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바꿈 - 탈핵으로 바꾸고 꿈꾸는 세상
탈바꿈프로젝트 엮음, 히로세 다카시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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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핵발전소라는 주제가 아직도 어려운 당신에게, <탈바꿈>

 

알고는 있었다. 들려오는 말처럼 원자력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싸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까지도. ‘탈핵이라는 가치에는 동의했지만 구체적으로 탈핵에 대한 이런 저런 공방을 들으면 뭐가 옳고 그른 소리인지 헷갈렸다. 20113월의 후쿠시마 사고 이후 너무나 많은 핵관련 뉴스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후쿠시마 이후 대략적으로 핵발전소가 위험하단 것을 감지했지만 핵관련 기사에 난무하는 전문 용어와 숫자들 때문에 겁먹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5. 핵발전소? 원자력발전소랑 다른 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똑같다. 같은 것을 지칭하나 다른 언어로 말할 때, 언어는 정치적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교할 때 누군가는 정상인/장애인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비장애인/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과 비교하여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를 정상인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장애를 가진 것은 비정상이라는 전제를 둔 것이다. 핵발전소를 원자력발전소라고 말할 때, 이는 원자력이 핵을 이용해 만드는 에너지라는 것을 숨기는 수단이 된다. <탈바꿈>의 첫 페이지는 이를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책에서는 원자력발전소를 핵발전소라고 표기합니다. 핵발전소는 원자력이 아니라 핵에너지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자로나 원전처럼 관행으로 굳어진 경우는 부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탈바꿈 4p

 

탈핵의 가치에 찬성하면서도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도 많다. 핵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가 같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그저 관행을 따라 써왔을 수도 있다.

 

#4. 한국에서 터질까?

2013년에는 최근 14년간의 연평균 지진 발생횟수의 두 배에 달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하나, 지진이 많아졌다.

둘, 지진 위험 지대인 영덕-경주 일대에 핵발전소가 몰려있다. 부산과 울산, 경주를 이은 고리, 월성, 동해안 일대에 총 18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예정이며 이 인근 30km반경에 4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몰려있다.

셋, 수명 완료된 원전이 2호나 운영 중이고 전체 원전 23기 중 절반이 2028년에 수명이 만료된다. 그만큼 노후된 원전이다. 지진지대 위에 그 노후된 원전이 서있다는 것이다. 특히 월성원전과 신월성원전은 국내에서 가장 약한 내진설계로 30년 전 토목건축 기술로 건설됐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공포스럽지 않은가? 여기에 핵발전소 사고 대비가 미흡한 한국의 상황까지 더해진다. 방사선 비상계획 구역은 벨기에 10km, 미국 16km, 일본 30km인 반면 한국은 3km이며 구호소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 수는 극히 적다. 핵발전소 가까이에 구호소가 위치하기도 한 곳도 있다. 방사능방재훈련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핵발전소 사고는 발생하기만 하면 사고가 아닌 참사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예견된 인재’. ‘사고를 참사로 만드는 구조’. 세월호 이후 모든 재난에 따라붙는 수사다. 핵발전소 사고야 말로 예견되고 있는 참사다

 

#3. 방사능 걱정하다 보면 도대체 뭘 먹을 수 있나? 그냥 대충 먹자?

일본산 물고기, 식품뿐 아니라 국내산 녹차에서 발견된 세슘, 2013년 국정감사때 공개된 블루베리 등의 베리류에서 검출된 세슘, 어묵, 맛살, 소시지, 가다랑어 포 등 가공식품까지......도처에 널부러진 위험은 오히려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방사능은 외부 피폭뿐 아니라 내부피폭 또한 위험하다. 방사능으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에서는 피폭의 80~95%가 음식으로 인한 내부피폭이었고 먹이사슬에 의한 방사능 농축이 심각했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은 얼마나 농축된 방사능을 먹는 걸까.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뭘 먹느냐’ ‘먹고 그냥 일찍 죽어같은 농담까지 익숙해 졌다. 하지만 찾아보면 독자적인 방사능 기준치를 마련해 정밀검사 결과를 공개하고 검사시설을 마련하고 식품을 제공하는 생협(생활협동조합)이 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생협 한살림이 그렇다. 최근 생협들은 인터넷 쇼핑몰도 개장했기에 인터넷으로 둘러보고 손쉽게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 밖에서 나가 사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집밥에서만큼은 내부피폭 걱정을 덜을 수 있다.

