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약수터엔 새벽부터 야밤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운동하는 사람, 물뜨러 온 사람, 사람많은 곳에 꼬이는 장사치들, 그리고 정자를 차지하고 하루를 보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어제 저녁때 약수터를 지나치는데, 귓전에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나라 왕 정도돼야 국상을 하는 거지."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을 국상으로 치르기로 한 것이 불만이신 모양이었다. 그분이 원하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지... 애당초 이명박 정부는 노통 서거때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을 고려중이라고 했고, 이번에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국민장을 고려중이라 했다. 청와대가 번번이 유가족의 뜻이라고 섣불리 유추했던 것은 그 할아버지 같은 분들의 뜻을 십분 반영한 것이었으리라.  

김통의 큰 뜻을 어찌 이해하리오만, 취임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을 외국에서 뉴스로 보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타협을 했어나 했나,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사면의 목적이 동서화합이었다면, 동의 성정을 너무 좋게 본 것 아닐까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 아침에 KBS에서 김통의 생전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영상들을 추려 보여주는데, 내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호상이라고들 하는 이번 김통의 서거때문이 아니라 지난 5월 비명에 가신 노짱의 운명이 너무 불쌍하고 서러워서였다.  

방금 딴지에 들렀다가, 한 글의 댓글에서 비슷한 감정을 서두에 적어놓은 것이 있어서 펌질을 해두는 김에 끄적거렸다.   

 

데자뷔와 자메뷔 

 

눈까리가 톡 튀어나올 정도로 울었다.


김대중 대통령님께 죄송하다.
며칠 전 가신 분은 김대중 대통령인데 나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운다.

나는 10 여년간 총 세번 김대중 대통령께 투표했다.
노짱은 꼴랑 한번.
횟수로 따져도 게임이 안되는데 나는 오늘도 노무현 때문에 운다.

저 양반은 진짜 하나도 안 변했었구나.

변한 건 우리였구나.

조작질,이간질에 방관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거나 대놓고 씹어댄
우리가 변했던 거구나.

다시 한번 느끼고 운다.



성일권 님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데자뷔'와 '자메뷔'...

데자뷔야 이미 아시는 대로, <분명히 처음 보는 장면 처음 겪는 일, 처음
나누는 대화인데 일찍이 경험했을 것이라고 느끼는 현상-일종의 지각장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자메뷔는 이미 경험하고 익숙해진 사항이 마치 완전히 새로운
경험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책을 마칠 무렵 우리 사회가 모두 극심한 데자뷔와 자메뷔를 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같은 우리 사회의 뒤죽박죽은 우리에게
집단적 지각장애와 기억상실을 강요하는 담론 권력 집단의 기획과 음모에서
비롯된다...>

본문을 따왔으므로 저작권법 위반인가?
프랑스에 계시는 성일권님은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2009.5.23. 을 극심한 데자뷔, 그리고 2009.8.18. 이후 노짱이 돌아가신 것을
이미 석달간 인지하고 있었을텐데도 마치 또 돌아가신 것 같은 자메뷔...

이 영상을 보면서도 또 그렇다.

비단 노짱과 김대중 대통령님의 서거에 따른 집단적 지각장애와 기억상실
만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몇십년간, 일제 후 18년간 해먹은 어떤 자, 그 후에 자국민을 쓸어버린
어떤 자, 그 후에 또 또 어떤 자들...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을 악을 쓰고 불렀던
그 암흑의 카르텔들에 의해 몇십년간 데자뷔와 자메뷔를 강요당하고 살아온
것 같다.


아무튼 이 동영상을 눈까리 튀어나올 정도로 울면서 보고난 후 노짱께,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님께 꼭 약속드리고 싶은 게 있다.

