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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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줄 알았던 우울증은 종종 뉴스를 접한 후 다시 도졌다. 의료사고 피해자의 실상, 경영상의 어려움을 꾸며낸 회사가 저지른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 두 뉴스를 연달아 접한 뒤였다. 우울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디서 기분 나쁜 것들만 모아놓곤 뉴스라니.

 

한 웹툰이 떠올랐다. 푸드 파이트에서 승리한 한국인에 대한 뉴스를 신문 구석에 박아 놓았다고 투덜거린다. 그의 독백은 책 <뉴스의 시대>에서 보여주는 알랭 드 보통의 성찰 못지않다.

 

TV 뉴스는 늘 그런식일까? 왜 늘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섭고 슬프고 한심하다고 얘기하는 걸까? 왜 언제나 과장된 오프닝 음악과 경직된 얼굴로 그날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우울한 사건사고들을 헤드라인으로 소개하는 걸까? 왜 일방적으로 문제와 의문만 무책임하게 내던지고 대답은 회피하는 걸까?’ (<오무라이스 잼잼> 45화 가운데, 조경규)​

 

조경규의 <오무라이스 잼잼> 45화  가운데 캡쳐. (다음 웹툰)

여기에 알랭 드 보통은 답한다. 흉악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을 뉴스를 사람들이 찾는 이유를 말해준다.

 

이런 사건들은 분명 말도 안되는 일인지라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상적이고 축복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나면 예측 가능한 일상의 쳇바퀴 앞에서, 우리의 이상한 욕망을 우리가 정말 단단히 비끄러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동료를 독살하거나 친척을 안뜰에 묻어버린 적 없는 자신의 자제심 앞에서 안도한다. (<뉴스의 시대> 16p)

 

책의 제목은 뉴스의 시대’, 원제는 ‘The News: The user’s manual’이다. 뉴스의 시대가 오게된 역사적 설명보다는 원제인 뉴스 보는 법에 가깝기에 한국어판 제목보단 원제가 낫다는 말이 많다. 뉴스를 정치, 해외, 경제, 재난, 셀러브리티, 소비로 카테고리화 한 뒤 각각의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각 뉴스의 임무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뉴스를 자주 보고, 만들어본 자들이라면 식상한 설명과 임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다. 사실 즉 중립을 위한 뉴스보다는 관점이 있는 뉴스를 제공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만을 제공하는 뉴스가 아니라 카테고리화된 뉴스, 뉴스를 삶에 적용하게 만드는 뉴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핵심은 계속 강조된다. 효율적인 독재는 뉴스검열이 아니라 사실만을 나열한, 파편화된 뉴스 제공이라고 말하기까지 할 정도다.

 

민주정치의 진정한 적은 다름아닌 뉴스에 대한 적극적인 검열이라고 여기기 쉽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시대>, 37p)

 

이 책의 탁월한 지점은 뉴스의 시대에 대한 설명이나 뉴스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혹은 뉴스의 임무에 대한, ‘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그 때는 바로 뉴스가 불러들이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각종 뉴스들은 우리에게 분노, 슬픔, 숭배, 질투,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불어 일으킨다. 우리가 뉴스를 보는 이유는 사실 이 감정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다. 이 감정들을 느끼고 분출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그 감정에 대한 분석, 그 감정을 뉴스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다.

 

가령 우리는 정치뉴스에서는 분노를 느낀다.

 

뉴스는 분노에 찬 반응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뉴스는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정당한 수준에서, 저당한 시간동안 화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건설적인 기획의 일부가 되도록 말이다. (<뉴스의 시대>, 66p)

 

유명인에 대한 뉴스에선 숭배와 질투가 섞인다.

 

누군가를 동경하려는 욕구는 우리 심성의 뿌리깊고 중요한 특징이다. 무시하거나 비난한다고 해서 없앨 수가 없다. 그런 무시나 비난은 동경의 욕구를 단순히 저 아래로 밀어넣을 뿐이고, 그럴 경우 이 욕구는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미성숙한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부적절한 대상에 달라부기 십상이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사랑을 억압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지적이고 생산적인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뉴스의 시대>, 184p)

 

시기심은 언제나 맹렬한 도덕주의적 비판의 표적이 되어왔지만, 이는 품위 있는 삶에 꼭 필요한 감정이기도 하다. 시기심은 신중해져야 한다는 신호다. 이 감정에는 우리 인격의 혼란스럽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보내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뒤틀린 메시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기심을 주의깊게 응시하는 건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발걸음을 떼는 데 도움이 된다. (<뉴스의 시대>, 197p)

 

재난뉴스에선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삶을 재조정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 속에서 우리가 응당 알고 있는 바대로 삶을 이끌어갈 기회를 부여한다. (<뉴스의 시대>, 233p)

 

