라딘 책소개 페이지 갈무리)

 

강신주 철학자: 이것은 노리코에게 1945년 이전의 시제, 자신과 죽은 아내가 머물러 있는 시제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무의식적 명령이다. (...)노리코! 제발 시아버지가 준 시계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요! -292p

 

이상용 영화비평가: 그렇게만 볼 수 없는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진정한 행복을 드러내는 장면은 인물들이 나란히 앉아 있거나 함께 걸어가는 동행 장면입니다. (...)따라서 그 시계도 평행적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 생각하면 시아버지와 노리코, 그리고 막내딸이 같은 시간, 같은 시대를 공유할 수 있겠다, 함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암시인 겁니다. -282p

 

또 두 이야기꾼이 다른 해석을 보이는 영화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다. 주인공 알리와 에미가 다시 화해하는 엔딩을 두고 이상용 평론가는 에미의 사랑이 진실된 것이라고, 강신주 철학자는 그렇지 않다며 대립된 의견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석에 대한 불협화음(?)이 나는 경우 외에도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경우도 있다.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말할 때나, 우디앨런의 <애니홀>에 대한 평가다. 이상용 영화평론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뉴엘의 영화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자 강신주 철학자가 한 마디 한다.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이상용 선생님이 부르주아가 되신 거예요.” 책을 읽으며 마치 강신주 철학자 라디오를 듣는 것마냥 음성지원이 돼서 웃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뉘앙스로 이야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신주 철학자 특유의 쏘아붙이는 말투는 여전한 것 같다.

 

 

 

 ▲우디앨런 <애니홀>의 한 장면.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 갈무리)

 

우디앨런에 대해서도 강신주 철학자는 거부감을 보인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영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앨런의 작품은 보고 나서도 인상적이라 할 만한 영상을 꼭 집어내기가 어려워요. 몇 달 지나면 남는 영상은 없고, 그 끊임없이 조잘대는 수다만 남을 것 같거든요. 이 영화가 수입되던 1977년 우리나라에 우디 앨런의 팬인 생겼다는 게 한편으로는 고깝기도 해요. 제 눈에 우디 앨런은 강남좌파같이 보이거든요. (강신주) -615p

 

하지만 이상용 영화평론가의 생각은 달라보인다. 직접적으로 반론하지는 않지만 우디 앨런의 영화 형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빤하게 보이는 남녀의 사연은 사이사이에 다른 것들을 집어넣음으로써 확력을 얻는다. 가령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기도 하고, 두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자막이나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상황을 표현하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현실의 리얼리즘을 끌어들인 우디 앨런의 실험이 이루어 낸 결과다. (이상용) -635p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이 책을 보면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재미다. 영화사적 교양 더불어 영화와 연결된 인문학적 개념을 배우는 것, 또 한가지 영화두고 다양한 해석을 보며 자신의 취향이 어떤 해석과 가까운지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씨네샹떼라는 노래는 불협임에도 화음이 맞는 이중주인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우고 의식하지는 않지만, 타인이 규칙을 위반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라는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다. 우리는 걷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보행법이라는 것을 배울 일이 있다면, 우리 다리에 이상이 생겼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이다. 190

위기가 없다면 사랑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 가정이 원활히 돌아갈 때가 아니라 남편이 실직해서 가정이 위기에 빠질 때, 아내는 자신이 사랑을 증명해야만 한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많이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또 우리는 건강과 미모를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또 우리는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려고 분주한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 병과 노화, 아이의 성적 하락 등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야 할 상황을 대면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당연히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허위에 가득 차 있었다는 걸 자각할 위험도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415

