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었나부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눈물이 난다. 혼자 소주라도 한 잔 해야하나. 할 일은 태산이고...



입력:2009.12.12 17:34 

노무현 아래서 군생활을 한다는 것



2009.12.14.월요일

정치불패 강호의주윤발

 

부모님의 눈물과 여자친구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보무 당당히2004년 시작의 그 때 강원도로 입대를 했다. 나는 좀 돌아이 기질이 있어서 내가 군인이 된다는 사실에 너무 뿌듯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근데, 어라. 이러저러 하다보니 난 충주의 경찰학교에서 전투경찰로 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래. 착출된거다 ㅡ.ㅡ;;

 

진압중대에 배치받고 정신없이 얻어 맞고, 정신없이 욕 먹고, 정신없이 갈굼 당하다가 보름 만에 첫 시위진압에 나섰다. 그 닭장차 안에서 이뤄지는 수 많은 구타들과 분위기에 감상 따위는 없이 그냥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느낌으로 첫 시위현장에 도착했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쇠파이프로 얻어 맞는 고참들을 지켜보며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는 '죽음의 공포'를 대면했다. 저 멀리 방송차에서 들려오는

 

"철의 노동자~~" 

 

눈 앞에는 마스크 쓴 아저씨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런 지옥불 같은 상황에 내가 왜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첫 시위현장을 경험하고 부대로 복귀하면서 닭장차 안에서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풀어 주니까 긴장을 안한다"는 말로 고참에서 중간으로 중간에서 막내로 계속 퍽퍽 소리가 났다. 부대에 도착하니 바로 훈련..

 

말이 훈련이지 몇 시간을 연병장 뛰면서 고참들에게 얻어 맞는게 훈련이다.

 

대략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대부분의 전의경들은 노동권, 진보에 대한 적개심이 커 진다.

 

나도 초반에는 그랬다. 우리가 먼저 때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가만히 서 있는데 와서 몽둥이 찜질을 하고 조금이라도 정당방위하면 "폭력경찰 물러가라"며 난리가 난다.

 

중대장도 소대장도, 무전으로 듣는 그 높은 현장지휘자도 대부분

 

"시위대한테 말하지 말 것", "인내진압", "성추행 시비 붙을 모든 진압 금지" 등등..

 

지휘부는 전의경에게 일방적 인내를 지시했고 거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조심하는..

 

한 두달에 한번은 경력(군대의 병력)보다 시위대의 숫자와 폭력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안전하게 막을 수 없는 데모가 발생했다. 이런 날도 많은 경우

 

"공격적 진압"을 할 수 없었고 출동할때 120명이 복귀하면 80명 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부상은 다뤄지지도 않고 시위대 몇명의 입원은 크게 보도 되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찰은 맞아도 관심 받지 못하는..

 

짬밥이 안될때는 군기에 숨도 못 쉬고 새벽부터 밤 까지, 때로는 숙영을 하면서 때로는 닭장차 안에서 몇일을 보내는 일이 계속 되니까 시위대에 대한 적개심만 가득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나도 고참이란게 되고 두명이 나를 쇠파이프로 때려도 방패로 거뜬히 막을 수 있는.. 써먹지 못할 경력이 쌓이고 나니 슬퍼지기 시작했다.

 

 "왜 진보는, 왜 노동권은 아직도 쇠파이트와 죽봉을 흔들어 대는가??"

 

어떤 날은 시위가 너무 격해서 현장 지휘부에서 시위대에 공격적 진압을 하고 흩어버리고 몇명을 연행하라는 지시가 떨어 졌다. 옆에서 피흘리며 주저 않은 동료와 장시간의 폭력에 독이 올라버린 대원들은 "공격 앞으로"를 외치며 튀어 나갔고 결국 5명 정도를 잡아서 경찰서로 보냈다.

 



 

시위대도 해산되고 우리는 부대로 복귀하는 닭장차에서 눈을 감았다.

 

무전기 : "띠리리~ xx중대 xx경찰서 정문 상황 출동"

 

닭장차에서 씨바씨바 욕이 튀어나오고 현장에 도착했다. 아까 그 민주노총 깃발을 흔들던 그 무리가 그대로 경찰서 앞에 와서 닫혀있는 철문을 부수고 있었다. 폭력경찰 물러가고 연행자 석방하라며 경찰정문을 부수고 페인트를 뿌리고 불을 붙이고 난장판이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찰서 정문에 방화 해도 문제가 안되는..