 

#2. 원전사고, 먹거리만 조심하면 방사선 노출 걱정은 안해도 되나?

자주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건강검진엔 의레 엑스레이, CT촬영이 포함된다. 병원을 옮기기라도 하면 며칠 전 했던 검사를 또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슴 엑스레이 정면 1회에는 0.02밀리시버트, 암 정밀검진 시 복부/골반 CT촬영은 1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된다. 일반인의 연간 선량한도는 1밀리시버트다.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은 안정량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노출된 양만큼 비례하여 암 발병률이 높아진다. 암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암 발병률을 높이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엑스레이나 CT촬영이 아닌 초음파 혹은 MRI검사로 대체할 수 있다면 대체하고, 불필요한 검사는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1. 해결책은 개인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결국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개개인'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는 해결책은 어딘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고 정말 뭐가 달라질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핵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위하여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관건은 아니다. 에너지 절약의 주체는 개인보다 정부와 기업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 효율 개선과 절약의 핵심 주체는 개인과 가정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되어야 한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소소한 수준이며 개인은 갖춰진 에너지 시스템에서 게 벗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 전력 소비의 절반 가량은 제조업이 차지한다. 주택용은 20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탈바꿈, 183p

 

 

많은 에너지 관련 글에서 해결책은 ‘1인당 전력 사용량을 줄이라는 충고로 끝나곤 했다. 하지만 한국은 민간 전력 사용량이 적지만 1인당 전력 사용량은 높게 나타난다. 그렇기에 종종 많은 글에서 개인이 스스로 전력 사용량을 줄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주택용과 산업용으로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왔다. 나라 전체로 보면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칼럼에서 보듯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주택용 소비와 산업용 소비를 구분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주택용 전력 소비량은 2010년 기준으로 1,240kwh. OECD 평균 2,448kwh의 절반 수준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1인당 주택용 전력 소비량은 2,384kwh를 사용한다. 민간에서의 전기 사용은 일본이 한국에 비해 2배나 높다.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일본의 1.5라는 둥 에너지 소비가 높게 인식해 온 것은 한국의 산업용 전력 소비량이 OECD나라 중 세계 4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인당 에너지 소비가 높으니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주장은 주체의 문제를 혼란시킨다. 다시 한 번, 에너지를 절약할 주체는 민간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다.

 

Tip : 이를 외울 방법은, 복습, 또 복습하는 것이다. 탈핵의 가치에는 찬성해왔으나 반대파(?)의 끊임없는 질문이 두려워 입을 막고 있던 당신이라면 <탈바꿈>을 국어사전마냥 자주자주 들춰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미국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사고에 조사단으로 참여한 사회학자 찰스 페로(Charles Perrow)는 핵발전소 사고를 비롯한 국가적 재난들을 `정상 사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사고가 비정상적이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핵발전소와 같은 첨단 복합시스템에는 구조, 조직, 건설에 사고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65p)

방사선량이 어느 수준까지 누적된 후에야 암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방사선에 노출되면 아무리 적은 성량이라도 그 수준에 비례하는 확률로 암이 발생할 수 있다. 노출되는 방사선량이 0일때만 암 발생 확률만 0이라는 결론이다.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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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행복사회 시리즈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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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지 없는 증세시대, 한국도 복지국가가 될 수 있을까?

[서평]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증세 없는 복지라는 표어는 복지 없는 증세라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담뱃세, 주민세, 자동차세는 올랐지만 어린이집 보육료는 예산에서 빠졌고 토요일 오전 진료비는 올라갔다. 몇 번의 큰 선거를 겪으며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로 걸음을 띄었다고 하지만 상황은 나쁘게만 느껴진다. 북유럽을 비롯한 복지국가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났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오마이뉴스>의 대표이자 기자인 오연호의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덴마크의 사례를 한국사회에 적용해 보자는 제안서다.