실수와 고장: 모던타임즈의 주인공은 실수하는 인간이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실수를 연발하지만 기계는 실수 하지 않는다. 대신 기계는 고장이 난다. 인간은 실수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그래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지 않겠어?˝처럼, 시행착오를 거쳐 만회한다. 끊임없는 실수라는 건 인간의 존재 증명이다. 실수를 함으로써 인생은 다채로워지고 인가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한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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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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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을 살해한 부모의 이야기다. 주인공 아버지는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세네명의 범인을 찾아 한 명 한 명씩 살해한다. 마지막 범인은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예상하고 도망친다. 아버지와 범인은 눈이 덮힌 산에서 추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다. 성폭행 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범인을 살해한 부모. 만약 이 아버지가 스스로 죽지 않아 살인죄로 법정에 섰다면, 그저 ‘사람 셋을 죽인 살인마’로 설명이 가능할까? 이러한 사례는 ‘감정’과 ‘이성’이라는 분류가 얼마나 허상인지, 또 법이라는 체제가 감정이 배제된 이성으로서만 세워져야한다는 견해에 대해 혼란을 준다.

 

<혐오와 수치심>을 쓴 마사 너스바움(Martha Nurssbaum)이 책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서문 <감정도 분명 사고를 담고 있다>에서 너스바움은 감정과 이성이라는 이분법이 틀렸다고 말한다. 감정은 이성이라는, 사고하는 체제 위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법도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떠한 침해가 포악한지, 어떤 상실이 인간에게 큰 슬픔을 주는지, 인간이 지닌 어떤 취약성이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고유된 인식이 없다면, 왜 우리가 법에서 특정한 형태의 위해와 손상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즉 여러 가지 면에서 위해와 손상을 입기 쉬운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법을 필요로 한다. (22p)

 

감정이라는 것은 사고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아버지가 살인마임에도 우리가 동정심을 품는 이유는, 아버지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사고 위에서 생겨난 감정인 것처럼 말이다. 감정이라는 것을 이성과 반대 항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감정이 사고 위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결국 감정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에 종종 소개되는 ‘싸이코패스’ 환자가 그렇듯 말이다. 혹은 자신이 저런 감정을 가진 대중들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그렇다. 루소는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이 하층 계급에 대해 동정심을 결여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은 자신을 삶의 영고성쇠에 놓인 “인간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기”때문이라고 말했다.(101p)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사고를 한다면 감정은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다. 그래서 너스바움은 감정을 법에 끌어들이기를 망설이면 안된다고 말한다.

 

법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모든 것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법이론가들이 동정심, 분개 또는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에 대한 호소를 검토할 때 매우 자주 듣게 되는 ‘감정 대 이성’이라는 강력하면서도 잘못된 대조를 사용해서 이러한 주장을 기각해서는 안된다. 만약 모든 감정이 복잡한 평가적 인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러한 요소를 한 묶음으로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143p)

 

법에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어떤 감정을 타당하다고 보느냐다. 너스바움은 질문해야 하는 것은 분노와 두려움같은 감정이 이성적인 사람에게 생기냐, 안생기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분노와 두려움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가가 문제(135p)라고 말한다. 즉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사람이 휘둘리지 않아야 할 감정이 어떤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너사바움에게 그 감정은 혐오와 수치심이다.

 

우선 너사바움은 혐오가 본능적이고 진화적 근거가 있다는 입장을 심리학자 로진과 앵기알, 밀러를 통해 소개한다. 이들의 혐오는 위험과 다르다. 책에 나온 예를 따르자면, 살균된 바퀴벌레가루가 여전히 혐오스럽다는 사실은 혐오대상에서 위험이 제거되더라도 여전히 혐오가 남아있다는 말이다. 이들에 따르면 혐오는 이질적인 것이며 혐오로 인해 자신이 더러워질 수 있다는 사고를 수반한다. 이절적인 것이란 말은 그것이 인간답지 않은 것, 혹은 자신이 가진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 분비물 중에서 눈물만이 혐오를 유발하지 않는 이유는, 추정컨대 눈물이 유일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 우리가 동물과 같은 존재하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반면 배설물, 콧물, 정액, 다른 동물적 신체 분비물은 우리를 오염시킨다고 여겨진다.(...)혐오에 담긴 핵심적 사고는 동물성을 간직한 동물의 분비물을 섭취하면, 우리 자신이 동물의 지위로 격하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170p)

 