 

늦은 밤이 되자 시위대가 박수를 치면서

 

"민주노동당 누구누구 의원님이 지금 내려 오신다"며 우리에게 조롱을 보내고 정말 거짓말 처럼 우리는 닭장차에 타서 사람들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이동하고 연행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민노당 국회의원 온다고 하면 경찰이 바로 꼬리내리는..

 

제대를 얼마 안남기고 여의도에서 농민대회가 있었고

이전과 비슷한 지옥의 하루를 보냈다. 쇠파이프 돌맹이 각목을 막아 가며 그 수 많은 농민과 전문 데모꾼들에게 둘어 쌓여 후임병들이 쓰러져가는 걸 봐야했다.

 

그 넓은 공간에서 벌어진 "활극"은 전의경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시위대는 두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사건으로 번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나중에 알았다.

 

과연 사과할 일인가?  아니다.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누구도 경찰을 그렇게 죽도록 때려도 된다는 권리도 없고 우리가 죽을때 까지 맞고만 있어야할 의무도 없었다.

 

당시 전경인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대후 읽은 대통령 사과전문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만.

 

근데 노무현 대통령은 사과를 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했던 박준형 경찰총장은 사퇴하게 된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사고가 생기면 대통령이 사과하는..

 

농민대회 다음 날이던가 .. 우리는 중대원 30여명을 병원에 두고서 나머지를 끌어 모아 부산으로 갔다. 삼국지 "장판교"의 대결처럼 에이펙 정상회의 장소로 들어가는 다리를 막아섰고 시위대와 우리 사이에는 컨테이너가 막고 있었다. 컨테이너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공포와도 같은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컨테이너 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압중대들은 각자 고유의 구호를 외치며 서로 기죽지 않겠다는 긴장감을 표현했다.

 

결국 컨테이너는 시위대가 준비한 갈고리에 바다로 떨어졌고.

 

컨터이너가 바다에 떨어지는 소리 들어 본적 있는가? 꽤 무섭다.

 

눈 앞에서 컨터이너 위에서 물을 쏘던 대원이 아스팔트로 추락하는 것을 봤다. 곧 죽봉이 날아들었고....

 

이렇게 전쟁터에서나 자주 등장한다는 아드레날린의 흥분을 실컷 겪고나서 나는 제대를 했다.

 

나는 왜 나의 군생활을 이야기 하는가?

 

너무도 명예롭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안그랬는데 지나보니까 그렇더라. 우리는 인내했고,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둔 공권력 최말단의 비극이었고 이 비극은 나에게 명예로 남아 있다.

 

권력이 극단적인 물리력으로 대드는 세력에 대해서 인내하고 관용한다는 것.

세상에 이것 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는가?

 

'약자에게 약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한다. 그걸 때로는 정신승리법이라도고 부른다. 지금은 아무도 쇠파이프를 들지 않는다. 아무도 중앙매체에 나와 대통령을 조롱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들만의 골방같은 매체에 갇혀 자신을 기만한다.

 

"이명박 정권이 불쌍하다"

 

"2년을 못넘길 것이다"

 

노무현정부에 쇠파이프를 들고 저항했을때는 분명 대의가 있었을 것이다.

대의가 살아 있으면 권력의 탄압이 강해지면 저항도 같은 강도로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쇠파이프들고 노무현퇴진을 외치고 노무현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들끼리 토론회랍시고 모여서 정신승리의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명박은 노무현 시즌2일 뿐이다" 이렇게..

 

내가 지옥같았지만 명예스러운 군생활의 끝에 내린 결론은 진보, 보수의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 이게 결론이다.

 

세상을 가진 권력은 약자에게 약해야 한다.

세상을 바꿀 진보는 강자에게 강해야 한다.

 

이 원칙만 있으면 민주주의, 개혁은 자동으로 이루어 진다.

 

우리 자기기만은 그만하자. 현실적인 권력의 방향은 한나라당의 장기집권을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데 겨우 세상에 한 발짝 나온 유시민을 표적 삼아 

"다시 노무현으로 돌아가는게 옳은거냐?"

라며 개꿈 꾸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이명박에게 가혹해도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를 막지 않는다. 왜냐면 "강자한테 약하"거든.. 그걸 또 인정하기 싫으니까 자기들끼리 모여서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똑 같다" 며 서로 공감하고 등 두드린다.

 

기만적인 이런 부류들이 다시 "약자에게 약한" 관용의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양지로 나와 쇠파이프를 들고, 모욕의 펜대를 들고 "관대한 권력"을 조롱할 인간들이다.

 

사회를 발전시키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건 각 개인의 인간적 성숙, 인격이다.

