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출생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는 상상력이 풍부한 화가였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그와 비슷한 상상력을 가진 화가들의 그림을 미술사가들은 ‘초현실주의 그림’이라 부른다.

막스 에른스트나 살바도르 달리가 알만한 인물들이다.

마그리트는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

 

 “그게 왜 꼭 관으로만 보였는지 모르겠어. 마네가 자기 발코니에 세워 놓은 허연 인물들이 나한테는 마치 관으로 보였단 말이야. 그래서 마네의 발코니에다 관을 그려 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편지의 내용대로 마그리트는 실제로 <조망. 마네의 발코니>(1950)라는 작품에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83)가 남긴 <발코니>(1868/69)라는 그림에

못질이 선명하게 보이는 네 개의 관을 그려 넣었다.

 

The Balcony

The Balcony, 1868-69,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게다가 어떤 관 모양은 앉아 있는 형체를 그대로 빌려왔다.

그 이상한 관들만 아니라면 여지없이 마네의 것과 똑같은 발코니이다.

양쪽으로 난 덧창이며, 발코니의 난간 모양 그리고 왼쪽 구석을 차지한 화분까지

마그리트는 선배화가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Perspective II: Manet's Balcony

Perspective II: Manet's Balcony, 1950, oil on canvas, Museum van Hedendaagse Kunst, Ghent

 


마네가 그린 발코니에는 화가와 잘 알고 지내던 실존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마네의 제자이자 이후 이름을 날린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가

한쪽 손에 부채를 든 채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다.

Berthe Morisot

Berthe Morisot  (1841-1895)

품에 우산을 낀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서있는 다른 여성은

바이올린 연주자 파니 클로스(Fanny Claus).

두 여성 사이에 자리한 정장 차림의 인물은 당시 풍경화가로 활동했던

앙투안 기예메(Antoine Guillemet).

 

저 뒤쪽 그늘에 가린 뒷배경에는 마네의 아들 레옹(Leon)이 뭔가를 발코니 쪽으로 내오고 있다.
이 두 개의 발코니에서는 시간의 간격을 넘어 그림이 그림을 인용하는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의 상상력에 자신의 그림을 인용당한 마네도

남의 그림을 인용한 건 마찬가지다.

기괴한 상상력 대신 이번에는 감사의 마음이 화가의 붓을 움직였다.

 

마네가 당대 프랑스의 유명 문인 에밀 졸라(Emil Zola)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1868년.

일 년 전 열렸던 만국박람회 행사 중 하나였던 살롱전 참가 신청에서 재차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살롱파들의 냉혹한 비평을 조소라도 하듯,

에밀 졸라가 마네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 것도 이즈음이다.

아무도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았던 때,

에밀 졸라의 용기 있는 발언은 화가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을 안겨주었다.


Zola writing at the big table he used as a desk


“친애하는 졸라 씨.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지만 당신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없군요.

당신이 발표한 글로 인해 한 사내의 능력이 인정받음으로써

그가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당신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고맙습니다!

5월 4일자 당신의 특별한 글에 나는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많습니다.

어디서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매일 5시 30분부터 7시까지 카페 드 바드에 있답니다.

곧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뜻을 전하며.”

 

마네가 졸라에게 보냈던 1866년 5월 7일자 편지의 전문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곧이어 마네는 <에밀 졸라의 초상화>(1868)를 그려냈다.

 

Portrait of Emile Zola

Portrait of Emile Zola, 1868

 

화가는 감사의 뜻으로 이 그림을 졸라에게 선물했고,

이 시인의 서재 벽 한 면에는 마네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가 늘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졸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이 남편의 뜻대로 루브르 미술관에 기증을 했고,

1986년 이후 이 초상화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을 걸어둘 만한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관전 살롱에서 거부당했었던 스캔들의 화가 마네의 작품은

이렇게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미술관의 한 자리를 떳떳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목덜미까지 오르는 까만 외투와 회색 줄무늬의 바지정장을 입은 졸라는 화면을 등지고 앉아,

오른쪽으로 약간 얼굴을 돌려 옆모습을 드러냈다.

문인답게 한손에 커다란 책 한권을 펼쳐들었다.

서재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느 글쟁이의 책상이 그렇듯, 어지럽게 책들이 수북히 쌓여있고,

손에 닿기 쉬운 곳에 펜촉이 꽂혀 있다.

별 장식 없는 검은 바탕의 벽면에는 흥미로운 그림들이 걸려있다.

에밀 졸라가 생전 미술작품을 수집하는데

그리 열성적인 편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림 속에 걸린 그림들은 순전히 화가의 창안이다.
마네는 화면 오른쪽 귀퉁이에 그림 세 점을 나란히 그려두었다.

 

우선 살롱파들로부터 신랄한 비평을 받았었던 화가 자신의 <올랭피아>가 보인다.

