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망각과 싸움이다. 다들 알다시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도 기억도 기록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기억되기를 바라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불멸을 꿈꾼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거대한 구조물과 초라한 비석을 통해, 그리고 기록을 통해 인류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인간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욕망하는 까닭은 자신의 존재, 자신의 행위, 나의 삶이 의미 없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왜곡과 싸움이기도 하다. 온전한 기억이란 없다. 개인의 성향,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억은 잊혀지기도 하고 입맛에 따라 편집되기도 한다. 굴절되고 변현된 기억을 고스란히 기록할 방법 또한 없다. 기억을 기록하는 것은 왜곡 없는 기억을 통해 진실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왜, 어떻게 기억이 왜곡되었는지를 통해 진실에 다가서고자 하는 노력이다. 기억이 기록되지 않는 이상, 나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이 되지 않는 이상 어떤 불화나 갈등도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공동체는 기억의 공유를 통해 지속 가능하다. 공유된 기억이 없는 공동체는 위험하다. 한편 하나의 기억만을 공유한 공동체, 단일한 기억만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더욱 위험하다.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권력과 싸움이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썼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역사교과서 해프닝은 권력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며 역사와 교육이 기억의 정치 현장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가만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든 집단기억으로 무엇을 채택하고 공인할 것인가는 치열한 정치 투쟁이고 권력 다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120여 년 전 밭을 갈던 농민이 무슨 생각으로 전봉준 옆에서 죽창을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생각은 알 수 있어도 같이 태극기를 들었던 넝마주이의 생각은 알 길이 없다. 4.19의 희생자는 대학생보다 도시빈민이 압도적이었음에도 여전히 ‘학생의거’로 기억된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공인된 역사뿐만이 아니라 국가폭력의 패해자 담론 속에서도 소수자의 기억은 무시되고 배제되기 쉽다. 


모잠비크 저항운동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기억의 장>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소중한 이야기다. 거기에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고 즈금은 망각과 싸우고 있는 이들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침묵한 채 폐허가 된 콘크리트 건물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 이야기를, 그 기억을 이제 나는 기억하려 한다. 그와 함께 그 기억들이 왜 그동안 기록되지 못했는지, 왜 이제야 이야기되고 기록되는지 나는 궁금하다. 


- 2017년 서울 인권영화제 <기억의 장> 인권해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메리 린리 테일러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할아버지의 시대. 좀 더 구체적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아쉬움을 압도하는 재미. 회고록이지만 결코 잘난 체 하지 않는 여성 특유의 감성과 섬세함에 술술 읽힌다. 조선 말, 근대에 꽂히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도련님』의 시대 1~5 (완결) 세트 - 전5권 -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왜 일본 만화인데 캔디는 미국을, 붉은돼지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나? 심지어 주인공도 서양인... 제국의 경험 때문일까? 이런 의문에 지인이 추천해준 만화. 일본 문화(만화)의 깊이와 경지를 짐작하게 해준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판 '목소리 소설'


"인간성이 소멸된 시대에, 인간성을 표현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방식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12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인홀드 니버의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보자, 내가 수용소에서 했던 두서없는 생각의 편린들이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오 주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잘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104쪽 각주


인간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능력은 지적인 재능보다도 훨씬 모호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수용소에서 제기했던 질문이었다. "만약 우리가 옛날처럼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듯, 인간 역사에 민주주의가 발흥되도록 한 것은 인간의 선함과 합리성이 맞을지는 몰라도, 우리 소용소의 경우는 달라.이곳에 민주주의가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의 불평과 고집스러움과 노골적인 분노 때문이었지. 민주주의는 강한 자로 하여금 힘을 포기하도록 강제하고, 트집 잡기 좋아하는 대중으로 하여금 힘과 함께 책임감을 가지도록 만들지. 다른 형태의 정부보다 민주주의가 우월한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일 거야. 민주주의는 위로는 탐욕스러운 독재자가 일어날 기회를 줄이고, 아래로는 성난 반역이 일어날 기회를 줄인다."-250쪽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놀란 것은, 법이라는 것이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따라서 법의 제1 기능은 과거의 내 생각처럼, 추성적이고 무엇이 옳고 공평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을 통제하여 그 이기심이 사회를 파괴하는 데 사용되기보다 사회를 창조적으로 이끄는 데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27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