 

저자는 덴마크가 행복한 이유를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이라는 6가지 키워드로 분류해 설명한다. 직접적으로 어떤 한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는 말하진 않지만 맥락상 그 중에 제일은 자유다. 덴마크인 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결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는 질문에 저자는 덴마크인 들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지 여유를 두고 스스로 선택한다”(본문 193p)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국가와 사회가 그런 환경을 보장해준다

 

단순히 생각하면 자유와 안정은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유는 안정에서 나온다. 책 중에서 덴마크의 공립학교 발뷔스콜레를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덴마크 공립학교는 9년 내내 같은 담임이 학생을 맡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동안 담임선생님이 한명인 것이다. 한 한생은 11년간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지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학생의 말에서 어떻게 자유가 안정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같은 반이면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에 학생들이 더 창의적인 도전을 하게 돼요. 반드시 옳다는 확신이 덜 들어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거든요. 누군가가 발표 중에 실수를 해도 비웃지 않아요. 모두가 그 학생을 전부터 잘 알아왔으니까요” (본문 167p)

  

안정적인 환경이 그들을 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생각이 쌓여 결국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안전한 환경에는 재정도 들어간다. 우선 덴마크는 병원 진료비가 무상이며 대학등록금도 무료이고 대학생이 되면 자취생에겐 약 120만원(6000크로네), 부모님 집에서 사는 대학생에겐 그 절반을 생활비로 지급한다. ‘취준생이나 실업자 같은 경우 최대 2년 동안 최소 약 200만원(1860크로네)에서 최대 약 300만원(16300크로네)까지 받을 수 있다. 사실 이쯤 되면 덴마크인 이 행복한 이유는 앞에 제시한 수많은 키워드들보다 복지라는 것이 더 와 닿는게 사실이다.

 

복지국가인 덴마크를 만든 역사를 저자는 크게 교육부분과 농업부분으로 나눠 설명한다. 교육부분에서는 덴마크의 정치가이자 목회자였던 덴마크 교육의 아버지니콜라이 그룬트비를, 농업부분에서는 군인출신으로 덴마크 국토 개간 운동을 펼친 달가스를 언급한다. 달가스의 황무지 개간과 함께 그룬트비의 주체적인 시민교육으로 일어난 시민들이 행복사회 덴마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들의 공통점을 깨어있는 시민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달가스 운동으로 깨어있는 농민이 덴마크의 산업화 과정에서 깨어 있는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으로 진화했고 이들이 덴마크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중심축이 됐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에 덴마크를 배우자는 시도가 있었다. 새마을운동과 같이 덴마크의 농업운동처럼 비슷한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덴마크의 운동과 한국의 운동에는 차이가 있었다. 저자는 군사독재와 깨어있는 시민은 함께 갈 수 없는 한계를 가졌다며 그 차이를 설명한다. 또한 덴마크의 운동이 아래에서 위로의 운동이었다면 한국의 운동은 위에서 아래로 운동이었기에 행복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현실에 저자는 결국 행복사회를 만드는 일엔 시민이 관건이며 정치권에 기대지 말고 우리 스스로 내일을 만들어가자고 조언한다. 하지만 깨어있는 시민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본문 중에 그룬트비가 농민과 시민들을 교육했던 방향이 힌트가 될 수 있을 듯싶다.

 

그룬트비는 농민들과 시민들에게 무조건 교육을 강조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농민과 시민이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또 더불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문262p)

 

깨어있는 상태가 중요하다고, 깨어있는 시민이 되라고 하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깨어있지 않은 상태를 전제한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더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들을 수도 있다. 내가 깨어있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상대와 이야기하는 과정이 더불어즐거울 수 있을까? 한국사회가 위에서 아래로 운동의 후유증으로 복지국가와 행복사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요즘. 후유증을 극복하자고 말하는 자세도 위에서 아래로의 자세는 아닌지 돌아보는 게 먼저일 지도 모른다.

덴마크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신의 나라도 아니다. 다만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그들의 장범부터 먼저 배워보면 어떨까.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치유하는데 그들의 잠정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285p)

덴마크인들에게 행복인생을 위한 관습법이 있다면 ‘여유를 두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여러 선택지 가운데 살펴보고, 남의 눈치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서 즐겁게 살자’가 제 1조가 될 것이다. (3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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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게이트 - 불법 사찰 증거인멸에 휘말린 장진수의 최후 고백
장진수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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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혼없는 공무원'에서 영혼의 자유를 느낀 인간으로

부제: 민간인 불법 사찰 증거인멸에 휘말린 장진수의 최후 고백 - 평범한 악, 비범한 선

 

최고의 부하는 '영혼없는 부하'?

아이히만은 20세기 최고의 '부하'였다. 유대인 학살의 실무자였지만 법정에 선 그는 '윗선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실제로 그는 히틀러의 저서를 읽은 적이 없었고 히틀러의 사상을 잘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그 유명한 철학자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고 성찰하지 않은 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악을 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꺼내기엔 죄질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사람을 죽인 죄와 컴퓨터 하드 디스크의 자료를 죽인 죄를 같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민간인 불법 사찰 증거인멸에 휘말린 장진수 전 주무관이 법정에 서게된 이유는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죽인 죄 때문이 아니었다. 상관의 말을 잘들은 '영혼없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통을 공감하고 폭로의 용감함을 높이 사지만 그는 분명히, 평범한 악을 행했다.