너스바움은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분개와 혐오를 구분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성적인 사람의 반응으로 분개에 휩쓸리는 것은 타당할 수 있지만 혐오에 휩쓸리는 것은 타당치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개는 인과적 사고와 위해의 심각성에 대한 평가이지만 혐오는 위험성이 없더라도 그 대상이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을까하는 ‘신비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혐오의 배경이 되는 인간이 갖는 순수함에 대한 환상은 건설적이지 않다(199p)고 말한다. 그러니 어떤 집단이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오물처럼 취급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200p) 너사바움은 동성애혐오와 여성혐오가 이런 혐오의 특성을 잘보여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특정집단을 겨냥해 투영되는 혐오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은 여성의 몸이다. 여성은 출산을 하기 때문에 동물적 삶의 연속성, 몸의 유한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남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정액이 남성에게 혐오를 유발한다면, 남성들은 여성의 몸 안에 있는 혐오물질로 인해 여성들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08p)

 

동성애혐오도 이와 마찬가지다.

 

혐오를 일으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동성애자에 대한 남성의 사고이고, 그 속에는 항문으로 침투될 수 있다는 상상이 스며 있다. 남성의 몸 안에서 정액과 배설물이 함께 혼합된다는 생각은 상상 가능한 가장 혐오스러운 사고 중 하나다. 남성에게 침투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끈적임, 분비, 죽음을 막아주는 신성한 경계가 된다.(211p)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해 유독 심하게 나타나는 혐오 외에도 너사바움은 여러 가지 혐오와 얽힌 판례와 사례를 소개한다. 수많은 혐오들은 그 대상을 ‘이질적인 것’으로 명명한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러한 특성들이 자신 안에도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은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면 우리도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경고와 함께 자기 자신을 유심히 감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308p) 너사바움은 “우리는 우리가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308p)고 말한다. 그렇기에 혐오는 법에 끌어들일 수 있는 타당한 감정이 될 수 없다.

 

혐오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추정상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특히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때, 이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 된다. 우리는 혐오를 이용해야 하지만, 혐오가 담겨 있는 인간 사회의 비전에 기초해서 우리의 법률세계를 건설해 나가서는 안된다. (314p)

    

다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혐오보다 발빠르게 법적 영역에 침투했다. 아주 쉬운 예로, 성폭행범의 신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은 시민의 안전을 위한 당위도 있지만 범인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 행위다. 혐오가 법적인 영역에 들어오는 것보다 어쩌면 타당한 이유다. 범인은 수치심을 느낄만큼의 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은 보편적이다. 대표적으로 공동체주의 정치사상가 아미타이 에치오니도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공유된 도덕적 가치를 표현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 추천(321p)하고 있다. 이렇듯 수치심이 법적 영역에 들어오기에 타당한 감정이냐는 문제는 혐오의 문제보다 복잡하다.

 

너사바움은 수치심을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338p)이라고 정의한다. 수치심은 보통 생애 초기인 유아기의 경험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뱃속에 있었을 때 완벽한 상태만을 느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와 누군가가 돌봐줘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를 느끼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오래된 정신분석에 따른다. 그렇기에 혐오보다 문화를 뛰어넘는 유사성을 보인다. 수치심이 혐오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가지는 이유는 에치오니가 지적했듯 수치심이 혐오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건설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너사바움은 한국에서도 <긍정의 배신>으로 유명한 작가인 바버라 에렌라이히의 <빈곤의 경제>가 주는 감정을 예로 든다.

 

이 책에서 에렌라이히는 자격증 없이 직업을 구하는 여성 행세를 하면서 경험한 바를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근로 빈곤층에 충분한 주거와 고용 선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미국의 주요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견론짓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미국인들이 이문제 대해 충분히 최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책감은 필요한 만큼 더는 발전하지 못한다. 적절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386p)

 

지금껏 자신의 삶에 대해 지적을 받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결국 건설적인 자아를 만들고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스바움이 말하는 이 매력적인 수치심과 에치오니가 범죄자를 낙인찍을 때 사용했던 수치심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치심이 어디에서부터 오느냐’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된 동기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391p)는 것이다. 에치오니와 같이 사회가 주는, 곧 법이 시민에게 수치심을 주는 방식은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혐오와 수치심>은 법의 영역에서 혐오와 수치심은 이성적인 인간이 느낄 타당한 감정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혐오를 부르고 법으로 수치심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사바움은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누구나 아마 어떤 면에서는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고자 할 때,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보인다. (624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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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다니엘 튜더

 

비정상회담의 유행도 지나간 듯 하다. 외국인들이 유창한 한국말로 한국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은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눈에 한국이 어떻게 비춰질지 말이다. 물론 그들이 신경쓰는 눈은 선진국의 백인 남성의 이야기일테지만.