 

먼저 우리의 격이 얼마나 낮아서 강자에게 약하면서 또 그걸 기만하는 자기연민에  흠뻑 빠져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명박정권의 억압에 행동으로 항거하지도 못하는 지금,  나는 내가 너무 부끄럽고 처참하다" 

 

여러분들은 안 부끄러운가?

다들 어찌 그리 당당하신가 모르겠다.

 

난 부끄럽고 처참하다.

입력:2009.12.12 17:34 강호의주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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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본명(本名)을 불러주자

-도적, 먹튀, 분식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집약하는 가장 정확한 수식어는 무엇일까? 민주, 진보, 개혁으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수식어는 아마 ‘신자유주의’와 ‘독재/반민주’일 것이다. 전자를 주로 쓰는 사람들은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오십보백보로 본다. 당연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보니 이명박 정부를 ‘토건형 신자유주의’로, 참여정부를 ‘어정쩡한 신자유주의’ 혹은 ‘좌파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적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다. 한편 ‘독재/반민주’는 많이 사용되지 않는 수식어다. 독재/반민주의 전형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기본 상식을 무참하게 짓밟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집약하는 정확한 개념이 없다 보니, 동일한 개념을 표현만 살짝 바꿔서 사용하곤 한다. ‘일방적 국정운영’ ‘밀어붙이기식 행태’ ‘핍박과 배제의 정치’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방적’과 ‘밀어붙이기’라는 개념은 비판자들의 의도와 달리, 과단성 있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기대하고 이명박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지지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측면이 있다.

 

인간의 추상(抽象) 능력을 통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름)은 본래 특정 측면은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버리는 편광안경이다. 따라서 개념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것을 포착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버릴 수 있다. 그래서 개념이나 언어에 의해 마음이나 사고가 결정지어지고, 더 나아가 정치사회적 현상은 재창조된다. 2000년과 2004년 연이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를 분석한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로 유명해 진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박사는 인간의 인식과 사고(연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언어(개념)의 이런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프레임’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레이코프 박사에 따르면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로서, 이를 재구성한다는 건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는 동양권에서는 그리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냐’고 물었을 때, “반드시 名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하여, 정치에 있어서 正名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공자나 레이코프 박사가 뭐라고 했는지 알지 못해도, 이들의 통찰은 이미 한국 정치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낙인 찍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보수를 ‘신자유주의’ ’일방적’ ‘밀어붙이기’니 하면서 별로 설득력도 파괴력도 없는 낙인을 찍는 동안, 보수는 진보에 대해 ‘좌파’ ‘친북’ ‘무능’ ‘급진’이라는 낙인을 찍어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물론 이런 낙인들은 결코 사실에 부합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오랜 편견에 호소하고, 무엇보다도 보수 절대 우위의 언론 환경으로 인해 국민들의 뇌리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명박 정부와 보수 세력을 어떤 개념 내지 프레임으로 집약해야 할까? 한마디로 어떤 낙인을 찍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진보에 절대 불리한 언론 환경으로 인해 이 낙인이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아가 이 낙인은 때와 조건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과 행태를 통일적으로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은 실체적 진실에 부합되지도 않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가지 얼굴을 모순 없이 설명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개념조차 제각각 이다. 고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규정하는 진보좌파를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작은 정부 사상’을 핵심으로 한 부자를 위한 정책, 시장의 강자를 위한 정책으로 규정하였다. 반면에 진보좌파들은 신자유주의를 ‘워싱턴 컨센서스’가 강조한 개방화, 규제완화, 민영화 정책 패키지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엄청난 적자재정과 추경예산을 통해서 정부예산을 대폭적으로 늘리고, 부채에 기대어 공기업 예산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다. 한술 더 떠서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10조원이 넘는 국책사업예산을 수자원공사, 철도공사 등 공기업에 떠넘기는 일종의 ‘분식 회계’도 감행하고 있다. 표리부동, 분식회계, 정보차단(불투명성 선호), 면종복배 등으로 표현되는 사기적 수법은 이명박 정부의 체질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인 작은 정부 사상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개입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집권초기에는 52개 중점 관리 품목을 설정하여 박정희식 지도단속을 통한 물가안정을 추구하였다. ‘MB물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한편 재벌대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유무형의 규제, 처벌권으로 압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간판 상품이 규제완화 인데, 이를 실행하기는커녕 가장 나쁜 초법적, 탈법적, 자의적 규제를 휘두르고 있다. KT•SK•LG 같은 굴지의 대기업에 대해, 일개 청와대 행정관이 250억 원의 기금 출연을 감히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수틀리면 기업을 혼내 줄 다양한(초법적, 탈법적, 자의적) 수단이 있고, 그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패거리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KBS 신태섭 이사와 정연주 사장을 몰아낼 때 보여준 황당한 행태, 노전대통령에 대한 지극히 편파적이고 야비한 수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대한 국정원 의 소송 등은 이명박 정부와 한국의 자칭 보수 집단의 야만성, 폭력성, 몰염치성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면서도 기업 경영권 시장을 왜곡하는 포이즌 필(Poison Pills) 제도를 도입하여 적은 지분으로 많은 기업군을 지배하는 몇몇 재벌들의 이해와 요구에 복무하고 있다. 친기업과 친시장을 완전히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주도 그룹과 핵심 지지층 자체가 권력을 통해 차지할 수 있는 각종 이권 추구에 익숙한 집단이다 보니 갖가지 방식으로 자리와 이권과 재정을 털어먹고 있다. 단적으로 기업, 금융기관의 기부금과 휴면예금을 합쳐서 총 2조원의 재원으로 ‘미소금융’재단을 만들어 그 운영권을 능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는 측근들에게 넘겼다. 자산 8천억 원의 삼성장학재단의 이사장 자리도 비상식적 무리수를 두면서 측근에게 넘겼다. ‘국민 부담률(GDP대비 세금+사회보험료의 비중) 감하’와 ‘부자 감세’야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인데,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를 하긴 하는데, ‘국민부담률’ 상향과 ‘서민중산층 증세’를 밀어붙이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하는 일은 신자유주의와 멀어도 너무나 멀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와도 한참 멀다.