 

그의 '영혼없음'은 책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실을 말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몇번이나 기회가 있었음에도 평범한 악을 행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편으로 ‘진 과장 말처럼 그 문건으로 여론이 돌아선다면,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다시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안이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옳고 그름은 외면한 채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비겁하고 소극적인 태도. 정말 부끄럽게도 ‘영혼없는 공무원’ 그 자체였다. (118p) 

 

-내가 끝까지 안고 가면 결국 나의 뒤를 봐주갰다는 제안이었다. 김경동 주무관이 말한, 바로 그 ‘의리’와 밀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당장 멱살잡이를 해도 시원찮은데,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게 해준다는 말에 갑자기 설움이복받쳐 코끝이 시큰해졌다. (167p)

 

-어쨌거나 지금 내 뒤를 봐줄 사람이기에 그저 ‘의리’를 지키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169p)

 

-나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바로 그 ‘의리’를 지켜야만 한다는 헛된 일념으로. (171p)

 

-대통령까지 나섰는데 설마 나 같은 말단 공무원 하나 조치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되겠지? 그래. 얘들 생각도 해야지. 나만 좀 참으면 되는 거잖아. (237p)

 

이 밖에도 그가 충실하게 상관의 지시를 따른 일이 '증거인멸'이라는 범죄임을 깨달은 후에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부분은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권력이 건넨 돈 5000만원을 전세금 상환에 써버리기도 한다. 

 

그는 '먹고사니즘'이라는 평범한 이유로 악을 행했다. 물론 그 악의 크나큰 실체-증거인멸을 계 한 이들, 지시한 이들-는 무죄를 선고받고 작은 악-증거인멸인줄도 모르고 증거를 인멸한 실무-이 큰 죄로 부풀려진 점은 억울한 점이긴 하다.

 

평범한 악, 비범한 선

보통의 눈에서 보면 평범한 악을 행했던 이가 민간인 불법 사찰의 증거인멸에 청와대까지 개입했다는 이 크나큰 범죄를 폭로하는 절대'선'을 행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악을 반성하는 동시에 두 딸아이의 아버지라는, 너무도 평범한 이유로 비범한 선을 행하게 된다.

 

검찰조사를 받는 도중, 그는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진실을 말하지 못한 그의 입은 담배만 피웠을 것이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열 시간 이상 끊임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숨이 턱턱막혀 '의리'라는 걸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았지만...(182p)

 

이런 괴로움과 두 딸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는 진실이라는 자유를 택하기로 마음 먹는다.

 

-말해도 죽고 말하지 않아도 죽는다고? 그럼 까짓것 말하고 죽어버리지 뭐! 마음 한편에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래도 진실이 나를 조금은 도와주지 않을까?' (261p)

 

그저 윗선을 따라 실무를 처리하던 '영혼없는 공무원'이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이미 우리 사회엔 이러한 이들이 있어왔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한 변호사는 2007년 삼성 법무팀에서 내린 책임을 내던졌다. 그의 고백은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삼성'이라는 기업의 굳건한 이미지에 균열을 냈다. 한번 생긴 균열이 커지는 것은 더디지만 점점 벌어진다. 같은 해 백혈병으로 딸을 잃은 한 택시기사는 친척들과 주변인들의 비난에도 삼성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이렇게 온 몸을 내던지는 '진짜 책임'들은 실무자로서 윗선의 명령을 따르는 '가짜 책임'의 평범한 악을 상쇄시킨다. 장진수 전 주무관의 고백은 굳건한 국정원과 청와대의 거짓과 그 거짓의 철통보안 속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이 균열은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의 죄를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 범죄에 용기를 불어넣는 일"이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물론 큰 악은 국정원과 청와대등 '블루게이트 사건'을 공모하고 지시한 이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은 악을 고백하고 성찰하는 장진수 전 주무관의 행동은 미래 범죄까지 단죄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안 이상, 더 이상 미래 범죄에 용기를 불어넣어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고 널리 알릴 이유다. 

 

덧붙이는 말: 장진수 전 주무관의 경우, 언론을 통해 폭로를 했기때문에 현행 '공익제보신고자 보호법'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공익제보자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법의 허술함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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