내가 속한 지역이 지역인지라 나 또한 그 망국적 지역감정 또는 지역차별
등등의 현상에서 100%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이 몇십년간 행해져온
조작질과 이간질과 선동질의 결과임은 분명하기에, 그리고 그 짓을 행해온
한줌도 안되면서도 가공할 집단만큼은 분명히 우리와 다른 '남'이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라도야 경상도야, 우리가 남이가?
그냥 고만고만하게 사는 전라도 경상도 사람들아, 우리가 남이가?

특히 노짱께 약속드린다면 우리 김대중 대통령님 서운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노짱, 노무현은 왜 디지고 지랄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이보시오 우리가 남입니까....


그리고 성일권 님의 책에 나온 인용처럼, 그 한줌도 안되면서 우리에게
최면을 거는 그 집단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저기 적이 있다고 소리치는 놈, 그놈이 바로 적이다 -브레히트-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68&article_id=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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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정치포럼에 들렀다가,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 대한 리뷰가 있길래 퍼왔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와 닿는다. 저곳의 필자들은 김대호 소장을 필두로 하여, 글을 명쾌하고 쉽게 써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다.   

 

 

 

 

 

 

  

 

 

논쟁의 달인이 되고 싶다면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대학원에 다닐 때 여러 학교 학생들이 모인 연구소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어 제 발로 찾아간 연구소였지만 첫 세미나 시간부터 주눅이 들어 입도 벙긋 못했습니다.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어쩜 그리 똑똑한지, 저는 밑줄을 치며 읽어도 모르겠는 책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는데, ‘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소설책 빼곤 끝까지 읽은 책이 드물던 제가 그날부터 하루 열두 시간을 꼬박 책상 앞에 붙어 있었을 만큼 충격이 컸지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나자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겠고 조금씩 적응이 되더군요. 그런데 이번엔 다른 문제가 저를 괴롭혔습니다. 토론에 한몫 껴서 제 주장도 하고 싶고 반론도 펴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겁니다.

무엇보다 곤란한 건 제 ‘겸손’이었습니다. 반론을 할 때마다 “잘은 모르지만” 같은 말을 했더니 그게 상대에게 말꼬리를 잡히는 빌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일종의 수식어로 사용한 말인데 치사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상대의 허점을 지적하고 내 주장을 설득하는 자리에서 ‘모른다’는 말은 자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르는 게 없도록 최대한 준비하는 것이 토론자의 기본자세라는 것도요.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은 토론에 꽤 능한 사람으로 통합니다. 때론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피곤하단 말까지 들을 정도니 지난날을 생각하면 성공한 셈이지요. 하지만 지금도 저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입을 닫습니다. 토론을 해서 설득할 자신도, 이길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더군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코끼리는 미국의 공화당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민주당이 공화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쓴 일종의 정치 지침서입니다. 그런데 책을 쓴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저명한 언어학자입니다. 레이코프의 스승이자 학문적 라이벌이기도 한 노엄 촘스키 역시 정치학 책을 여럿 냈지요. ‘언어학자가 웬 정치?’ 할 수도 있지만 언어의 힘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인지언어학이란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통해 언어의 성질을 이해하려는 학문입니다. 특히 레이코프는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은유에 주목합니다. 익숙한 은유들이 인간의 사고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가령 ‘시간을 절약해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같은 말을 볼까요. 레이코프는 이 말들에는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서구 문명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분석합니다.

‘시간은 돈’이란 은유는 삭막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라크=사담 후세인’ ‘북한=김정일’ ‘깡패국가’ 식으로, 국가를 사람에 빗대는 은유는 다릅니다. 레이코프는 이런 은유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비판합니다. ‘사담을 막아야 한다’며 쏟아 부은 폭탄으로 죽은 것은 사담이 아니라 수십 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입니다.(그 중에는 사담 반대자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담=이라크’라는 은유는 이들의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은유가 사람을 죽이는 현실 앞에서 언어학자는 정치가가 됩니다.