 

비정상회담도 그렇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쓰는 말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나 역시 몇달 머물렀을 뿐인 외국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지만, 그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편견을 깬 것은 박노자 선생님의 글이었다. 그의 글 앞에 외국인이 본 한국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민망할 정도의 시선, 지식, 관점.

 

스스로를 '서양 좌파'라고 말하며 한국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외국인이 한 명 더 나타났다. 이코노미스트 지의 한국 특파원이었다는 남자. 큰 기대없이 책 소개를 펼쳤는데 꽤 궁금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신자유주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 한국을 방문한 영미권 시장옹호주의자들을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한국의 시장 환경이 실망스럽다고 말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진정한 신자유주의 대신 국가 자본주의, 나아가 정실 자본주의뿐인 한국의 맨얼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책 70p)

박노자 이후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잘 읽는 외국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2. <사랑은 사치일까> - 벨 훅스

 

페미니스트의 사랑은 어렵다. 상대가 남성이라면,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남성 페미니스트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1970년대 급진 페미니즘의 사상을 생에 실현한 여성들은 동성애자가 많았다고 한다. 벨 훅스는 묻는다.

남성 애인들에게 계속해서 실망하면서도 왜 여성과 사귀어보기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지, 같이 자는 애인보다 친구와 함께 나눌 것이 더 많다고 느끼면서 왜 애인을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한 사람과만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이 답답하다면 왜 여럿이 함께 사랑하는 관계를 시도해보지 않는지 등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보자고 저자는 제안한다.

 

현재의 관계를 당장 끝내야 한다거나 동성애, 낭만적인 우정 관계, 다자연애가 무조건 더 좋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런 합당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고 따져본 후 선택할 수 없다면 그 삶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명예 남성이 되려던 여성들에게 사랑은 사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벨 훅스는 여성이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자연애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방식으로 남녀의 성차를 너무나 당연시한 나머지 여성의 억압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기존의 연애서가 아닌 것을 지향한다고 한다.

 

사실 3세대 페미니즘을 접하며, 남녀의 성차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항상 헷갈렸다. 연애와 사랑이야기로 접근하는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헷갈림이 조금 줄어들까.

 

 

 


 

 

 

 

 

3.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아무래도 5월에 나온 신간 중 가장 뜨거운 책이 아닐까. 사실 서점에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삼십페이지 가량을 읽었는데, 마치 잡지 기고란에 가볍게 쓴 글들처럼 느껴졌다. 음,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작가라고는 상상이 안갈 정도로 가벼웠다. 앞부분만 읽어서일까..

 

한국에서는 올해 착륙한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뉴욕타임스에서 2010년에 선정된 단어였다고 하니 놀랍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들의 설명욕은 비슷한가보다. 게다가 리베카 솔닛처럼 어쩌면 자신의 의견을 왠만한 여성들보다 많이 개진하고 다녔을테고, 그녀의 의견을 경청할 청자와 독자들이 많은 지식인도 '남자들은 나를 가르친다'고 느꼈다니 감히 동질감이 느껴진다. 마저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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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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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포르노’라는 말은 이미 음식을 먹는 행위가 섹스와 얼마나 비슷한지 보여준다. 최대한 탐욕스러운 그 행위를 비추다 보면 공통점은 점점 두드러진다. 재료를 섞는 소리, 입에 넣는 순간, 음식을 입에 넣고 쾌락에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까지.

 

 

 

 ▲킴 카다시안이 출연한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칼스 주니어'의 샐러드 광고 중 한 장면. 말 그대로 '푸드 포르노'다.