 

냉철하게 보면 이명박 정부와 한국 보수 세력의 다양한 행태를 관통하는 것은 아프리카 후진국식의 도적 정치, 먹튀 정치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자리를 철저히 자기 패거리에게만 배분하고, 다른 군벌이 쳐들어오기 전에 장갑차, 기관총을 앞세워 최대한 먹고 튀는 것이 아프리카식 도적 정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도적 정치는 정신-공동체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같은 패거리가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자주의-은 그들과 동일하나 방법은 숱한 변칙, 편법과 정보 숨기기, 분식 회계 등이다. 우아한 도적 정치라고나 할까? 이명박 정부에게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자. 원래 분식에 능한 정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한 때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화장까지 시켜 우아하게 단장시켜 줄 필요가 없다. 암만 뜯어봐도 도적, 먹튀, 분식 이라는 수식어를 빼놓고 그 이름을 지을 수 없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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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대안]이 진짜로 희망과 대안이 되는 길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대선, 총선, 지방선거 같은 큰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판이 크게 요동친다. 정치인과 정치조직들의 이합집산, 간판 바꿔달기, 리모델링, 새로운 인물 및 정치세력(조직)의 등장 등이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국민들의 비판적 안목이 높다. 기대, 요구 수준도 높다. 경제, 사회 환경은 급변한다. 반면에 환경의 변화에 조응하여 제도와 리더십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는 정치는 둔감하고 무능하다. 그러다 보니 현실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 당연히 큰 선거가 다가오면 새로운 인물과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가 분출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을 수십 년째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는다. 국민들의 고통, 불만과 기대, 요구가 잦아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을 배경으로 1987년 이후 20여 년에 걸쳐 범 진보 인사; 재야.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 민중운동(노동.농민.빈민운동 등) 출신 인사,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이 수혈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현실 정치권으로 들어왔다. 거의 실패하긴 했지만 종교(주로 기독교)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최근 20년 동안 범진보(재야, 민중, 시민운동)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현실 정치 진출 시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시도는 민주노동당과 개혁당 실험 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진출해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노무현, 이해찬, 유시민,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오세훈, 이재오, 원희룡 등이 아닐까? 범 진보의 정치사회적 위신이 전반적으로 실추된 가운데 상대적으로 그 위신이 덜 실추된 존재가 바로 [희망과 대안]에 이름을 올린 시민운동 지도자들 일 것이다.