Olympia

Olympia, 1863,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그 옆으로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토요쿠니 쿠니사다 2세의 제자였던

우타가와 쿠니야키 2세의 목판화가

그리고 두 그림 뒷편으로 반틈 가려진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술마시는 자 (바쿠스의 승리)>가 눈에 들어온다.

화면 왼편에 걸린 병풍은 분명 동양 산수화의 전형적인 양식을 띄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살롱전에 참가하기 위해 출품했던 <올랭피아>(1863)는

살롱파들로부터 가장 격한 비판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작품이었다.

이를 두고 졸라가 발표했던 유일한 옹호의 비평문을 마네는 잊을 수 없었다.

<올랭피아> 속에 그려진 나체의 여인은 다소곳이 서재를 지키고 있는

문인 졸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애틋한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화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초상화에서 보이는 갖가지 이국풍의 물건들은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파리 미술현장에서 일하던 화상, 미술가, 수집가들을 사로잡았던

일본문화의 인기를 증명해 보인다.

스모 선수의 모습이 담긴 채색목판화,

길다란 족자 모양의 병풍, 펜촉을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된 팔각모양의 도자기 등에는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 일본관이 선보였던 여느 전시품들의 이미지가 그대로 담겨있다.


마네는 이밖에 항상 자신의 예술의 모범이 되어 주었던

스페인의 바로크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를 잊지 않았다.

<풀밭 위의 식사>(1863) 이후 연이어 <올랭피아>가 격한 스캔들을 몰고오자

화가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훌쩍 스페인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거기서 발견한 벨라스케스의 예술은 화가 마네에게 신선한 자극을 선사했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제작한 <피리부는 소년>(1866)이

살롱 심사위원들로부터 보란 듯 거절을 당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The Fifer

The Fifer, 1866,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벨라스케스의 예술로부터 얻었던 영감은 마네의 예술을 살찌우는 토양이 되었다.
<에밀 졸라의 초상화>에 인용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당시 유행했던 동판 복제품을 보고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프란시스 고야가 그렸던 복제화가 가장 유명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여기 등장한 포도주의 신 바쿠스,

즉 디오니소스는 <올랭피아>의 자세로부터 떠오르는 비너스와 함께

태고적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인문학자의 초상화에 어울리는 도상학적 인용이다.


한편, 마네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던 벨라스케스 또한

자신의 작품에 다른 대가의 작품을 인용한 건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실 잣는 여인들>(1658).

The Spinners (detail)

The Spinners (The Fable of Arachne), detail, 1657,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이 그림은 당시 화가들의 필독서로 통했던 오비드의 『변신』에 등장하는

아테네와 아라크네의 실잣기 시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뛰어난 실잣기 기술을 뽐내며,

감히 예술과 공예의 여신 아테네에게 내기를 걸었던

리디아 출신의 처녀 아라크네의 이야기는 벨라스케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벨라스케스는 화면을 이야기의 순서대로 두 개의 층으로 나누었다.

먼저 전경에 중년의 여인으로 변신한 아테네와 함께

아라크네가 실을 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실을 감는 물레의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 여인의 물레는 힘껏 돌아가고 있다.

이 시합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잣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은 두 개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화면 저 뒤쪽으로 열려있다.

연극무대처럼 재현된 그곳에는 어느새 아테네 여신이 투구와 방패를 갖추고

신에게 도전했던 겁 없는 여인에게 가차 없이 처벌을 내리고 있다.

여신이 힘껏 치켜 올린 오른팔을 아래로 휘둘리는 순간

여인의 모습은 간데없고 보잘 것 없는 한 마리 거미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은밀한 방에는 널찍한 양탄자 그림이 하나 걸려있다.

여기에 벨라스케스는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대가의 그림을 살짝 그려 넣었다.

이태리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미술사의 거장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77~1576).

그의 작품 중에서도 아테네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바람둥이로 이름난 제우스 신이

페니키아 왕의 딸 오이로파를 취하기 위해

하얀 소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오이로파의 약탈>(1562)이 인용되었다.

 

Rape of Europa
1559-62
Oil on canvas, 185 x 205 cm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Boston

당시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관리하던 스페인 왕정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화가는 대가의 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묘한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선배화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감탄과 경의의 마음이 대가의 명작에 도전하고픈

또 다른 욕망을 간신히 감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 속에 그림을 인용하는 현상은,

미술의 역사를 거꾸로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20세기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19세기의 에두아르 마네를,

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는 17세기의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를,

벨라스케스는 이어 16세기 이태리 베니스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를 인용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에 밑줄을 긋듯,

이들 화가들은 제 마음에 드는 명화들에 색과 선으로 이루어진 인용부호를 달았다.

참다운 모방은 값진 창작을 낳는 법.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미술이라는 이름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러한 이치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이끄는 ‘그로테스크’의 세계에서

미술창작의 숨겨진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zzica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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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17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 갈게요~~^^*

mira95 2004-07-1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