 

<음식의 언어>의 저자 댄 주래프스키는 음식과 섹스의 비유가 단순히 “있다”는데 그치지 않는다. 언어학 교수인 저자는 래스토랑 리뷰 100만 건 가운데 섹스가 언급되는 모든 경우를 추출해 조사했다. 실험결과, 섹스언급은 값비싼 레스토랑을 다룬 리뷰에 특히 더 자주 나왔다.

 

연상 관계의 위력은 꽤나 강하다. 리뷰에서 섹스가 더 많이 언급되는 레스토랑일수록 음식 가격은 더 높았다. 저렴한 레스토랑에서 나온 음식이 마음에 들 때 사람들이 쓰는 은유는 아주 다른 종류다. 비싸지 않은 레스토랑의 리뷰에서 튀김이나 마늘국수를 말할 때는 섹스보다 마약이나 중독과 연관된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196p

 모든 사람들이 그저 어떤 현상이 “있다”고 넘어갈 것을, 학자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실 이 책에 실린 저자의 여러 실험과 연구가 ‘왜 굳이 저렇게까지 알아야 하지?;;’ 할 정의 것들도 있다. 제목은 <음식의 언어>이지만, 음식이야기의 탈을 쓴 언어이야기이기에, 음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양으로 접근하다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언어학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하면, ‘왜 굳이..?’라는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 

 

앙트레(Entrée)와 언어의 역사성

음식이야기의 탈을 쓴 언어학 이야기는 앙트레(Entrée)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앙트레는 프랑스어로 ‘입구’ 혹은 ‘들어가다’라는 뜻으로, 음식에 관련된 용어로 쓰일 때는 전채요리 정도로 번역된다. 하지만 미국식 코스에서 앙트레는 전식이 아닌 메인코스를 말한다.

 

 

 

 

 

 

 

앙트레라는 단어는 원래 1555년 식사를 시작하는 첫 번째 코스를 뜻했으며, 여러 재료를 섞어 조리하고 대개 소스를 뿌리 든든한 육류요리로 이루어진 코스였다. 그런다가 같은 종류의 음식이지만 수프와 생선이 나온 뒤, 가금 로스트가 나오기 전에 내는 세 번째 코스로 서빙되었다. 미국에서는 여기서 말한 상당한 분량의 육류코스라는 의미로 쓰이고 이와 구별되는 로스트와 생선 코스라는 의미는 통상적으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69p) 

그리하여 미국식 영어에서 앙트레는 더 이상 샌선이나 로스트 요리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고 단독의 메인코스를 뜻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930년대에 그 단어의 의미가 변해서 달걀이나 해산물로 요리한 가벼운 코스를 뜻하게 되었는데, 그럼으로써 본질적으로 오르되브르나 앙트르메 같은 단어의 예전 의미를 더 많이 띄게 되었다. (69p)

종종 ‘앙트레’를 그저 미국식 용례인 메인음식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프랑스어 어원을 설명하며 잘못된 용례라며 잘난 척하는 이들을 마주친다. 그러나 그 지적은 언어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의 역사성이란 언어가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 신생, 사멸의 변화를 할 수 있는 성질임을 말한다. 언어는 변하고, 변한 언어 역시 옳다. 언어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짜장면이 표준어가 아닌 시절 ‘짜장면’에 굳이 ‘자장면’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처럼 껄끄러울 뿐이다.   

 

케첩이 다시 쓰는 역사

음식의 언어를 집요하게 파는 일은 언어학에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 언어의 역사를 제대로 짚으며 현대의 잘못된 편견을 교정하는 효과도 낳는다. 케첩의 경우가 그렇다. 답부터 말하자면 케첩은 중국에서 유래했다. 첩이라는 단어는 한자 즙(汁)에서 유래했다. 케첩은 한국으로 치자면 멸치액젓과 같은 중국의 소스였다. 케첩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역사는 케첩이 미국음식이라는 선입견을 깸과 동시에, 18세기 이후 중국이 쇠락하고 있었다는 인식도 바꿀 수 있는 사실이다.

