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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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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달관세대’개념이 들어오게 한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세대론을 다룬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책은 ‘세대론은 허구다’라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그는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라고 일갈한다. 책은 100페이지 가량을 세대론을 비판하는데 쓴다.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부유층도 빈곤층도, 남성도 여성도, 인본인도 재일 한국인도 그 밖의 외국인도 모두 한데 뭉뚱그려,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해 버리기 때문이다. 76p

 

젊은이론이 결코 마무리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가령(加齡)효과’와 ‘세대효과’의 혼동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인이 늙어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뿐인데, 이것을 마치 ‘세대의 변화’ 혹은 ‘시대의 변화’로 착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젊은이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이 약해졌다’고 지적하는 대부분의 논의 역시, 이 현상으로 설명 가능하다. 86p

 

일본 인구 구조에 변동이 생겨 더 이상 자동차가 팔리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제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는 문제다. 그러나 자동차의 판매 부진을 젊은이들의 심리 변화로 몰아가면, 아직 만회할 수 잇는 기회가 생긴다. 따라서 자동차 판매 대수와 관련된 현상을 “젊은이들은 자동차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로 일축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영리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일단 자동차 회사로서는 당분간 안심할 수 있고, 광고 회사나 자칭 ‘젊은이 마케터’에게도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88p

 

어쩌면 ‘젊은이론’은 젊은이라는 이름을 빌려 쏟아 낸 사회 비판이 아니었을까? 본래 ‘젊은이’는 그 실체가 있는 듯하면서 또 없는 듯한 존재, 즉 애매한 대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젊은이는 쉴 새 없이 교체된다. 따라서 젊은이론이 바뀐다고 해도, 아무도 이 점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교체’를 환영한다. “이것이 새로운 젊은이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90p

 만약 “젊은이가 소비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싶다면, 젊은이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일본의 출생률을 이렇게까지 저하시킨 정책 담당자, 그리고 이런 정책을 지지한 당시의 국민들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경우에 일단 과거의 자신부터 탓해야 할 것이다. 126p

하지만 한국에서 세대갈등은 허구가 아닌 실제처럼 여겨진다. 기업에서는 장년층의 정년연기와 청년층의 고용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고, 최근 불거진 국민연금 논란은 정치권이 세대론을 부각시킨 사례다. 다수의 피부양자가 소수의 부양자에게 무임승차한다는 시선이다.

 

문제는 무임승차자가 아니라 좌석 자체가 극도로 한정된 현실인데, 정치권은 이를 세대론으로 가린다. 최근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50%로 상환하겠다는 의제에 정부는 “후세대에 1702조원의 세금폭탄을 안기는 것”이라 발표했다. 하지만 이 1702조원은 연금가입자들이 추가로 받게될 수령액이며 정부의 이 계산도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음이 밝혀졌다.

 

1702조원은 소득대체율(가입자 평균소득 중 연금수령액 비중)을 50%로 올릴 경우 가입자들이 추가로 받게 되는 돈, 즉 연금수령액이다. 소득대체율 인상 시 더 낼 돈이 아니라 연금 가입자들이 입게 될 혜택의 규모인 것이다.

 

 (...) 이는 소득대체율을 50%, 보험료율을 10.01%로 올렸을 때 기금이 2060년 소진된다고 추계한 시나리오를 전제로 하고 있다. 기금 소진 후엔 그 시점의 전체 근로세대에게 보험료를 부과해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노인인구가 많기 때문에 근로세대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출산율 제고 등 추가 보완책 없이 현행 제도(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40%)를 그대로 운영해도 2060년 기금 소진 후 보험료율은 21.4%로 치솟는다. 소득대체율과 무관하게 기금이 소진되면 미래세대는 ‘폭탄’을 떠안게 돼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보험료율을 기금 소진 직전까지 동일하게 유지한다는 정부의 가정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2060년을 전후해 기금 소진 상황을 연착륙시키려면 (소진 이전에) 장기간에 걸쳐 보험료를 순차적으로 인상해 갈 수밖에 없다”며 “2061년부터 갑자기 보험료를 20%로 인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가정이며, 그 어떤 연금학자도 이런 식의 운영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적 없다”고 말했다.

