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碑文 유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는 노대통령을 민주투사나 열사로 가뒀다.

김 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인터넷 댓글 쓰듯이 오래된 단상을 써 볼까 한다.

솔직히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가 맘에 안 든다. 목에 자꾸 걸린다. 이는 지난 6월 말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가 비문을 확정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누그러지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그 위원회에 관계했다면 아마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문장(말씀)이나, ‘원칙과 상식’이나 ‘거짓, 양심, 사랑, 자유, 행복’ 등이 들어있는 문장(말씀)을 강추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더 본원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음각된 비문은 풍부하고 생명력도 긴 노대통령의 삶과 정신을 민주투사라는 틀에 가두었다는 느낌을 준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나 링컨 대통령이나 ‘마틴루터 킹’ 목사의 정신처럼 다수 국민들이 몇 대에 걸쳐서 공유하고 체화할 노무현 정신을, 민주화 운동 관련 훈장을 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투쟁이 시대적 과제인) 당대에만 사용하는 불쏘시개로 사용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개념은 현실이나 실체를 추상하여 만들어졌다. 추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은 한자 뜻 그대로 특정 측면 혹은 주요한 측면은 뽑아내고 나머지는 버리도록 한다. 따라서 개념에 의해 마음이나 사고가 결정 지워지게 된다. 사물, 특히 정치사회적 현상은 개념에 의해 재창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정치사회 세력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한에는 ‘혁명과 건설’이라는 단어가 홍수처럼 흐른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와 미제로부터) ‘해방과 통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혁명과 건설’이나 ‘해방과 통일’을 시대정신으로, 즉 민족적, 국가적, 당적 최상위 과업으로 놓게되면, 평범한 인민들의 다양한 세속적 욕망들이 잘려나가고, 짓눌릴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욕망이자 가치인 자유와 행복이 짓눌려 버리기 십상이다. 가치 전도가 일어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한편 ‘혁명과 건설’이나 ‘해방과 통일’은 역사와 현실을 통찰한 선지자(?) 내지 엘리트들이 그 내용(의미)를 결정한다. ‘자유와 행복’이라면 그 의미를 개개인도 충분히 부여할 수 있기에 아무리 무식한 인민이라 할지라도 할 얘기가 넘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혁명과 건설’에 관해서는 이 내용(의미)를 깊이 이해한 수령, 당, 간부들로부터 지도 내지 교시를 받아야 한다. 더욱이 ‘혁명과 건설’을 최상위 과제로 올려놓으면 자동적으로 자유도, 행복도, 도덕도 다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된다. 인간의 무한히 다양하고 싱싱한 창의, 열정, 욕망이 그 놈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포르말린 통에 처넣어져 박제화 되고, 규격화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문화와 예술은 지극히 경직되고 활력을 잃고 앙상해져 버린다. 이는 북한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한국 진보, 보수는 그 보다는 덜하지만 집단적 가치라는 포르말린 통에 생명, 자유, 행복, 안전 같은 본원적 가치를 집어 넣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 헌법의 위대한 생명력의 근원이자,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힘의 근원은 1776년 7월4일 대륙회의 선언문(일명 미국 독립선언서)에 흐르는 핵심 가치(정신)와 우선순위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중략) 우리는 다음의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이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 아메리카 13개 연합 주의 만장일치 선언)



생명, 자유, 행복, 안전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가치이다.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의미)을 규정할 수 있고, 권력자에 대해서는 부여받은 사명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무기로 쓸 수 있다. 게다가 미국 독립선언서는 정부의 조직 이유를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못 박았다. 한술 더 떠서 이를 보장 못하거나 파괴하는 정부는 폐지하여야 한다고, 이른바 혁명권까지 명시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평범한 인민이 권력자나 지도자에게 들이댈 수 있는 무기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에 시대를 통찰하는 엘리트들이나 휘두를 수 있는 무기(집단적 가치)를 강조해왔다. ‘반공’ ‘조국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민주주의)’, ‘시민주권’, ‘국민참여’ '신자유의 반대' ‘사회통합’, ‘사회정의(이건 내가 특별히 강조한다)’ 등이 그런 것들이다. ‘혁명과 건설’, ‘해방과 통일’, ‘민족 자주’를 주구장창 부르짖는 북한은 특히 심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진보, 보수가 공히 집단적인 가치나 방어적인 가치를 부르짖는 것은 집단적인 생존 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집단적인 가치(자주독립, 근대화, 민주주의 등)를 실현해야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 등 최상위 가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는 독립 당시 미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反英 독립투쟁 와중에도, 독립선언서에 보듯이 생명, 자유, 행복, 안전 등의 본원적인 가치를 앞세웠다. 이것을 추구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문서로서 명시하였다. 이것이 미국과 한민족(진보, 보수, 조선노동당 등)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 민족 화해.협력, 원칙과 상식, 양심 등을 앞세워 집권했다. 집권 이후에는 인간의 생명, 자유, 행복, 안전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서거로 진보 개혁 민주파는 너무나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 왔다. 독재가 탱크를 앞세워 물밀듯이 밀려올 때 용감하게 저항하던 좁은 보루, 참호, 토치카로 말이다. 이 참호의 현판에 씌어있는 글이 바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시민주권’이나 ‘국민참여’ 역시 좁은 참호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현판이다.



나는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노당, 진보 언론, 진보 시민단체 등 진보의 총체적인 몰락 내지 좌절은 뭐니 뭐니 해도 (집권 전에) 집권 이후 대한민국을 어떻게 경영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이를 깨닫고 노대통령은 퇴임 후 새로운 ‘진보주의 연구’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노대통령과의 정치적 인연을 훈장처럼 받은 사람들을 포함한 진보파 전체가 노대통령이 생의 마지막까지 부여잡은 거대한 화두를 대체로 놓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익숙한 ‘민주주의 투쟁’ ‘반MB투쟁’을 화두로 잡은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정치적 상상력과 관심 영역이 국가 경영에서 반MB, 민주수호투쟁으로 쪼그라 들었다. 이것은 정신적 퇴행이다. MB가 문명 역주행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 안목, 관심 영역마저 역주행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노대통령의 비문에 민주주의를 넘어선, 인간의 본원적 가치가 새겨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유서가 준 길고 깊고 강렬한 울림을 이어가지도 증폭시키지도 못하고, 민주투사 노무현만 부각시킨듯 하여 아쉽다. 가치=개념=문장은 인간의 정치적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생각하는 방식과 추구하는 가치(우선 순위)와 영혼의 폭과 깊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근대화의 이념적, 정신적 완성은 헌법 조문에 3.1운동, 임정 법통, 4.19 등 방어적이고 집단적이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논란도 많은 가치들이 빠지고 미국 독립선언서처럼 인간의 본원적 가치가 전면에 오는 날이 아닐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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