비어있는 거대한 정치공간

한편 2007년을 전후해서는 범 진보 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기업인 및 수도권 화이트 칼라(사무, 관리, 기술, 전문직, 예비 화이트 칼라=청년세대)의 사고와 정서가 이명박, 문국현, 손학규 등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분출되었다. 이 민심은 2002년에는 노무현으로 크게 쏠린 흐름이었다. 2009년 현재는 이명박, 문국현 등의 실망스런 행보로 인해 어디론지 증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적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먹장 구름이 되어 한국 상공을 떠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에 빗대어 얘기하면, 바로 이 계층이 촉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형주와 익주(서촉)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땅은 위나라에 비유할 수 있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진정한 중도실용을 실천하여도 차지할 수도 있고, 오나라에 비유할 수 있는 민주당이나 이른바 친노세력이 환골탈태하여도 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도자의 립서비스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지만, 역사와 전통에 빛나고(?), 관성도 강하고 정치적 기득권도 큰 세력의 변신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Swing Voter(벤처중소기업가, 지식근로자)를 촉나라에 비유하다 보니 그 계층이 적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한국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여기에는 공정 경쟁(기회), 공평 보상, 투명 사회, 경제사회적 활력, 생산적 복지,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등이 포함된다-을 선도하기에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3비층(취약계층)의 이해와 요구도 가장 잘 대변한다. 요컨대 앞에서 말한 Swing Voter는 캐스팅 보트(Casting Voter)여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표심 그 자체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정치 지형이 이렇기에, 이 땅의 임자가 될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는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정치 관여 시도가 주목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범 진보 친화적 국민들은 [희망과 대안]을 기대 섞인 눈으로, 범 보수 친화적 국민들은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후자의 우려는 창립 총회장에서 벌어진 극우 몰상식 노인들의 난동과 동아일보 등 극우 언론의 비난으로 표출되었다. 이는 최근에 출범한 범 진보 정치조직 혹은 준정치조직 창립식에는 없던 일이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시도가 그 객관적인 능력,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판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운동의 오래된 관성과 [희망과 대안]의 창립취지문 및 운영원칙(안)을 보면 과연 범 진보가 기대하는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점이 좀 있다. 본론에 앞서 내 개인 얘기를 좀 하면, 사실 나는 삼십 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십 대 초에 또 한번 경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경계선을 넘나들다 보니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 세계에 대해서 약간은 객관적으로, 상대화시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넘나드는 세계는 대충 이렇다. 이공계-인문사회계, 블루칼라-화이트칼라, 엔지니어-사무관리직/CEO, Specialist-Generalist, 실천가-이론가, 현실정치-시민운동, 기독교-불교 등. 내 이념적 정체성도 형용모순적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좌파신자유주의, 우파사민주의, 전투적 중도주의 등.



협소한 관심 영역과 이상주의

시민운동과 현실 정치 사이에는 건너기 쉽지 않은 큰 강이 놓여 있다. 단적으로 시민운동은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 한 두 개만 배타적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정치는 수많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모순된 가치들의 타협, 절충을 도모한다. 그래서 정치를 ‘서로 상충하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권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는 정치에 관여하려고 하는 시민운동 지도자들로 하여금 관심.학습 영역의 대폭적인 확장을 요구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적으로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역사가 오래 됐고, 정책역량도 좀 있지만 그 기업의 경쟁력의 핵심을 쥐고 있는 화이트 칼라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기업 경영에 대한 이해도, 금융 시장에 대한 이해도, 전후방 가치생산 사슬(협력업체)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좀 알았다면 쌍용차 노조가 그렇게 과격한 투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비참하게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 내부의 엄청난 분화와 격차에 대한 이해도, 노동을 넘어 3비층에 대한 이해도 일천하기 짝이 없다. 나는 관심의 폭과 깊이에서 노조운동과 시민운동이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민운동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계층을 만나고, 물질적 기득권도 별로 없기에 변신이 쉬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민운동이 이상주의적 잣대를 가지고 최선을 추구한다면, 정치는 차선 혹은 차악을 추구해왔다. 헌법개정에 대한 태도로 말하면, 정치는 주요 대권주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정치세력간의 정치적 역관계 등을 고려하여 원포인트 개헌 혹은 권력구조에 국한된 개헌을 현실적인 최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시민운동은 대체로 ‘충분한 국민적 숙의’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이상적인 개헌을 요구한다. 선언적 의미 이상이 없는 헌법상의 기본권 강화에 집착하고, 개헌이 필요한 조항을 한꺼번에 다 개정하자고 한다. 정치적 역관계상 불가능한 진보적 색채가 짙은 헌법을 만들라는 요구도 빼놓지 않는다. 이는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복지관련 법.제도 등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물론 이것이 시민운동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명분을 중시해 온 한국인의 성정을 많이 빼 박은 한국 시민운동은 더 완강하게 명분과 원칙에 집착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의 실질적인 변화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대중 전대통령이 ‘정치인은 선비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조화가 정치적 승패의 관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인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고, 세속적이고, 약삭빠르고, 때론 교활한 존재이다. 오죽했으면 선비의 나라인 조선이 직업의 귀천을 士農工商 순으로 정했겠는가? 오랜 시민운동가처럼 선비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체질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20대 초 중반에 보았던 그 많은 훌륭한 선배, 동료들이 현실 정치판에 거의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후진적 국민층