(출처: 경향신문 ‘1702조’는 세금 아닌 ‘연금 추가 수령액’… 아전인수 해석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10203&artid=201505102153485)

 

국민연금의 운용자가 오히려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 또한 세대갈등을 완화해야 할 주체인 정치권이 오히려 세대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세대갈등론은 단기적 정치전략으로 유효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부작용을 낳는다. 앞서 말했듯 세대갈등론은 진작 중요한 세대갈등의 원인을 가린다. 자리를 늘리라는 요구를 해야할 승차자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크리스토프 부터베게는 세대 갈등론을 ‘선동적 허위선전’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정치학자 크리스토프 부터베게를 인용해 세대 문제는 불평등 문제를 희석하기 위한 ‘사회정책적인 데마고기(선동적 허위선전)’라고 말한다. “사회국가의 축소를 도모하는 세력이 ‘세대형평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적 주도권을 정당화한다. 세대형평성 논의의 정치적 효과는 비단 사회국가의 축소뿐이 아니고 불평등한 권력, 재산, 지배관계 대신에 세대를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한 구조를 ‘은폐’하는 것”이라고 부터베게는 주장한다.

 (출처: 한겨레 신문 “세대간 투쟁은 허구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87420.html)

 

세대를 넘어 가로지른 한국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다. 정치권과 언론이 부추기는 세대론은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라고 지시하는 꼴이다. 세대갈등론에 휘둘려 사회적 분배라는 과정을 무임승차자에 대한 시혜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둘 때다. 국가의 복지제도는 세대간의 교환이 아니 축소될 경우 결국 모든 세대에게 손해로 돌아가는 사회의 필수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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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이스 잼잼 - 경이로운 일상음식 이야기 오무라이스 잼잼 1
조경규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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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먹더라도 `오무라이스 잼잼`의 에피소드가 생각나게 만드는 중독 만화. 그만큼 에피소드에 선택된 음식이 일상적이기도 하고, 비유가 탁월하기도 하다. 귀여운 인물 그림체에 비해 징그러울 정도로 정교한 음식그림도 중독성에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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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 울력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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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회의원이 장관이 되려던 시기. 기자들과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 나라의 장관 후보가 기자에게, 자신이 언론 자유를 억압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기자들은 이를 듣고도 기사화 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자와 국회의원이 밥을 먹는 자리를 사석이라 표현했다. 얼마 전 드러난 소위 이완구 김치찌개 회동은 언론이 정치권에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국 언론의 출입처 제도는 기자가 정치권 혹은 권력과 함께 싸우거나 힘을 합치는 존재인지, 감시하는 존재인지를 잊게 만들었다. 시사IN의 고제규 기자는 출입처에 얽매이지 않는 기자(그의 경우 주간지 기자)를 복싱의 해설자로 비유했다. “권투경기로 비유하면 일간지 기자는 사각 링 안의 심판처럼 두 선수의 상태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반면 주간지기자는 해설자 입장에서 관중과 코치를 보고, 경기의 판을 넓게 읽을 수 있다. 일간지 기자에 비해 주간지 기자는 팩트만 보고 쫓아갈 수 있다.” ‘왓치독이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를 잊게 한 것은 출입처 제도에 익숙해진 기자들의 습관때문이 아닐까.

 

 

라 보에티도 자발적 복종의 이유가 습관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습관이다. 인간의 순응 과정은 말()의 태도와 같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삐를 당기고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변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신하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조상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56p)  

 

 

라 보에티가 글을 썼던 16세기는 천부적인 자유를 갑자기 빼앗긴 자들이 존재하던 때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냈다.’ 그들은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환호하며, 그 순간부터 흔쾌히 즐거운 기분으로 군주에게 봉사한다. 처음에 무력에 의해 정복당한 자들은 군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뾰족한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46p) 그 뒤로는 습관을 들인 말과 같다. 보에티에 따르면 다음 세대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약간의 특권이 오래 지속되는 데 그저 만족할 뿐이다.’   

 

 

어차피 변하지 않을 것. 변하지 않을 것에 대해 사람들은 포기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 아미타이 에치오니는 대통령을 무당에 비유했다. 사회에 문제가 생길 때, 대통령은 과장된 언어와 행동을 내비친다. 하지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통령은 말과 행동만으로 국민들은 안심시킨다. 무당인 셈이다. 현대의 대통령이나 정치권 보다 변하기 어려운 것이 라 보에티가 글을 쓰던 당시의 신분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겪어보지도 못한 자유를 외치기 보다 독재자 옆에서 주어지는 약간의 특권, 전리품을 챙기려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85p)

 

 