이 책의 부제는 ‘미국의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입니다. 책을 쓸 당시(2004년) 미국은 공화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부제는 그런 상황을 반영합니다. 민주당 지지자인 레이코프는 연이은 패배를 지켜보며 공화당이 왜 승리하는지, 가난한 서민들이 왜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지 묻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 “프레임(frame)을 바꿔라” 입니다.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프레임을 재구성한다는 건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며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 쉽지 않은 일의 첫 단추가 언어입니다. 레이코프는 새로운 프레임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먼저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거지요.

레이코프에 따르면, 공화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프레임의 중요성을 깨닫고 모든 쟁점을 프레임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터득한 덕분입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사용해 성공한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말을 예로 듭니다. ‘구제’라는 말은, 세금은 고통이며 그걸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프레임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지요. 그런데도 민주당은 그 말을 가져다 그대로 씁니다. 자신들의 세제안까지 세금 구제라고 부르면서 말이지요.

멀리 미국의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과거 참여정부가 부동산 세제개혁을 추진하자 일부 언론이 나서서 ‘세금 폭탄’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가 세금 폭탄을 투하해 국민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은유지요. 물론 세금은 폭탄으로 쓰일 만큼 나쁜 것이란 프레임은 미국과 같습니다. 이 은유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세제개혁의 실제 내용을 따져볼 새도 없이 대다수 국민들은 그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지요. 정부가 ‘세금 폭탄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오히려 그 프레임에 포섭되었음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레이코프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마디의 프레임이 더 큰 힘을 가진다고 역설합니다. 공화당의 ‘세금 구제’를 비판하는 것은 얼핏 보면 중요하고 필요한 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세금=고통’이란 프레임을 강화하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대신 ‘세금=투자’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다면 국민은 새로운 눈으로 세금을 보게 될 것이고, 세금정책에 대해서도 종전과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정치투쟁만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에서도 누가 프레임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왜 공부를 안 하느냐고 야단치는 부모에게 아이들은 조금만 놀고 할 거라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반항을 하긴 해도 아이는 이미 공부를 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공부가 가진 절대적 지위가 흔들리면서 프레임이 이동하는 거지요.

레이코프는 ‘객관적 사실이 증명할 것’이라거나 ‘우리가 옳으니까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진보주의자의 속설을 “헛된 희망”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리고 민주당이 승리하고 싶으면 공화당과는 다른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민주당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출판사도 찾지 못해 한 시골 출판사에서 간신히 펴낸 책이 순식간에 20만 부가 넘게 팔렸지요. 그 덕분인지 민주당은 4년 뒤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제목은, 공화당을 이기고 싶다면 공화당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다보면 상대방에 매인 나머지 나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기고 싶다면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지 말고 프레임을 재구성해서 대응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을 말하십시오. 하지만 반대파로만 이루어진 토론 자리에는 나가지 마십시오. 프레임을 바꿀 수 없는 자리에선 이길 수도 없으니까요. 참 쉽죠~잉?



http://blog.goodpol.net/introspection/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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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090818004708&subctg1=&subctg2=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politics/0908_DJ/view.html?photoid=4623&newsid=20090819181107404&p=yonhap 

 

 

 

마이클 잭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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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할 사람이 없어서 안타깝다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감동의 인간 승리의 주인공


인간은 어차피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법.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극적 서거가 생명을 단축시켰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보기 드문 好喪처럼 느껴진다. 현 정권과 시국에 대한 감정적 앙금을 툴툴 털어버리고 마음껏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대중의 인생은 위대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 그 자체다. 자식들에게 흥미진진하게, 또 자랑스럽게 얘기하기에 정말 좋은 인생이다.
 