시민운동이 건너기 힘든 큰 강은 이뿐 아니다. 시민운동이 국민들의 이상과 이성에 호소한다면, 정치는 국민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민운동이 호소하는 대상이 매우 이성적이고, 비판적이고, 교양 수준도 높은 선진적인 국민층이라면, 정치가 주요하게 의식해야 할 대상은 1인 1표인 이상, 지역주의(연고주의)나 비이성적인 공포에 현혹되고, 비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후진적인 국민층이다. 시민운동이 이상과 당위를 설파한다면, 정치는 재정적 제약, 유관 법.제도적 제약, 문화적 제약, 정치적 제약, 이른바 民度 등 오만 가지 제약 조건을 고려해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정치가 후진적인 국민층을 주요하게 고려하다 보니 선진국 조차도 정치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 수준이 바닥을 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선진국에 비해 사회적 신뢰 수준은 더 낮고, (정치에 대한) 언론의 편파, 왜곡, 폄하도 심하고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하나같이 명분에 집착해 온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의 신뢰 수준이 바닥 중의 바닥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독야청정 하려고 해도 박연차 같은 사람이 정치인의 코를 꿰려고 돈 뭉텅이를 들이민다. 정치 자금과 생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지극히 협소한 상황에서 이 유혹은 결코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가족들은! 또한 (문국현 재판에서 보았듯이) 검찰, 법원, 선관위 등도 권한 확대 차원에서 법을 매우 엄격하게 들이댄다.



한편 시민운동이 정치판으로 나오면 같이 하게 될 현실 정치인들의 상당수는 대체로 안면몰수, 뒤통수 때리기, 말 번복하기, 약속 뒤집기, 위에 올려 놓고 밑에서 흔들기, 헤게모니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등이 난무하는 현실 정치판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다. 따라서 심리와 행동이 정치 초보자와 같을 수가 없다. 살면서 보니 이런 저런 일로 크게 상처받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이 뒤틀리지 않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현실 정치 경험자들을 물리치고, 순결한(?) 사람들끼리 정치하려면 문국현처럼 형편없는 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정치 하지마라

이래저래 한국 시민운동 지도자와 한국 정치지도자 사이에는 선진국 보다 훨씬 건너기 힘든 큰 강이 가로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 3월 4일 故노무현 대통령이 쓴 ‘정치 하지 마라’라는 글은 그 큰 강의 존재를 말해 준다.



“‘정치, 하지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중략) 정치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정치에 바쳐야 합니다. 정치를 위하여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정치에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리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고는 이 길을 회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습니다.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도 사람들의 비난, 법적인 위험, 양심의 부담,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한국에서 시민운동 지도자들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만큼 절실히 필요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범 진보의 빈 구석 채우기

다 아는 얘기지만 정치는 망가질 각오를 한다고 해서, 또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 민주노동당 등이 열심히 안 해서, 혹은 까마귀 노는 곳을 백로들이 회피해서 오늘날의 문명역주행 사태가 도래한 것이 아니다. 핵심 패인은 국가경영 실력(컨텐츠, 리더십, 조직) 부족이다.



지난 몇 년간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민노당 등 현실 정치권만 떡수를 둔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 진보 언론, 진보 지식사회 등 범 진보 전체가 이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범 진보를 분열과 대립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주요한 정치적 쟁점-지난 대선, 총선 평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등의 행보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한 깊은 성찰도, 튼실한 합의도 없다.





담론 측면에서만 봐도 시민운동을 포함한 범 진보가 결여한 담론이 한 둘이 아니다. 예컨대 박정희 패러다임과 김대중 패러다임을 넘어선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플랫폼)이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은 (현실 정합성은 없어도) 나름대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 북유럽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범 진보 특유의 일자리/산업/중소기업 정책도 없다. 일자리 정책은 대체로 복지 정책의 결과로 다뤄진다. 이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부자에게 혜택을 많이 주면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빈자의 소득도 올라간다는 얘기처럼 헐렁하다. 또한 이명박, 오세훈, 김문수가 재미 보고 있는 국토/수도권/서울을 대상으로 한 공간 디자인 전략도 없다. 진보 특유의 공공부문 개혁 담론도 없다. 증세, 공공부문 확대, 구조조정 반대가 주다. 헌법,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혁 방안도, 사법개혁 방안도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업그레이드 된 균형발전(지방발전) 정책도 나올 때가 됐지만 없다. 단지 세종시 원안 사수가 전부처럼 되었다.