이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 더 가속화됐다. 신분제가 보이는 폭력의 결과였다면 현대에 복종을 이끌어 내는 것은 폭력은 아니다. 이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많은 이들의 지지, 자본의 세련됨, 인터넷과 같은 신기술로 인한 것이다. 사실 보에티의 시대에 어떤 것이 폭력이 아닌 형태오 복종을 끌어냈는 지 궁금하다. 추측해보건대 돈이나 물품을 주고 누군가를 노예처럼 자신의 평으로 만드는 모습이었을 테다. 히포크라테스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어느 날 페르시아의 왕이 히포크라테스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높은 관직과 선물로 유혹한 적이 있다.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을 죽이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이방인을 치료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이 조국을 억압하려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의술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64p)

 

 

이러한 은밀한 유혹은 현대에 더 기승을 부린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심리정치>에서 소셜미디어가 전면적 통제와 자발적 상호 감시를 유도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이라고 분석했다. 정치인이나 공인의 사생활이 아니더라도 sns를 타고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마녀사냥을 당했는지를 상기해보면 무리한 분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라 보에티 역시 폭력보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은밀하고도 세련된 유혹이라고 밝힌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언젠가 미트리다테스는 사람들이 독약을 먹는데 익숙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노예 근성이라는 독으로써 유혹한다. 이러한 유혹은 하나의 습관으로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월하게 이 독약을 삼키게 하고, 한번도 이 독이 쓰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49p)  

 

 

유혹에 익숙해지고 유혹이 가져다주는 전리품에 익숙해진 이들은 독재자가 사라질 때 오열한다. 로마 시인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을 몹시 애도했다. 가장 악랄한 폭군의 잔혹성보다도 더 끔직한 것이 바로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찬양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폭군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 근성이라는 달콤한 독을 로마 시민들에게 마시도록 조처했다. 카리사르의 낭비벽, 관대함, 연회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달콤한 맛을 즐기게 하였다. (70p)  

 

 

자유는 인간에게 천부적이지만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일까, 자유보다 전리품을 원하는 이들이 더 많아서 일까. 자유의 값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자발적인 복종을 하고도 그것이 복종인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이 복종이 강요된 복종인지, 자발적 복종인지 구별하는 지혜조차 잃은 듯하다. 언론을 떠나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복종을 찾아내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문헌 <향연>에서 사랑하는 자가 임에게 봉사하려고 생각하는 것을 "자발적 예속"이라고 표현하였다. (19p)

-인민 가운데 누군가 자유를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다. 비록 가장 고귀한 목적인 자유의 천부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려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그러한 모험을 권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인민 전체의 동물적 신분이 보편적으로 고유한 신분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 가자에게 커다란 용맹심을 발휘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할 정도로 나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인민들은 제각기 고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삶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불행한 삶을 계속 영위하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무조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권력에 봉사하느냐, 저항하느냐 하는 물음은 결코 개인이 제각기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그저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만 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았다.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다만 우연히 수동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24p)

-자유란 오로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자유가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 25p)

-자연 속에는 어느 누구도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한 가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평등이다. 신의 시녀이자 인간의 교사인 자연은 인간을 오로지 어떤 한 가지 형태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설계에 따라 창조했다. ( 34p)

-동물들 중에는 갇히게 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종류들이 많이 있다. (...)동물계의 그 밖의 다른 짐승들은 크든 작든 간에 그들이 감금당할 경우 완강히 저항한다. ( 37p)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인민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자유를 너무나 뜻밖에, 갑작스럽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뇌리에는 자유를 되찾으려는 생각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 사람들은 자유의 상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환호하며, 그 순간부터 흔쾌히 즐거운 기분으로 군주에게 봉사한다. 처음에 무력에 의해 정복당한 자들은 군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뾰족한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 사람들은 선대의 사람들은 혹독한 억압 밑에서 온갖 노역을 어쩔 수 없이 행하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다음 세대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약간의 특권이 오래 지속되는 데 그저 만족할 뿐이다. 그들은 감히 다음의 사항을 인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차제에 눈앞의 것과는 다른 어떤 행복이 주어지며, 전대미문의 어떤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 말이다. (46p)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언젠가 미트리다테스는 사람들이 독약을 먹는데 익숙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노예 근성이라는 독으로써 유혹한다. 이러한 유혹은 하나의 습관으로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월하게 이 독약을 삼키게 하고, 한번도 이 독이 쓰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 49p)

