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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사회 - 동녘신서 101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신성림 옮김 / 동녘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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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법이 국회에 직권상정 되던 날, 지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 

"당대표가 동네 면장이냐, 아무나 만나게" 어제는 쌍용 자동차 가족대책위가 한나라당을 기습 점거하고 대표 면담을 요청하자 되돌아온 대답이었다. 한나라당 들어오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자 "별 땄으니 됐네요. 경찰 불러 끌어낼까"라는 답도 나왔다. 

물론 한나라당 밖의 현실은 한나라당 관계자의 말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모욕적이다. 정말 나라가 왜 이 모양일까.

"혹시 우리 사회의 시급한 문제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품위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철학 교수로 있는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덕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사회는 확실히 위선적인 사회이며 속물사회이고 죄책감보다 수치심을 더 두려워 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누구는 인권이 짓밟혔다고 절규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너희들이 먼저 불법을 저질렀으므로, 혹은 시민이 아니므로 그것은 '인권'이 아나라고 부정한다. 비단 높은 자살율을 들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일괄성'을, 인간적 존엄성을 파괴당하고, 파괴당하길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누군가는 포기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품위' 운운 하는 것은 한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정의로운 사회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이토록 취악하고 위태로운 것은 아닐까, 정의와 평등, 공정한 분배를 이야기했지만 그 방식과 태도까지는 간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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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라는 생각 자체가 빗나간 점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제도는 시장사회가 초래하는 모욕으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35

 
모욕도 난처함처럼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욕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45
 

'내면' 세계는 (스토아 학파와 기독교) 둘 다 가혹한 상황에서도 존엄성을 간직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품위 있는 사회를 위한 토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대용품에 불과하다. -46
 

인권을 존종하는 것이 품위 있는 사회가 될 충분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사회가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을 모욕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 52

 
분배할 수 있는 사회적 명예라는 개념은 등급을 나누는 개념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사회적 명예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55

 
굴종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 양식이다. 굴종은 대체로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존감은 결핍했지만 커다란 자부심을 가진 아첨꾼은 별 어려움 없이 상상하거나 확인할 수 있다. - 58

 
모욕적인 사회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관성을 버리게 만드는 제도를 가진 사회, 구성원들의 일관성을 파괴하는 사회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 61

 
모욕적인 행위가 피해자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반면 권리의 침해는 자존감의 축소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존엄성은 자존감의 발현이다. - 65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다고 나도 거기 갔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착륙의 영광은 모든 인간에게 분배될 수 있고 반사될 수 있다. 반사된 영광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람이 존중받을 자격을 갖는 이유가 무엇 덕분이냐고 묻지 않게 만든다. -71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결코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인간은 누구나 이전에 살아온 것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83

 
존중은 인간이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추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88

 
왜 일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존중을 인간에게만 한정하고 벼룩 같은 다른 생명체는 존중하지 않는가? -93

 
(안락사 캠페인과 같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서 사용한 방법들은 원래 정신 지체인을 명종시키기 위해 개발되었다. -94

 
인종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는 확장적인 태도가 우리 집단의 구성원만 한정해서 존중하는 수축적인 태도보다 도대체 어떤 이점을 갖는지 모르겠다." -95

 
모욕은 정신적 학대다. 품위 있는 사회는 사회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학대를 제거해야 할 뿐 아니라 제도가 야기하는 정신적 학대의 근절에도 전념해야 한다. -98

 
인간을 간과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즉 이해하지 않고 보기만 한다는 의미다. 인간을 인물로 보지 않고 배경으로 보는 것도 그들을 무시하는 방법이다. (...) "훌륭한 아랍 사람은 보이지 않으면서 일해야 한다." -116

 
막대기를 물 안에 집어넣으면 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시각적인 착각의 경우,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막대기가 그렇게 보이는 일을 피할 재간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을 믿지 않는 일뿐이다. (...) 어떤 사람을 모욕적으로 인간 이하의 측면에서 보게 되는 경우, 우리는 우리 눈을 믿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인간 이하로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지각의 수준에서 본다는 의미다. 필요한 것인 '낙인-난시'의 시각이다.  -122

 
모욕의 핵심 개념은 인간 공동체에서의 거부다.
그러나 이런 거부는 거부당하는 사람이 그저 사물이나 동물에 불과하다는 믿음이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거부는 상대가 마치 사물이나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데 있다. 전형적인 거부는 인간을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이다. -127

 
사디스트는 상대가 가진 자유로운 측면, 즉 그의 인간적 측면을 보지 않고 오직 육체로만 대한다. 그에 맞춰 마조히스트는 괴롭히는 자에게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전적으로 내준다. 그들이 벌이는 게임의 이름이 모욕이다. -134

