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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우선 라인업이 훌륭. 헤드라이너들이 하루에 4~5개 있는 공연을 보는 듯했다. 세월호에 관한 글을 엮은 책에 대해 이렇게 가비얍게 평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만큼 세월호에 관한 뭐든지 조심스러워진다. 이 때문에 피로감이라는 말도 나올 수도.. 있었..겠지. 물론 피로감 같은 말을 하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예의라고는 없는 이들이지만.
박민규작가의 글이 가장 잘 쓰여진 글이라 생각했다. 책 제목부터 박민규 글의 제목으로 따왔으니 편집부도 그리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박민규작가의 글은 최근에 안읽어봤다. 박민규라는 작가가 이렇게도 쓰는 사람이구나, 생각할 정도로 깔끔했다. 저널리즘 글쓰기로도 손색없을만큼 짧고 명쾌한 문장과 꼼꼼한 사실관계까지 갖췄다. 특히나 '사고'와 '사건'을 비교하며 세월호를 '사건'이라 규정한 부분이 날카롭고 깊이있다.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57p)
대한민국을 세월호와 비유한 부분 역시 탁월했다. 여지껏 대한민국을 세월호라 비유한 글들을 많이 봐왔지만 이토록 짝 달라붙는 글은 없었다. 소름 돋았다.
-내릴 수 없는 배다. 일본이 36년간 운항하던 배였고 우리가 자력으로 구입한 선박이 아니었다.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생각했다. 배는 늘 통제되고 관리되어왔다. 2층 객실에서 3층 객실로, 이어 4층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나 좁고 미어터졌다. 붐비는 통로에서 또 복도에서 우리는 늘 방송을 들었다. 잘살아보자는 방송, 하면 된다는 방송이었다. 올라가기 위해,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 발전과 번영은 종교가 되었고 배가 왜 이렇게 기울었지? 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이란 이름의 이단으로 몰려야 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기울어야 했던 국민이다. 기울어진 배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에게 이 기울기는 안정적인 것이었다. (64p)
박민규의 글이 가장 잘 쓰여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잘 쓰여진 것과 좋아하는 글은 다르다. 가장 좋았던 글은 황정은 작가의 글과 진은영 작가의 글.
황정은 작가의 '앨리스씨'를 읽었을 때도 느낀거지만 그의 글에선 츤데레스러움이 느껴진다. 항상 '망했어'를 연발하는, 말하기 좋아하고 잘난척 좋아하는 이들에 둘러쌓여있지만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오고간 대화를 곰곰이 곱씹는 친구가 생각나는 글이었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고백을 해보자. 4월 16일 이후로 많은 날들에게 나는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무력해서 단념하고 온갖 것을 다 혐오했다. 그것 역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여유라는 것을 나는 7월 24일 서울광장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엄마아빠는 이제 울고만 있지 않을 거고, 싸울 거야. (...)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97p)
-조금도 상처입지 않으면서 보답받고 응답받는 신뢰같은 거, 나는 믿지 않겠다. 조금 더 상처입어도 좋다. 그것을 감내하고 믿어보겠다. (93p)
진은영 작가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제목처럼 세련된 글이다. 잘 설명하지 않으면 반감을 일으키는 개념을 사용한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거지를 때리는 시인 이야기를 삽입했다. 대학 교양시간에 보들레르의 연민을 증오하는 태도에 동의를 표했더니 반에서 개객끼가 되었던 경험이 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탓이겠지. 연민이라는 개념이 그저 상황을 '관조'하는 자에게서 나온다는, 즉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못하는 순진무구한 악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수백명의 죽음앞에서 연민조차 느끼지 않는 이 현실에서 큰 환영을 얻기엔 힘든 개념일 수도 있겠다 싶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73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가운데 인용)
-누구도 구조될 가능성이 사라진 어느 날 (한 달 후)논란이 불거지자 민간업체의 이사가 TV에 나와서 말했다. 우리는 사실 구조업체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양을 하러 온 업체라고. 그가 말했다. 그럼 구조는 누가 맡은거냐는 질문에
구조는 국가의 업무죠.
라는, 너무나 당연한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50p)
-한 여당 의원은 말했다. 유가족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준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것과 같다고.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럼 가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여줘야 하냐고. 공공의 적이 공공일 때
공공의 적인 공공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 때
그 공공을 심판할 수 있는 건
누구냐고 묻고 싶다. (53p)
-나는 어렸을 때 에밀레 종의 실제 타종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 그 소리는 매우 슬펐으나 어떤 슬픔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나긴 여운을 간직한 것이었다. 우리가 탄 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월호라는 배를 망각의 고털덩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밝여낸 진실을 통해 커다란 종을 만들고 내가 들었던 소리보다 적어도 삼백 배는 더 큰, 기나긴 여운의 종소리를 후손에게 들려줘야 한다. (65p)
니체는 인간이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너무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니체에 따르면,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가 갖는 감정이다. (72p)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73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가운데 인용)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93p)
조금도 상처입지 않으면서 보답받고 응답받는 신뢰같은 거, 나는 믿지 않겠다. 조금 더 상처입어도 좋다. 그것을 감내하고 믿어보겠다. (93p)
컬럼비아호 사고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좋아한다. 2003년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던 중 날개가 과열되면서 공중 폭발한 사고에 관한 조사결과 보고서다. 영화 <그래비티>를 통해서도 잘 알려졌다. (...) 사고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위원회는 우주왕복선 발사과정 전체를 하나하나 재점검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고가 없었다면 알아내기 힘들었을 재미있는 단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형태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103p)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김홍중
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41p)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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