-우리의 내적성향은 무엇보다도 노예화로의 유혹이라는 습관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천부적 기질은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가지 않을 때에는 순식간에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50p)

-인간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습관이다. 인간의 순응 과정은 말(馬)의 태도와 같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삐를 당기고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변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신하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조상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56p)

-인민이 노예 신분으로 태어났고, 노예로 길러졌다는 게 자발적인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다. 즉 인간은 독재 치하에서 필연적으로 비겁하고 연약해진다는 것이다.(63p)

-어는 날 페르시아의 왕이 히포크라테스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높은 관직과 선물로 유혹한 적이 있다.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을 죽이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이방인을 치료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이 조국을 억압하려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의술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64p)

-로마 시인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을 몹시 애도했다. 가장 악랄한 폭군의 잔혹성보다도 더 끔직한 것이 바로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찬양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폭군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 근성이라는 달콤한 독을 로마 시민들에게 마시도록 조처했다. 카리사르의 낭비벽, 관대함, 연회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달콤한 맛을 즐기게 하였다. (70p)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85p)

-신하들은 향락적인 연회를 개최하여 폭군을 만족시키고 황홀하게 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유흥은 그들의 고유한 기질을 억압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신하들은 항상 통솔자의 말에 넋을 잃고 들어야 하며, 그의 눈짓에 따를 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그를 살펴보아야 한다. 손과 발로써, 눈과 귀로써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사는 인간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88p)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항상 독재자를 용서한다. 그러나 나는 어째서 그렇게 용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독재자의 잔혹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독재자의 잔악무도한 행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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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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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소개(알라딘 제공)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9.11테러 일주일 후 손택이 쓴 글의 제목이다. 테러에 슬퍼하되, 이 테러가 '미국이 맺은 특정 동맹관계와 미국이 저지른 특정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임을 인정하자고 한다. (만약 한국에서 비슷한 양상의 테러가 일어났을 때 한 여성지식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

 

 손택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 하고 싶은 말도 이와 같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바보처럼 슬퍼하는 거라고. 슬퍼하되,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유튜브의 뉴스·정치 카테고리에 들어가 보면 재난 영상은 엄청난 조회 수를 자랑한다. IS가 만드는 동영상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총살된 사람, 쓰나미가 닥치는 모습들이 그득하다. 그 유명한 9.11 테러의 순간은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라도 몇 초간 그 영상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자주 재생됐다. 3.11이후 후쿠시마의 영상, 4.16이후 무한 반복되었던 세월호 침몰의 순간.

 

어마어마한 재난이 아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주차장 알바의 굴욕적 모습, 보육원 선생님에게 아이가 맞아 저 멀리 쓰러지는 모습까지. 여기저기서 고통은 재현된다. 우리는 이런 불편한 일들을 보아야한다고,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것들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윤리의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세월호 이후 언론의 반성문은 이런 윤리의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왔. 하지만 아직 이. 얼마 전 모 인터넷 언론사에서는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검찰에 출석하는 여성의 표정을 순간 포착했. 왜곡된 앵글에서는 여성혐오까지 읽혀지는 사진이 나왔다. 그 사진은 인터넷에 흘러넘쳤고 예능프로그램까지 진출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사진은 영상보다 위험하다. 영상이 수백 장의 사진을 이어붙인 것이라면 사진은 한 장이다.

 

맥락과 사실의 싸움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맥락을 잃은 사실은 왜곡을 사져온다. 어쩌면 왜곡된 순간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왜곡된 순간이 사진이다. 손택은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46p)고 말한다. 사실 인간이 사는 동안 죽음을 맞는 시간은 찰나 중의 찰나이며, 어쩌면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강렬한 것만을 길동무 삼기에, 사진에서 왜곡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책 32p의 도판(알라딘 제공) 

 

 


 

모순이다. 사진의 전제는 누군가는 틀림없이 그곳에 존재했던 인물’(48p)사실이며 일말의 예술적 기교가 아닌 증거품’(49p)이다. 뉴스라는 사실을 전하는 매체에 사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사진이 왜곡이라니? 사진작가의 프레이밍 안에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 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뜻이다.(75p)

 

수많은 유명사진들의 왜곡과 연출을 줄줄이 읊은 후, 손택은 예외의 사례를 짚기도 한다. 사실을 담은 사진들은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 1947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매그넘 포토 에이전시>는 베트남 전쟁의 모순(미국이라는 세계의 수호자가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문명적인 일을 행했다는 참상)을 고발했고 전 세계적 반전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나 베트남전이라는 사례를 제외하고, 끔찍하고 잔인한 실상이라는 사진들은 대부분 연출이었다.