 
수치심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와 별 관련이 없다. (...) 품위 있는 사회는 수치심 사회가 아니라 죄책감 사회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146

 
어떤 집단에 소속된 것을 수치로 여기게 만드는 일은 단순히 그들이 특정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인간성까지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51

 
모욕은 대비에 근거한 개념이며 모욕의반대말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만일 인간의 존엄성 개념이 없다면 모욕 개념도 없다. -165
 

만일 살마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모욕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면, 공개적으로 표출하게 하는 쪽이 더 낫다. 그래야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품위는 있지만 위선적인 문화를 가진 사회가 더 나은지 아니면 모욕적이지만 위선적이지 않는 문화를 가진 사회가 더 나은지 하는 문제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더라도, 모욕을 방지하기 위해 표현 수단을 제한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185

 
(제도가 개인의 자유를 담보하는 게 아니라) 제도의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에 기생한다. -187

 
장애인에게 배당된 특별 주차증은 낙인이 아니다. 그런 것은 모욕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특권의 신호로 봐야 한다. (...) 단순히 어떤 집단이나 사람을 선별하는 일 자체는 모욕이 아니다.  (...) 오직 사람들을 격리하고 억압할 목적으로 선별할 때만 모욕적이다. -200

 
속물사회는 업적 지향성을 소속지향성으로 바꿔놓는 사회다. 속물근성은 비중있는 사회에서 '타자들'이 항상 배제되도록 하기 위해 배타적인 소집단에 속한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정교하게 다듬는다. -205

 
동정과 감상성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나쁜 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대상의 본질을 도덕적으로 왜곡한다는 점이다. -248

 
자선의 역설은 어떠한 이기적 의도도 없이 타인을 도우려는 순수한 동기에 바탕을 둔 최상의 자선사회조차 기증자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무례한 일면이 있으며 어저면 모욕적인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62

 
당신이 식당 주인인데 마피아가 상납금을 지불하도록 강압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마피아 측이 손님을 많이 끌어줘서 상납금을 공제하고도 수입이 늘어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모욕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이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상납 거래를 받아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 착취와 모욕의 관계는 개념적이 아니라 인과적이다. -273

 
난민들에게 대라도 되는 것처럼 트럭에서 음식을 던져주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모든 수혜자에게 공평한 몫이 돌아가는지 확인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효율성은 단지 공정한 분배 유형을 확보할 가능성을 함축 할 뿐 인도적인 분배 태도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런 분배는 효율적이고도 공정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모욕적이다. (...) 정의로운 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이기도 해야 한다는 요구는 가치가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분배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가치가 분배되는 방식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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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8 1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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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8 1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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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4 1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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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하여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주명 옮김 / 필맥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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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아고라에서 여론조작을 했다고 수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는 한 가지다. 반정부적 행위라는 것. 또한 국방부가 불온서적을 지정한 것에 대해 헌법소원을 한 법무관 2명을 파면시켰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그야말로 표현의 자유, 사상, 양심의 자유가 절멸되는 듯하다.

책장에서 몇 달 전에 읽은 '자유에 대하여'(존 스튜어트 밀, 필맥)를 끄집어냈다. 한번쯤은 들어봤지만 읽어본 사람은 드문 책. 당췌 1800년대에 써졌다고 믿기지 않는 책.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른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에 대해 말하고자 이 책을 썼다. 이는 "개인에 대해 사회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격과 한계"라고 그는 말한다.(책 11p) 다시 말해 그는 권력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고 이 한계설정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한다. "신에 대한 도발은 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의 도발은 인터넷이 알아서 할 일이고 네티즌의 도발은 네티즌들이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이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발끝만이라도 그들이 따라간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끝으로 이 책에 따르면 자유의 암흑기였던 중세, 가장 관용적이지 않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악마의 대변자'라는 사람을 임명하여 성인을 인정할 때 성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주장하게 했다고 한다. 이 정부에게 그조차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악마의 대변자'는 언제나, 그리고 지금 더더욱 필요하다.   
참고로 밑줄 그어 놓은 몇 군데를 옮겨본다.(강조는 내가!) 

