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일산 신도시에서 서울 중심부와 압구정동을 거쳐 분당 신도시로 향하는 지하철 3호선. 다른 노선과는 승객의 옷차림부터 다르다고 한다. 매봉역에 나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즈음이면 잘 정비된 양재천을 만난다. 물 깊이는 불과 어른 허벅지 정도.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30초가 채 안 걸리는 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평당 2~3천만 원을 호가하는 타워팰리스와 한 가구당 6~7천만 원의 토지변상금(시유지를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강남구청이 부과한 벌금)을 지고 사는 포이동 266번지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불기 시작하는 가을바람이 그저 반가운 9월 초순. 양재천을 건너 몇 계단을 오르니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건물에 걸린 ‘빈민해방’ 깃발이 나부낀다. 포이동 266번지에서 유일하게 이층 건물인 사무실에 들어서자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철순(46세)씨가 증거자료가 든 두툼한 봉투를 들고 맞는다. 젊다는 이유로 대책위원장이 되었다는 조 씨는 위원장이자 대변인이고 부녀회장 같다가도 행동대장으로 돌변한다. 그는 조심스레 기자가 얼마나 포이동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물어온다. 27년간의 기막힌 과거사. 국가범죄와 폭력이 난무했던 시련의 시간을 복기하는 것은 서로에게 모두 힘든 일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떠올리기조차 싫은 순간을 기억해내 방문객에게 되풀이해서 일러주는 일은 조철순 씨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기막힌 포이동 창세기

포이동의 태초에도 ‘말’이 있었다. 그 ‘말’은 신의 언어가 아니었지만 신 부럽지 않은 권력자의 명령이었다. 1979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거리의 부랑자와 전쟁고아, 넝마주이 등을 모은 ‘자활근로대’가 조직된다. 1981년 3월 전두환 군사정부 아래 서울시는 1,000여 명의 자활근로대원을 서초구 정보사 뒷산으로 강제 이주시키지만 인근 주민의 반발과 민원이 일자 그해 말 10여 군데로 다시 분산 이주시킨다. 그중 150여명이 집단이주당한 지역이 현재 포이동 266번지인 200-1번지 하천부지로 당시에는 길도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이었다.

80년대 후반까지 동네에 상주했던 경찰의 지배에 가까운 감시와 통제 아래 당시 주민들은 도시 최하층이라는 멸시와 천대를 넘어 함께 예비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때도 주민들 대다수의 생계수단은 고물 수집이었다. 해가 지고 동네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일명 ‘후리가리’라는 경찰의 일제단속기간에 걸렸다. 그러면 절도혐의로 경찰서로 끌려가 구타와 물고문 끝에 해결되지 않은 절도사건의 누명을 뒤집어썼다. 전두환 정권 초기 사회정화란 미명아래 악명 높았던 ‘삼청교육대’도 이들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당시 50여명의 자활근로대원을 거느렸던 이덕열(65세)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0여명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돌아온 이는 불과 4~5명에 불과했다고 증언한다. 조철순 씨의 남편도 한동안 집 밖 출입을 못했다. 아예 야산으로 올라가 굴을 파고 생활하던 이들도 있었다. 아직도 삼청교육대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집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한 채 식칼을 이불 밑에 넣고 지내는 이도 있다. 86년, 88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당시에는 국가적 망신이라며 동네 출입이 아예 금지되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처지에 몇몇 주민들은 야음을 틈타 빠져나갔다 걸려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양재천에서 시신이 발견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경찰과 공무원에게 항의를 할 엄두조차 못 내던 시절이었다.

89년 토지구획정리가 되면서 포이동 200-1번지는 266번지로 바뀐다. 하루아침에 살던 땅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동사무소에서는 관련 자료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서류상의 주소는 먹고 살기 다음에도 한 참 뒤에나 신경이 가는 일이었기에 주민 중 누구도 이를 문제 삼을 여력도, 용기도 없었다. 다음 해인 90년 집집마다 20~30만 원의 토지변상금 고지서가 나왔고 주민들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단 공무원의 말에 따라 토지 사용료이겠거니 하며 납부를 했다. 그러나 다음 해 변상금은 열배가 되었고, 자녀들은 인근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로 토지변상금은 매해 꼬박꼬박 부과되어 15%의 고리가 매겨져 현재 가구당 6~7천만 원이나 되는 가난한 삶에 족쇄가 되었다. 


양재천을 사이에 두고 평당 2~3천만원을 호가하는 타워팰리스와 가구당 6~7천만원의 벌금을 안고 사는 포이동 266번지가 마주하고 있다.


 


죽거나 혹은 더 가난해지거나

포이동 266번지는 현재 100여 가구, 3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독거노인도 많지만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결혼한 자식들을 월세라도 구해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토지변상금으로 인해 당장 압류가 들어오는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실례로 한 아무개(59세)씨는 어렵게 돈을 모아 95년 서초동에 전세 8,000만 원을 끼고 1억6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외환위기 직후 아파트값이 폭락하자 되팔았는데 서울시가 이미 압류 등기를 해놓은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다. 서울시는 김 씨 집 매각대금 중에서 2,600만 원을 압류해 챙겼다. 김 씨는 전세금마저 갚고 나니 평생을 걸쳐 모은 돈이 한 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조철순 씨는 “주민세도 꼬박꼬박 내고 영장이 나와 군대에도 가는데 살고 있는 땅에 주민으로 받아주지는 않고 떠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무슨 경우냐”며 기막혀 한다.