이렇듯 알랭 드 보통은 뉴스 그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 뉴스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뉴스가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감정에 대해 말하기. 이는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잘하던 일이다. 그의 최고작으로 뽑히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등이 그랬던 것같이 말이다. 결국 책은 현대인의 감성을 분석한 것이며 현대인의 감성을 빚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뉴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뉴스의 시대 이전에 종교가 사람들의 감정을 만들어냈듯 말이다. 종교가 지배하던 것을 뉴스가 지배한다. 그렇기에 다시, 책 제목은 원제 ‘User’s manual’보다 뉴스의 시대가 맞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의 뉴스 유저들이, 혹은 뉴스를 만드는 언론계가 이 책을 모두 읽는다 하여 알랭 드 보통이 제안하는 적절한 감정을 배출하고 만드는 사회가 될진 의문이다. 마지막 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무차별적인 뉴스가 아닌 개인이 원하는 뉴스만을 보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그러니까 괴로운 정치 뉴스 같은 것에는 비위가 약하고 패션과 연예 뉴스에만 다이얼을 맞추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맞춤 뉴스가 어떤 효과를 발위했을지 상상해보라. ... 또는 협소한 시야를 가진 건 매한가지지만 관심분야는 좀 달라서 국가의 비극에 대해서만 듣고 싶어하느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아와 학살에 대한 이런 배타적인 관심이, 실은 더 잘살지만 대하기는 더 부담스러운 이웃에 관심을 표하지 않으려는, 고상하지만 감정적으로 안이한 변명으로 활용되는 것이라면?(<뉴스의 시대>, 279p)

 

스스로 믿는 것만 보고, 듣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뉴스는 그 믿음을 공고화시키는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엔 철학자 헤겔의 주장이 나온다.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라는 말이. 근대화된 사회. 뉴스가 종교를 대체했지만 뉴스의 진화가, 즉 맞춤형 뉴스는 곧 다시 종교가 뉴스를 대체하는 날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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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듯,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11p)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뉴스는 공적인 삶의 풍조를 조성하고 우리 각자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힘이다. (13p)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하게 퍼져있다. 이를테면 CNN의 슬로건은 ‘여러분께 사실을 제공합니다’이다. 네덜란드의 NRC 한델스블란트는 ‘의견이 아닌, 사실을 전달하는’자신들의 능력을 줄기차게 홍보한다. 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32p)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뉴스 순환 속도가 요구하는 것만큼 빨리 상황을 변화시켜내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67p)

저널리즘은 특정부류의 권력을 감시하는 일만을 자신의 역할로 규정하면서 너무 무던하거나 비겁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저널리즘은 그저 현실의 경찰서나 세무서가 아니다. 저널리즘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안하려는 목적으로 국가적 삶의 모든 사안을 다루는 망명정부다.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77p)

문제는 현대의 뉴스 매체가 발전시킨 보도 방법론(다른 방법은 거의 모두 배제한 채,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신속하지만 비인간적인데다 위기에만 초점을 맞춘 보도 방침)이 일종의 세계화된 배타적 편협함 속으로 잘못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로인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만 그에 대해 실제로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잘못된 종류의 얕은 지식이 우리 호기심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보다 좁혀버렸다. (108p)

우리가 어떤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면, 그 나라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좀더 깊은 흥미를 유발하는 사소한 이미지나 감각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118p)

나는 전쟁이 어쨌든 좋은 게 아니고, 때로 무고한 사람들이 십자포화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외교적 시도도 가려서는 안된다고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한 피로 물든 앙들 앞에서 통곡하는 아버지가 생기지 않도록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대한 전략적 이점 같은 건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138p)

우리는 빼어난 셀러브리티들을 고작해야 소극적인 궁금증이나 엉큼한 호기심에 걸맞은 신비한 유령처럼 대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은 성실함과 전략적 사고를 통해 특별한 위업을 이룬 보통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사례연구 대상으로 삼아 자세히 뜯어보고 엄밀히 분석해야 한다. (190p)

우리는 셀러브리티는 ‘똑같이 따라하는’ 사람을 두고 안쓰러운 가짜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선망에 기초한 모방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훌륭한 삶의 필수 요소가 된다.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것, 성공한 사람의 성취에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안호는 것은 타당한 근거없이 오만하게 자신을 중요한 앎으로부터 떼어내버리는 짓이다. (191p)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는 수시로 사건에 개입하여 감정의 뱡향을 조정하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풍부한 맥락을 부여했다. 코로스는 주인공이 어떤 죄를 저질렀건 간에 그에 대해 엄숙한 조경을 담아 표현한다. 그런 섬세함 덕에 <오이디푸스 왕>공연을 보며 불운한 중심인물을을 ‘패배자’나 ‘정신병자’로 치부하는 관객은 드물었다. 뉴스의 서술방식은 이보다 덜 싱중하다. (221p)

레스토랑으로 먼걸음을 하고픈 표면적인 이유는 우리가 뭔가 간단히 한입 먹고싶어서다. 하지만 우리 욕망의 실질적이고 어쩌면 심지어 결정적일 수도 있는 부분은 보다 덜 밋밋하고 보다 미묘한 심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레스토랑 자체의 가치를 흡수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레스토랑처럼 되고 싶어 한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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