 

    

▲매그넘의 웹페이지. 

 

 

사진을 위해 끔찍한 장면을 만드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이 때야 말로 사진의 shoot이 총을 쏘는 shoot과 같은 단어임을 상기하는 때다. 손택은 이를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 할 수밖에 없다’(103p)고까지 이야기했다.

 

 

문제는 사진을 연출할 때 드러나는 나와 타인의 구분이다. 전쟁이나 죽음 다루는 사진들 중에 미국들 제 1세계(편의상)를 다룰 때에 죽은 사람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지만 제3세계, 타인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것은 일종의 품위 차리기인데, 타인들에게는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그런 품위 차리기이다.(109p) 여기에서 윤리는 상실된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일이다. 비록 적이 아닐 지라, 타자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113p)

 

 

이 연출을 손택은 대상화’(125p)라고 불렀다. 대상화됐다는 것은 곧 타인화됐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사라예보에서 내전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사진과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기근을 견디는 사람들의 사진이 나란히 전시됐을 때, 대상화된 대상은 우리의 고통은 세계 어디에나 있는 흔한 고통이란 말이야?”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사진이 고통을 대상화한 결과다.

 

 

이 대상을 바라보는 연민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연민은 소중한 감정이지만 이미 대상화된 고통을 볼 때 사람들은 나는 거기 있지 않다를 확인하며 나의 안전을 확인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연민은 스스로 자신을 이 일에 무고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연민 속에는 무관심, 무력감, 안전을 확인하려는 욕구, 무고함이 들어있다. 위험한 동영상과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앉은 소파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특권을 누리는 우리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보내는 것을 그만둔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손택이 남긴 과제를 떠안지 않으면 안 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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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 국제뉴스를 의심해야 세계가 보인다
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이명은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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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이명은 옮김, 2014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점을 밝힐 때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말을 하고 있다. - 조지 오웰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이 임기가 끝난 지 2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자서전을 냈다. 자서전이라기보다 자화자찬이라고 읽히는 대목이 많은 서적이어서인지, 한 뉴스에서 앵커는 조지 오웰이 한 말을 소개했다. 스스로를 칭찬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Jtbc 뉴스화면 캡쳐

 

자서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많은 책 앞에서 저자들이 머리말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저서를 졸저라 여기며 겸손함을 내비치는 것도 이런 이유일 테다. 특히나 주장을 담은 책들은 저자의 겸손함이 미덕이다. 제목부터 ‘진실을 가리는 (무려!)50가지 고정관념’에 대해 쓰는 저자라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을 쓴 파스칼 보니파스 역시 책 안에서 드러날 자신의 고정관념을 유의하라며 책을 시작한다. 조지오웰의 판단에 따르면,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조건 하나를 충족한 셈이다. 

 

이 책에 나오는 것들은 물론, 책에 쓰인 모든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17p)  

덧붙여 그는 ‘책에 쓰인 내용은 믿을 만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선 다음과 같이 행동하라고 일러준다.

 

어떤 책을 펼치기 전에, 저자가 누구인지, 예를 들어 대학교수인지 기자인지 시민운동가인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또한 어떤 관점으로 글을 썼는지 알려주는, 저자의 출신 국가․체제․시대 등에도 유념해야 하며, 책을 쓰게 만든 사건과 예상한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17p)  

저자의 부탁대로, 이 책의 저자 ‘파스칼 보니파스’부터 시작해보자. 프랑스의 국제정치학자이며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 현재 파리8대학 유럽학연구소에서 강의하고 있다. 국제관계, 핵 문제, 군축 문제, 강대국 간 파워게임, 프랑스 외교정책, 국제관계 속 스포츠 등을 주제로 40여 권의 책을 펴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4차 세계대전이라고?>를 살 수 있다.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 기사장과 레종 도뇌르 기사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그의 책 중 한국에서 3번째로 소개된 책이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이하 <고정관념>)인 것.

 

 

▲파스칼 보니파스의 트위터 메인 캡쳐.

 

그의 전공을 살려 써오던 방향을 살려 쓴 책이지만 친절한 책은 아니다. 책의 구성과 전개방식 모두 그렇다. 우선 목차구성이 뒤죽박죽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크게 미국과 중동국가의 관계, 테러, 강대국과 약소국의 외교문제에 관한 것인데 여기저기 섞여 있어 한자리에 앉아서 읽기보다 잡지의 에세이처럼 한 꼭지씩 읽는 것이 효율적이다.