그리고 좋은 정치의 기초인 미래학(인구, 재정, 교육, 산업/기술, 기후.환경.에너지.자원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너무나 취약하다. 교육, 보건 의료, 복지, 노동 등에서는 좌파적 담론은 무성하지만 범 진보의 정책적 컨센서스는 잘 형성되지 않는다. 범 진보가 대체로 공유하는 정책적 컨센서스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시민운동이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강은 너무나 크고,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험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민운동이 이 강을 건너야 하고 이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희망과 대안] 창립선언문에서 말했듯이 ‘이 위기의 상황에서 국민이 기대고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제대로 된 대안이나 전망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망적 상황은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으며, 단순히 특정 정당 정파에 대한 반대나 지지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고, 더 심화시키기 위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적 요구 외에도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약점이 많아도 시민운동과 그에 친화적인 세력들이 비어있는 거대한 정치 공간을 차지할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민운동은 공직에 선출되면 좋고, 설사 선출되지 못해도 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시민단체)과 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선출직 공무원 배지를 달지 않으면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잼병이고, 일상 정치활동이래 봤자 (팬클럽, 정당, 언론사 등) 홈페이지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것 전부인 취미가 ‘정치 관여’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는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다.



[희망과 대안]이 모든 제약 조건을 극복하고 진짜로 범 진보의 희망과 대안으로 거듭나 주기를 기대한다. 이 관건은 한국 정치, 좁게는 범 진보 정치가 결여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일 것이다. 그 출발은 한국의 열악한 정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아닐까? 知彼知己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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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碑文 유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는 노대통령을 민주투사나 열사로 가뒀다.

김 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인터넷 댓글 쓰듯이 오래된 단상을 써 볼까 한다.

솔직히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가 맘에 안 든다. 목에 자꾸 걸린다. 이는 지난 6월 말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가 비문을 확정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누그러지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그 위원회에 관계했다면 아마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문장(말씀)이나, ‘원칙과 상식’이나 ‘거짓, 양심, 사랑, 자유, 행복’ 등이 들어있는 문장(말씀)을 강추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더 본원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음각된 비문은 풍부하고 생명력도 긴 노대통령의 삶과 정신을 민주투사라는 틀에 가두었다는 느낌을 준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나 링컨 대통령이나 ‘마틴루터 킹’ 목사의 정신처럼 다수 국민들이 몇 대에 걸쳐서 공유하고 체화할 노무현 정신을, 민주화 운동 관련 훈장을 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투쟁이 시대적 과제인) 당대에만 사용하는 불쏘시개로 사용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개념은 현실이나 실체를 추상하여 만들어졌다. 추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은 한자 뜻 그대로 특정 측면 혹은 주요한 측면은 뽑아내고 나머지는 버리도록 한다. 따라서 개념에 의해 마음이나 사고가 결정 지워지게 된다. 사물, 특히 정치사회적 현상은 개념에 의해 재창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정치사회 세력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한에는 ‘혁명과 건설’이라는 단어가 홍수처럼 흐른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와 미제로부터) ‘해방과 통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혁명과 건설’이나 ‘해방과 통일’을 시대정신으로, 즉 민족적, 국가적, 당적 최상위 과업으로 놓게되면, 평범한 인민들의 다양한 세속적 욕망들이 잘려나가고, 짓눌릴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욕망이자 가치인 자유와 행복이 짓눌려 버리기 십상이다. 가치 전도가 일어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한편 ‘혁명과 건설’이나 ‘해방과 통일’은 역사와 현실을 통찰한 선지자(?) 내지 엘리트들이 그 내용(의미)를 결정한다. ‘자유와 행복’이라면 그 의미를 개개인도 충분히 부여할 수 있기에 아무리 무식한 인민이라 할지라도 할 얘기가 넘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혁명과 건설’에 관해서는 이 내용(의미)를 깊이 이해한 수령, 당, 간부들로부터 지도 내지 교시를 받아야 한다. 더욱이 ‘혁명과 건설’을 최상위 과제로 올려놓으면 자동적으로 자유도, 행복도, 도덕도 다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된다. 인간의 무한히 다양하고 싱싱한 창의, 열정, 욕망이 그 놈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포르말린 통에 처넣어져 박제화 되고, 규격화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문화와 예술은 지극히 경직되고 활력을 잃고 앙상해져 버린다. 이는 북한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한국 진보, 보수는 그 보다는 덜하지만 집단적 가치라는 포르말린 통에 생명, 자유, 행복, 안전 같은 본원적 가치를 집어 넣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 헌법의 위대한 생명력의 근원이자,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힘의 근원은 1776년 7월4일 대륙회의 선언문(일명 미국 독립선언서)에 흐르는 핵심 가치(정신)와 우선순위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중략) 우리는 다음의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이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 아메리카 13개 연합 주의 만장일치 선언)