김대중의 20~30대는 웬만한 젊은이라면 비관 자살이라도 할법한 지독한 불운으로 점철 되었다. 1954년 민의원 선거, 1958년 총선, 1959년 보궐선거, 1960년 5대 총선(4.19 직후라서 민주당이면 개나 소나 다 당선됐다)에 내리 낙선했다. 이 와중에 첫째 부인과 여동생을 잃고 가산조차 탕진했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에서 드디어 4전 5기 끝에 당선됐으나 그 사흘 후 일어난 5.16쿠데타로 인해 취임 선서도 못하였다. 결국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당선되어 겨우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1년 교통 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이 때 운전사는 사망하고 자신은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불구가 되었다), 1973년 현해탄 수장 시도, 투옥-가택연금-사형 선고-무기징역으로 감형-사실상 미국 추방-정계 복귀-통일민주당 분당-1987년 낙선과 1992년 낙선-정계 은퇴와 번복, 그리고 3전 4기 끝에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이인제의 출마에 힘입은)대통령 당선, 이어 외환위기 극복, 국가 구조 개혁(4대 개혁), 생산적 복지, 남북정상회담, 노무현 정부 탄생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인생은 감동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장엄한 일몰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분노와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폭풍을 일으켰다. 삶에 대한 질긴 집착조차 끊어버리고 역사의 祭壇에 몸을 바친 행위는 가슴 저 깊숙한 곳을 숙연함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찬란하고 장엄한 일몰을 보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 빛과 열을 발산하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 태양이기 때문이다. 일몰 직후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이 아름답듯이, 김대중과 함께 민주, 개혁, 진보, 평화, 복지를 추구하던 인생들이 아름답다. 김대중과 함께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복되고 위대하다. 
 

울 때 울어주는 정치인, 공감할 줄 아는 정치인
 

나는 지난 5월 29일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힘겹게 스스로 헌화를 하고 난 후, 권양숙 여사 손을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그를 기억한다. 5월 28일 서울역 광장 분향소를 찾아서 조문을 마친 뒤 “노 전 대통령이 받은 치욕•좌절•슬픔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결단을 할 것 같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나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결에 대해 이보다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공감을 표한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혜안을 가진 정치인 
 

김대중은 1954년 용산에 노동문제연구소를 냈다. 노동운동 평론가로 자처하면서 월간 ‘사상계’ 등에 글을 기고하곤 했다. 1950년대 중반이 어떤 시대인가? 일제치하와 해방공간에서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던 좌파들이 거의 다 참혹하게 죽거나 투옥되거나 월북한 시절 아닌가? 그래서 노동문제나 노동운동을 논하면 빨갱이 취급 받던 시절 아닌가? 
 

사실 나만 하더라도 1980년대 초 띨빵한 나를 꼬드겨 학생운동에 밀어 넣어준 고마운 선배들이 있었다. 캠퍼스 분위기 자체가 데모와 불온(?) 서클 활동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노무현만 하더라도 30대 후반에 그를 깨어나게 하고 이끌어 준 부림 사건과 부산 운동권과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김대중에게는 그를 끌어 주고 밀어주는 선배도 사회 분위기도 없었다. 선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좌익활동을 하다가 용케 살아남아,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혁명 노선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뿐이었기에 참다운 선배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한 30대 초반의 김대중의 행보는 역사의 큰 흐름을 뚜렷이 의식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보라고 보아야 한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김대중의 관심과 기대는 1963년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로 나타났다. 노동조합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1998년 대통령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4대 개혁(기업, 금융, 공공, 노동)을 추진하면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되었다. 4대 개혁 과정에서 발전노조 파업, 대우자동차 해외매각과 정리해고, 금융기관 구조조정(폐쇄, 통폐합, 인력 조정), 전교조 합법화, 민주노총 합법화 등이 있었고, 진보좌파는 이를 기화로 김대중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규정하고, 주 타격방향으로 삼았다. 
 