 

책에 소개된 고정관념들은 대부분 중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 대한 지나친 기대, 중동국가들에 대한 몰이해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 꼭지의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분쟁이나 국제적 불행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지정학적 관계 때문이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그 정치적 지정학적 요소가 무엇인지 설명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저자가 쓴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가 지도와 지표를 이용해 국제관계를 설명한 책이라고 하는데, 마치 그 책의 ‘맛보기용’처럼 느껴질 정도다.

   

국제관계에 무관심한 사람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고정관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게다가 여기서 소개하는 고정관념들은 널리 알려진 통념보다 한번 비틀은, 꽤 진보적이라 말할 수 있는 생각들도 있다. ‘UN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일어났다’, ‘세계는 진보한다’, ‘내정간섭은 진보적 생각이다’,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이들은 레지스탕스다’ 등의 챕터가 그렇다.

 

처음 접하기엔 진보적이라 느껴지는 이와 같은 고정관념이 사실은 위선적이며 강대국의 기만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는 것을 활자로 확인하는 일은 꽤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말이다.

 

석유 수익만 가지고 따져보면 사담 후세인과 다시 협력을 시작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하고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후세인은 아마도 이라크를 압박하는 제재조치와 무역금수 조치를 끝내는 대가로 필요한 만큼의 석유를 미국에게 인도할 것을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45p)

 

기술의 진보가 그 자체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은 것들이 정치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정보 기술은 지식과 통신의 지방 분산화를 한꺼번에 가능하게 하지만,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을 더욱 틀에 가두는 감시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56p)

 

국제관계에 대한 교육이나 국제 뉴스가 빈약한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얼마나 서구의 시각으로 문화를 바라보았는지도 새삼 느끼게 된다.

 

광고나 포르노는 무슬림 세계에서 여성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되며, 서양 세계에서는 얼굴을 가리는 베일의 착용이나 일부다처제가 여성권리 침해로 여겨집니다. (104p)

 

미국이나 일본, 몇몇의 유럽국가 외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한국의 교육과정과 국제 뉴스의 탓이 클 것이다. 그렇기에 <고정관념>에서 아무리 겉핥기 식으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접하고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어나간 다면, 이 책은 하나의 탄탄한 시선을 수혈하는 역할은 하는 셈이다. 이 책의 주장들을 하나하나씩 반박할 거리를 찾거나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명하다.

 

하나의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것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며,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것을 정당화하는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암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재앙 같은 질별과 싸우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111p)

 

그의 말대로, 이 책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니 말이다.

 

 

 

 


 

 


 

 

911테러가 국제관계의 구조 자체를 흔들어놓은 것은 아닙니다. 강대국 간 힘의 관계는 바뀌지 않았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동맹국을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히 했습니다. 혹독하게 당하기는 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그들의 힘이 약해졌다면, 그것은 바로 이라크 전쟁의 끔찍한 결과 때문입니다. 그것은 911테러에 대한 엉뚱한 보복이었습니다. 32p

실제로 권력이 어떤 중대한 문제에 관해 거짓말을 하게 되면, 다른 모든 문제들도 의심을 받게 된다. 53p

인류의 6분의1이 전세계 부의 6분의 5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균형의 재조정은 불가피합니다. 76p

미국의 우월적 위치 때문에 세계는 다극화되지도 못합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을 "미국 없이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미국 홀로는 어떠한 국제적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85p

강대국들은 약소국이 무기들을 갖춘 후, 강대국을 위협하거나 약소국에게 유리한 쪽으로 힘의 관계를 조정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93p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 9.11테러 당시 <르몽드>지가 뽑은 1면 기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이렇게 테러 공격의 효과와 그 성공은 무엇보다도 심리적 측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더구나 산업 열강은 수십 년 전부터 안전하게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기에 더욱 고통스럽게 9.11테러를 받아들였습니다. 100p

프랑스를 포함하여 전쟁에 반대한 나라들이 사담 후세인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경제교류를 가장 활발히 진행하던 1980년대 말까지 후세인의 탄압은 가장 극심했습니다. 147p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 장군은 전쟁에 뛰어든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민주주의 강대국의 대표인 미국은 자신들의 가치와 국익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 모험에 정기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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