 

 

 

 

미국의 국민소스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요리 역사에서 사소하게 재미있는 요소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케첩의 역사는 새로운 통찰력을 토대로 세계경제사를 보게 해준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식 모델을 적용한다면, 중국은 명 왕조 때인 1450년에 내부로 방향을 틀어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나라가 됨으로써, 19세기와 20세기에 서구가 마침내 아시아를 세계경제체제로 끌어낼 때 까지 정체되고 낮은 생활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18세기가 한참 지나도록 케첩의 생산과 교역이 방대하게 이루어진 사실은 실제 상황이 그와 달랐음을 말해준다. (120p) 

케첩에 얽힌 사연 즉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발효생선소스부터 일본의 스시, 우리의 현대적인 달콤한 토마토즙액에 이르는 이야기들은 결국 세계화의 이야기이며, 하나의 세계적 강대국이 몇 세기에 걸쳐 세계를 지배해온 이야기다.

 

그러나 그 강대국은 미국이 아니며, 그 세기는 우리의 세기가 아니다. 여러분의 자동차 좌석 밑에 떨어진 작은 케첩 봉지는 지난 천 년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세계경제를 지배해온 중국 경제력의 상징이라 생각하라. 124

 

역사의 진보를 확인하게 만드는 ‘토스트’

음식 언어의 역사를 되짚으며 이전 세기의 문화를 다시 볼 때면, 그래도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을 느낀다. 소수자의 인권문제에 관해선 특히 그렇다. 건배를 의미하는 ‘토스트’의 어원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듯 싶다. ‘토스트’는 결국 여성의 역할을 남성의 술자리를 즐겁게 만드는 부수적 요인쯤으로 보고 있던 그 세기의 문화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토스트라는 단어는 케첩이 그런 것처럼, 처음의 단어가 뜻하는 것과 지금의 것과 천지개벽한 듯 달라진 분류는 아니다.  용례에 큰 차이는 없다. 지금 쓰는 것처럼 토스트의 어원은 빵이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토스트가 주식으로 여겨지지만, 17세기까지는 빵이 술자리에서 먹는 안주 쯤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스트’는 지금으로 치면 ‘안주’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그 안주에는 종종 여성도 끼었다. 

 

 

 ▲토스트(toast)를 영어사전에 찾아보면, 빵이라는 단어와 함께 건배라는 뜻이 등재되어있다. 3번째 뜻을 보면, 빵이라는 뜻의 토스트가 어떻게 건배를 의미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와인에 토스트로 맛을 더하는 이런 전통이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인 17세기에 영국의 식사자리에서는 식탁에 앉은 사람 모두가 누군가의 건강을 위해,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마시는 관행이 발달했다.

 

이런 건배는 흔히 어떤 숙녀의 건강을 위해 올려졌는데, 그 기원의 대상인 숙녀는 좌중의 토스트로 일컬어졌다.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어떤 글을 보면, 양념된 토스트와 향초가 술에 맛을 더해주는 것처럼 그 숙녀가 모임의 맛을 더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설명되어 있다. 133

 

역사가 진보했다고 쓰긴 했지만 최근의 ‘여성혐오’관련 발언들을 되짚다보면 정말 역사가 진보한 것인지, 혹 진보하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진보하는 척’이라도 하게 된 것도 일종의 진보일테다. 토스트라는 어원이 만들어진 그 당시에는 여성을 안주로 여긴다는 인식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히 선언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자의성주의자와 본성주의자

다시, 언어학이다. ‘앙트레’가 언어의 역사성을 이야기했다면 ‘크래커’(cracker)는 언어의 자의성과 관련한 논쟁을 불러온다. 언어의 ‘자의성’ 논쟁은 어떤 사물과 그 사물이 갖는 이름의 관계에 대해, 자의적인 것이냐 본성적인 것이냐는 갑론을박이다. 셰익스피어는 아마 언어가 갖는 이름이 자의적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어떤 단어의 발음은 보통 그 단어의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를 셰익스피어<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름이란 무엇가?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처럼 달콤한 향기를 낼까?”-셰익스피어 (302p) 

셰익스피어의 우려와는 달리, 장미를 설사 미장이라고 불렀어도 장미를 향기를 낼 것이다. 같은 장미를 두고 한국은 장미, 미국에선 rose라고 부르는 것처럼, 각 언어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 이러한 언어의 자의성을 처음 말한 것은 정치철학자 존 로크였다.