국외에서 김대중과 비슷한 경로를 걸어간 사람은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이다. 김대중보다 1년 먼저 태어난 리콴유(1923년 생)는 1954년 노조지도자와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하고-그래서 색깔론 시비에 시달렸고 영국 식민 정부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55년 선거에서 국회의원(입법평의회 의원)에 당선되고, 1959년에 집권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과 노조와 크게 충돌하였다. 1940년대 말 영국에서 근 4년간 유학생활을 한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30년 넘게 통치했으나, 결국 가부장적 권위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대한민국보다 조금 더 풍요롭긴 하지만…… 그러나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싱가포르 보다 훨씬 발전 잠재력이 높은 국가를 만든 것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중경제론’을 펴냈다. 이는 박현채.임동규가 내용을 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사실 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지식과 지혜를 녹여내어, 지식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경제 발전론 이자 국가 개조론을 펼친 정치인이 또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 지혜를 총화 한 경제.사회 발전론과 총체적 국가개조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외주를 주든 직접 쓰든 이를 완전히 체화하여 경제.사회 구조 개혁을 논하는 정치인이 절실한 상황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의 내용을 깊이 숙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과문해서인지 현실 정치인 중에서 지적으로 김대중에 근접하는 정치인이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위대한 변절자
 

나는 1998년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해설서인지 모르겠다)을 접하고, 그것이 1980년대 공부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구조 개혁의 방향은 틀림없이 사회민주주의 내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을 근간으로 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당시 대우자동차 부평 기술연구소 과장(선임연구원)으로 있었는데, 김대중 기업 개혁의 파트너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6,500명의 사무기술직을 포괄하는 직선 사우회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1998년~2001년 사이에 이루어진 기업, 금융, 노동, 공공 개혁의 기조는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대중경제론/민족경제론의 체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박승옥도 이렇게 썼다. 
 

“1997년 이후의 김대중은 1971년의 대중경제론을 수정 증보한 것이 결코 아니라 철저하게 배신했다” (박승옥 DJ '대중경제론'은 박현채 작품" 프레시안, 2005-07-12) 
 

당연히 대우자동차는 일찍부터 해외매각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런데 몇 년간 열심히 활동하면서 보니 사무기술직조차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깨어있는 이익집단이 아니었다. 힘만 없었을 뿐 사고방식이나 행태가 생산직 노조와 다를 바 없었다. 오래지 않아 내가 미몽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 개혁의 철학, 가치, 이념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국인의 성정, 문화와 불편한 진실이 수두룩한 사회 운영 메카니즘도 살펴보고, 세계화와 지식정보화의 의미도 살펴보면서 대통령 김대중의 극적인 변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도 사민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미몽에서 확실히 깨어났다.   
 

사실 1990년대 후반, (1980년대) 운동권 물이 덜 빠진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잘 맞는 정치적, 정책적 행보를 하는 정치 지도자는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수상이었다. 그래서 나도 잠깐이나마 마하티르 팬이었다.(운동권 물이 거의 안빠진 사람들에게는 반미를 외치는 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적, 정책적 행보가 정서에 가장 잘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비교하면서, 또 마하티르와 김대중의 성장 배경을 비교하면서 김대중이 빼어난 통찰력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든 변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김대중은 역사와 세계의 흐름을 꿰뚫고, 대한민국의 생존.번영의 조건을 정확히 간파하여 과거의 고정관념(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류)을 창조적으로 파괴했고 나를 이를 지지한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과 대우자동차와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나의 지적 스승이다. 
 

나는 기업, 금융, 공공 부문에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대거 도입하고, ‘생산적 복지’의 기치아래 사회안전망을 대폭적으로 강화하고, 정보통신 산업을 일으킨 김대중의 정책기조가 큰 틀에서 옳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이 김대중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열심히 달려간 것도 큰 틀에서 옳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요 은행과 기업의 지분이 외국인들에게 너무 많이 넘어가고, 해외 변수(외국인 투자자)에 너무 취약하고, 신용카드 대란, 부동산 대란, 양극화, 청년실업, 비정규직, 사교육, 공공부문으로의 인재 쏠림 등 무수히 많은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한국이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 노선의 엄청난 폐해를 시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대한민국과 민주.개혁.진보 진영과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정책적 오류를 과감히 시정할 줄 아는 위대한 변절자였다. 하지만 민생과 민주주의와 민족 화해.협력에 대한 초심은 바꾸지 않았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정책적으로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김대중을 변절자로 비난한 사람들이 진짜 변절자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김대중을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 취급하던 좌익활동가들(1950~60년대)도 있고, 김대중을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취급하는 진보좌파들도 있다. 
 