생명, 자유, 행복, 안전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가치이다.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의미)을 규정할 수 있고, 권력자에 대해서는 부여받은 사명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무기로 쓸 수 있다. 게다가 미국 독립선언서는 정부의 조직 이유를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못 박았다. 한술 더 떠서 이를 보장 못하거나 파괴하는 정부는 폐지하여야 한다고, 이른바 혁명권까지 명시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평범한 인민이 권력자나 지도자에게 들이댈 수 있는 무기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에 시대를 통찰하는 엘리트들이나 휘두를 수 있는 무기(집단적 가치)를 강조해왔다. ‘반공’ ‘조국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민주주의)’, ‘시민주권’, ‘국민참여’ '신자유의 반대' ‘사회통합’, ‘사회정의(이건 내가 특별히 강조한다)’ 등이 그런 것들이다. ‘혁명과 건설’, ‘해방과 통일’, ‘민족 자주’를 주구장창 부르짖는 북한은 특히 심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진보, 보수가 공히 집단적인 가치나 방어적인 가치를 부르짖는 것은 집단적인 생존 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집단적인 가치(자주독립, 근대화, 민주주의 등)를 실현해야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 등 최상위 가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는 독립 당시 미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反英 독립투쟁 와중에도, 독립선언서에 보듯이 생명, 자유, 행복, 안전 등의 본원적인 가치를 앞세웠다. 이것을 추구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문서로서 명시하였다. 이것이 미국과 한민족(진보, 보수, 조선노동당 등)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 민족 화해.협력, 원칙과 상식, 양심 등을 앞세워 집권했다. 집권 이후에는 인간의 생명, 자유, 행복, 안전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서거로 진보 개혁 민주파는 너무나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 왔다. 독재가 탱크를 앞세워 물밀듯이 밀려올 때 용감하게 저항하던 좁은 보루, 참호, 토치카로 말이다. 이 참호의 현판에 씌어있는 글이 바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시민주권’이나 ‘국민참여’ 역시 좁은 참호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현판이다.



나는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노당, 진보 언론, 진보 시민단체 등 진보의 총체적인 몰락 내지 좌절은 뭐니 뭐니 해도 (집권 전에) 집권 이후 대한민국을 어떻게 경영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이를 깨닫고 노대통령은 퇴임 후 새로운 ‘진보주의 연구’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노대통령과의 정치적 인연을 훈장처럼 받은 사람들을 포함한 진보파 전체가 노대통령이 생의 마지막까지 부여잡은 거대한 화두를 대체로 놓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익숙한 ‘민주주의 투쟁’ ‘반MB투쟁’을 화두로 잡은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정치적 상상력과 관심 영역이 국가 경영에서 반MB, 민주수호투쟁으로 쪼그라 들었다. 이것은 정신적 퇴행이다. MB가 문명 역주행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 안목, 관심 영역마저 역주행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노대통령의 비문에 민주주의를 넘어선, 인간의 본원적 가치가 새겨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유서가 준 길고 깊고 강렬한 울림을 이어가지도 증폭시키지도 못하고, 민주투사 노무현만 부각시킨듯 하여 아쉽다. 가치=개념=문장은 인간의 정치적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생각하는 방식과 추구하는 가치(우선 순위)와 영혼의 폭과 깊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근대화의 이념적, 정신적 완성은 헌법 조문에 3.1운동, 임정 법통, 4.19 등 방어적이고 집단적이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논란도 많은 가치들이 빠지고 미국 독립선언서처럼 인간의 본원적 가치가 전면에 오는 날이 아닐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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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일보가 수여하는 <바보상> 트로피. 제1회 수상자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로 선정됐다고 한다. 트로피 디자인에서 또 딴지의 힘을 느낀다.    

** 이 글 먼저 올리고, 인터뷰를 읽었는데... 아-, 딴지야! 일 정말 씨원씨원하게 잘 한다.  

** 공감가는 댓글이 있어서 링크를 건다 (댓글로는 바로 링크가 안 된다; '그래 맞다. 바로 돈이 문제라고'라는 제목의 댓글).


노무현의 '이의 있습니다' 포즈를 형상화했다. 아래는 크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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