- 인민의 의지라는 것의 실제 의미는 인민 가운데 가장 수가 많거나 가장 적극적인 부분의 의지, 다시 말해 다수파 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수파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였다.(16p) 

- 오직 한 사람 말고는 인류 모두가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한 사람이 인류를 침묵하게 만들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만큼이나 인류가 그 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 만약 그 의견이 올바른 것이라면 그들은 오류를 진리로 바꿀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반대로 그 의견이 그릇된 것이라면 그들은 오류를 진리로 바꾸는 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커다란 이익이 되는 것, 즉 진리와 오류의 충돌을 통해 셩겨나는, 진리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과 보다 생생한 인상을 얻지 못하게 된다. (37p)  

- 어떤 문제를 자기의 입장에서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71p) 

- 삶이 하나의 유형으로 획일화될 때까지도 저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유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모두 다 불경하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더 나아가 극악무도하고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139p) 

- 해악은 정부가 개인이나 집단의 활동과 힘을 불러일으키는 대신에 자신의 활동으로 그들의 활동을 대체할 때, 그리고 정부가 그들에게 정보를 주고 조언을 하고 때로는 반박을 하는 대신에 그들로 하여금 속박속에서 일을 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비켜서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일을 대신 나서서 할 때 시작된다. (2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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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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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고 크레타 사람이 말하면, 그 말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일단 참이라고 가정하면 이 말을 하는 사람 역시 크레타 인이므로 거짓말만 할 것이고,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거짓이 된다. 반대로 거짓이라고 할 경우, 이 말을 하는 크레타 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문장은 참이 된다. 말하자면 이 문장은 참말이면서 거짓말이다. 무슨 말장난이냐고 하겠지만 논리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집합론적 역설이라고 한다. 역설은 불합리해보이지만 타당한 논증이다. 좀 어렵게 말해 ‘하나의 진술이 명백히 타당한 추론에 의해 두 개의 모순되는 결론을 낳을 때’ 생기는 게 역설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대체복무를 허용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수적인 집단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국가적·반사회적 행위로 국민개병제의 근간을 훼손”시킨다는 재향군인회 논평쯤은 예상하던 바이지만, 대선용 아니냐는 <조선일보>의 주장에는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쨌거나 눈길을 끄는 건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 한 목사는 “특정 종교에게 주는 특혜이므로 불쾌하다”고 반응을 보였다는데 또 한편 “종교를 이유로 대체복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특정 종교가 종교라는 것인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인지 영 헷갈린다. 단연 압권은 불과 며칠 전에 “봉사하러 아프간에 간 사람을 납치한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던 한국교회언론회의가 “봉사활동을 빌미로 포교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한 논평이다.


형법의 개선, 전쟁 감소, 유색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세계적 조직인 교회세력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다.


논리학에서의 집합적 역설에 일가를 이룬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80년 전에 했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연설로 같은 제목의 책에 실려 있는 글이다. 왜 러셀이 기독교인이 아닌지 알려고 책까지 사서 보느냐고? 읽어보면 꽤 재미있다.  

- 2007년 10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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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문법 - 민주주의총서 01
조효제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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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을 하고 논쟁해본 일은 없지만 대개의 편집자들처럼 격월간 <사람>(esaram.org) 편집인도 문법, 특히 맞춤법에 관한한 보수주의자인 듯하다. 좋게 말하자면 원칙에 충실한 것이지만 같이 잡지를 만드는 처지로서는 영 피곤한 일이 아니다.

문법도 법이기에 늘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들과 긴장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일반 법률과는 달리 문법은 언어대중의 변덕과 무원칙 앞에서 무기력하게 후퇴를 거듭한다. 본래 말과 글이란 옳고 그르고 하는 판단의 대상이기 이전에 소통의 도구인 탓이다. 하지만 말과 글의 질서가 혼란스러울 때 소통이 왜곡되거나 아예 차단된다는 데 문법의 존재이유가 있다.

저자가 “뜨거운 주제의 건조한 분석”이라고 밝히고 있는 『인권의 문법』은 인권을 둘러싼 소통을 염두에 두고 나온 책이다. 언어를 배울 때 문법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듯 이 책은 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고민해봄 직한 문제들을 대부분의 이론서들과는 달리 목에 힘주지 않고 조목조목 짚어낸다.

이 책의 미덕은 이론가 혹은 저자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권위를 벗어버린 겸손함과 거기서 나오는 친절함에 있지 않나 싶다. 또한 “필자는 언젠가 지하철에서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라는 광고를 본 적도 있다”는 각주처럼 통상적인 주석과는 다른 저자의 코멘트를 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소통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대중과 눈을 맞추고 인권운동과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이 딱딱한 문법책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어쩌면 이 혼탁한 속세에서 인권의 통속화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400여 페이지가 예상외로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문법을 잘 안다고 해서 말하고 쓰기가 절로 되는 건 아니란 사실을 이 책의 저자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 2007년 8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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