아쉬운 안목
 

김대중은 1970년대 걸음마 단계이던 재야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옹호했다. 이는 당시로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또 이 때문에 군부 등 보수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비토를 받았다. 이런 긴 역사성 때문에 당시 재야민주화 운동의 주류는 1987년 이후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김대중은 이유야 어떻든 재야민주화 운동 세력을 끊임없이 수혈하였다. 동시에 전문가 세력도 정당에 끊임없이 수혈하였다. 총학생회장 출신 386을 주도적으로 수혈한 사람도 김대중이다. 
 

김대중의 수혈에 대해 수많은 비판이 있다. 김대중 때문에 한국의 진보와 개혁이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한국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신진 정치세력을 발굴하고, 기회를 주고, 키워내는 정치인이 김대중 말고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솔직히 한나라당은 정치 후세대에 대한 육성적 관점이 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보개혁 동네에서는 정치 후세대를 생각하는 안목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하나같이 자신의 눈앞의 정치적 이익과 생존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중이라는 모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진보개혁 동네는 김대중 보다 역사적, 정치적 안목이 더 협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대중은 1960년대 후반, 이철승, 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해 보아서 인지, 2007년, 진보개혁의 지리멸멸 각개약진의 시대에 386 정치인들이 패기 있게 치고 나와서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 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386 정치인들은 그 누구도 이 주문에 응한 사람이 없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김대중이 2007년 당시 386 정치인과 같은 위치였다면, 확신컨대 2007년의 그 지리멸멸한 꼴은 연출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聖과 俗을 참으로 잘 조화시킨 정치인
 

김대중은 동교동계라는 조직을 거느렸다. 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서슬 퍼런 집권세력의 감시의 눈을 피해서 조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돈과 관련하여 김대중의 쫀쫀한 일화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인간들도 많이 거느렸다고 알고 있다. 나름대로 조직 운영에는 쓰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은 재야, 시민운동, 학계, 종교계, 노동계, 문화계, 경제계 등 다양한 분야 인사들과 교류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배려하고 활용하였다. 이는 거대하고 복잡한 국가경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한국 정치와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진보개혁 동네에서 그 누가 김대중과 같은 강력한 ‘정치 사단’을 거느리고, 또 다양한 분야의 인맥을 만들어나가는지 알지 못한다.  어찌 보면 김대중은 장사꾼이자, 속물이자, 마키아벨리스트이고, 어찌 보면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이상적인 정치인은 원래 절반은 장사꾼이고 절반이 목사/스님이라면 김대중은 참으로 이상적인 정치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진보개혁 동네는 노무현의 위대한 유산뿐 아니라 김대중의 위대한 유산도 제대로 승계하는 존재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깝다.
 

대한민국과 진보가 길을 잃고 헤매고, 문명이 총체적으로 후퇴하는 듯이 느껴지는 통에 위대한 길잡이에 대한 아쉬움이 왜 없겠냐 마는, 그래도 ‘恨’과 감정적 앙금을 억누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민장은 영남이든 호남이든,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국민 다수가 머뭇거리지 않고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는 호상이다. 대한민국은 몇 십 년 내에 지폐에 들어갈 지도 모르는 위대한 현대사 인물 하나를 얻었다. –끝-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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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우는 취향의 문제고, 문제는 폭력성이다. 

('바더마인호프'와 '이반촌킨' 리뷰들을 읽다가...) 

2. 폭력에 대처하는 두세 가지 방법 

1)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2) 저항한다(운다, 싸운다), 자살한다. 

3) 나는 1)도 2) 아니라며 고뇌에 사로잡힌 듯 우아한 포즈를 취한다.  

* 4) "사는 거 뭐 있어~" 미친 척 폭력에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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