2004년 6월과 7월에는 한 부부가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부인에 앞서 6월 4일 목숨을 끊은 김 아무개(당시 58세)씨 또한 81년 강제 이주되었던 자활근로대원이었다. 2003년 말 고물 모으는 일 끝에 얻은 진폐증으로 김 씨는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월 23만 원을 주고 빌린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집에서 투병생활을 했다. 아들 둘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상태였고 생계는 고스란히 부인의 몫이었다. 결국 김 씨는 늘어가는 약값과 치료비에 삶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조철순 씨를 비롯한 이웃 주민들이 해당 동 사무소에 찾아가 김 씨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의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부인이 건물 청소로 받는 임금이 106만 원으로 당시 수급기준 금액 61만 원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임씨는 정규직원이 아니어서 58만 원의 임금을 받고 있었고 사고가 날 때도 임금 중 절반은 빚보증으로 인해 차압당하는 상태였다. 또한 의료비 지원혜택도 2개월 이상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이들 부부에게는 해당되지 못했다고 사고 직후 동사무소 관계자는 밝혔다. 김 씨가 남긴 것은 토지변상금 2,219만 원과 연체이자 2,449만 원, 자동차세 1,200만 원 등 빚 7천여만 원이었고 한 달 뒤 부인 임씨마저 목숨을 끊었다. 부부의 빚은 고스란히 군대에 있던 두 아들 몫으로 남겨졌다.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미로처럼 얽힌,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도 비좁은 포이동 266번지 골목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살피는데 불과 십여 분이 걸리지 않는다. 100여 가구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판잣집 대부분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남자는 막일로, 재활용 수집으로 일을 나가고 여자들은 주로 근처 빌딩청소를 나가 동네에는 몸이 불편한 노인들과 꼬맹이들뿐이다.

송희숙(58세)씨도 작년 9월까지 한 달 꼬박 일해 58만원 손에 쥐는 빌딩청소를 했다. 몸이 불편해 일을 쉬게 된 탓도 있지만 송 씨 역시 젊은 축이기에 봉사부장이란 감투를 맡고 “싸움을 이겨 주민등록이 등재될 때까지”라는 정해지지 않은 시한을 두고 일을 접었다. 송 씨는 지난 과거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던” 시절이었다며 “아마 주민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이 동네는 작년에 철거되었을 것”이라 한다. 주민들은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동사무소 직원이 나오면 먼저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상전 대접을 했지만 토지변상금 문제로 투쟁을 시작하고는 180도 바뀌었다. 잘못을 알면서도 자기책임이 아니라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외면하기에 급급 하는 공무원들, 뒤에서 쑥덕이지만 대놓고 총대 메고 해결하려는 이 하나 없는 관료들의 한심한 꼴을 너무 자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송씨는 80년대 초에 강원도 시골에서 식구들 입 하나 덜자고 상경을 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경기도 안양이었고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여기로 오게 되었다. 기세등등하게 군림하다 이제는 발뺌을 하는 공무원들뿐만이 아니라 무던히 두드려 맞았던 남편과 그걸 지켜보고도 항의도 한 번 못했던 스스로가 송 씨를 화나게 하고 또 슬프게 한다.

포이동의 여자들은 기자를 만나면 두루마리 화장지를 말아 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시작했다 하면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다. 오늘 송 씨의 남편은 재활용 수집을 나갔다가 동료가 개에게 물리는 통에 일찍 들어왔다. 남편의 동료는 한 이틀 수입을 날릴 지도 모른다.
2004년 목숨을 끊은 부부 앞집에 사는 문정임(74세) 씨는 한 넉 달은 무서워서 그 집을 쳐다보지도 못했다며 당시 일을 회상한다. 그도 남편을 따라 28년 전 포이동으로 왔다. 몸이 불편했던 남편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등졌고 홀로 3남매를 키워내고 지금은 혼자 산다. 28년 전 손수 지은 판잣집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높이 지을 껄”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 그래도 “여자가 집을 다 짓네!”라며 당시 주민들도 신기해했다고 한다. 다들 그렇듯 오는 겨울을 전기장판과 난로 하나로 버텨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춥다. 그래서 봄가을이 그나마 살기가 낫지만 이 땅의 계절조차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야속하게 변해간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에서 살고 싶은 소망이 죽어서도 한이 될 것 같다는 문정임 씨는 그래서 이 싸움에서 물러설 수가 없다.

여기서는 절망이 곧 희망이다 



 

포이동 266번지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LPG 가스통이 집집마다 벽에 기대어 있다. 대부분 판잣집이어서 화재의 위험과 늘 함께 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인근 소방서에서 소방용 물탱크를 설치했다. 비가 오면 골목길은 곧 진창이 된다. 장마에 동네가 물에 잠기지 않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원래 포이동은 밀미리라고, 한 해에 두 번은 큰물이 든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몇 해 전 인근 주택 단지 수로 공사 때 주민들이 나서서 배수관을 얻어 설치한 다음부터 물난리를 면했다. 전기와 수도도 한전과 상수도본부 등의 협조를 얻어 동네 전체가 하나로 메타가 매겨진다. 살림이 고만고만하다보니 한 달치 전기료와 수도세를 가구 수대로 나눈 다음 걷는다. 동네의 유일한 수세식 화장실은 대책위 사무실이고 공용 화장실이 10여 곳이 채 안 되다보니 아침이면 화장실을 먼저 차지하려는 분주함이 동네를 깨운다. 이를 보고 한 방송사는 미담사례마냥 만들어 방영을 한 적도 있다. 가난하지만 인정이 살아있는 동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과거를 사는 일은 버겁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포이동 266번지는 공동체가 살아 있다. 그러나 가난하기에 모여야 하고, 뭉쳐야 그나마 버텨낼 수 있는 빈곤의 현장.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국가와 지자체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동체가 유일한 생존 수단이어야 하는 포이동 266번지는 절망이 곧 희망이다.  

 

- 2006년 10월 <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