 

로크는 소리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면 한 사물의 이름은 모든 언어에서 똑같을 것이고, 영어와 이탈리아어에서 달걀을 가리키는 단어가 곧 중국어에서도 똑같이 달걀을 가리키는 단어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302p)

 

결국 장미든 미장이든 이름이 뭐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관례주의(conventionalism)이라 분류된다. 이와 반대로 본성주의(naturallism)는 한 사물에 어울리는 언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크라틸로스>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과 야만인 모두에게 어떠 사물에 대해서든 원천적으로 옳은 이름”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 뒤로는 방언과 같은 사례를 들며 관성주의 역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후 언어철학사에서 소쉬르는 자의성을, 로만 야콥슨은 본성성을 이야기했다.

 

전설모음(혀를 입의 앞쪽에서 높이 쳐들어서 내는 소리, 모음 I의 소리 등)은 작고 얇고 가벼운 것들에 연결되며, 후설모음(혀가 입의 뒷부분에 낮게 자리 잡고 내는 소리, 모음 a의 소리 등)은 크고 무겁고 견고한 것들에 연결된다. 실제로 스탠퍼드 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저자는 이를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i]는 전설모음, [a]는 후설모음이다.

 

이들의 가설은 아이스크림처럼 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필요한 상품에는 묵직한 후설모음이, 크래커처럼 가볍고 바삭한 이미지를 줘야하는 상품에는 작고 얇은 느낌의 전설모음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실험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미 언어학에는 이러한 실험 결과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있다. 주파수 코드(frequency code)라는 이론은 저주파(음정이 낮은 소리)와 고주파(음정이 높은 소리)가 특정한 의미와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공감각적 가설은 언어와 촉각 혹은 다른 감각이 무엇과 더 잘 어울리는 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쌉쌀한 초콜릿은 밀크 초콜릿보다 ‘날카롭다’고 느끼고, 보통의 물보다 탄산수가 ‘날카롭다’고 느끼는 것 등이다.

 

국어에서 ‘울림소리’가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국어의 음운 중 ㄴ, ㄹ, ㅁ, ㅇ이 이러한 울림소리에 해당되는데 자신의 시에 울림소리를 위주로 시상을 풀어써 부드러운 이미지를 살린 김영란 등이 유명하다.

 

저자는 이와 관련된 실험을 본격적으로 실행했고 그 결과를 자세히 기술한 것을 보면, 음운과 사물의 본성이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 본성주의자일 것이다. 만약 그가 사물과 사물이 갖는 언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의성주의자’였다면 그는 언어학 교수가 되지도, 이 책을 쓰지도 않지 않았을까. 그는 언어, 즉 소리와 글자에 고유의 ‘의미’를 발견하고 싶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갖는 고유성이 음식이 가진 특성과도 연결됨을 깨달았을 것이다.

 

소리는 언어마다 다르지만 놀랄 만큼 비슷하기도 하다. 이와 비슷하게 바로 똑같은 인간 혀의 다양한 측면을 토대로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 등의 맛 요소를 지각하는 능력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각 퀴진은 각각 문화적으로 특정한 고유의 맛을 더해주는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이런 보편적인 맛 요소를 표현한다. (337p)

 저자는 언어와 음식의 고유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결국은 인간의 욕망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음식을 두고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인간의 욕망도 반영되어 있다. 건강하고 자연스럽고 진정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 우리 가족과 문화와 합일하고 싶다는 욕망, 낙관주의와 긍정성의 깊은 흐름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우리의 인식도 반영한다. 347p 

저자는 남들이 ‘왜 굳이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파고들고 실험하고 결론을 낸다. 이는 결국 음식과 언어에 대한 탐구를 넘어 인간의 욕망과 인식, 즉 인간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학자의 일이란 그런 것이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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