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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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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이때 이명박 정부는 여수엑스포 예산의 대부분을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지 않아 불평을 사고 있다. 여수시민들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엑스포를 반납하자”며 울분을 토로한다. 과거 대전엑스포에 쏟아부었던 국가의 관심과 노력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형님예산이며 영부인예산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데 박람회 예산은 바다에 ‘풍덩’ 하고 빠졌을까? 아무튼 바다를 테마로 여수엑스포를 성공적인 해양박람회로 만들겠다던 여수시민들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때 내 무릎에 <바다>가 펼쳐졌다.  

쥘 미슐레. 그는 프랑스인이다. <프랑스혁명사>를 비롯해 방대한 역사서를 남기고 중세사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역사를 구술체로 풀어내 대중들의 접근성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바다>라는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성이기도하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조금 불편한 부분이 없잖아 있을 수 있다. 그는 19세기(1798~1874)를 살다간 사람이었으므로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완고하고 편협해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의 지점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또 그는 어쩔 수 없이 서양인이었으므로 갖게 되는 지정학적 한계로 인해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에 그는 지나친 남성우월주의자다. 그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서술하는 북해와 노르망디의 해변은 우리에겐 어떠한 영감이나 감흥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슐레의 <바다>는 <다음백과사전>이 소개한 바처럼 ‘최상의 산문작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구’들의 결정체임에 부족함이 없다. 진보에 대한 예언자적 믿음과 혁명적 헌신으로 <프랑스혁명사>를 썼던 그가 이토록 서정적인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실로 연애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는 1849년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아테나이 미알라레와 재혼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신부는 그의 속에 잠들어있었을 태초의 신비와 경이를 이끌어내었을 터이다. 그에게 바다는 ‘어디에서나 장중하고 무서운 모습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또한 ‘더욱 새롭고 행복한 영감을 주는’ 바다는 매혹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맥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든 아니면 경이 때문이든 그의 맥박은 매혹적인 바다에 뛰어드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바다는 어떤 짓을 해도 다 용서해주고 관용을 베풀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에게 바다는 모든 생명들의 고향이다. “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생명을 낳은 바다는 인간이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 참을 줄만 안다면 그 복 받은 양식을 기꺼이 내놓을 것이다.”

진보적 열정과 혁명적 헌신으로 무장해 <프랑스혁명사>를 서술했던 미슐레 같은 사람이 행복에 도취된 영감으로 자연의 찬가를 썼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에게도 이런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 정약전이 생각난다. 그는 <자산어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해부해 그린 물고기 뼈의 모양과 개수의 정확성은 오늘날 해부학의 관점에서도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정약전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어쩌면 <자산어보>는 그가 그의 형 정약종과 동생 정약용과 더불어 천주교도로 몰려 신유박해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절해고도에서 만난 친구와 더불어 물고기를 잡으며 칼로 배로 따고 뼈를 갈라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에 비해 미슐레는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부유하지는 못해도 자식 하나 공부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적인 총명과 노력하는 탐구심은 그에게 좋은 직업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그는 인생의 말미에 어린 신부와 결혼함으로써 더없이 행복한 영감의 바다에 빠지는 행운도 누렸다. 정약전과는 완전 딴판의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약전이 절망에 빠져 바다 속 생물을 해부하고 있을 때, 미슐레는 바다가 던져주는 경이를 마주하며 자연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슐레에게 어떤 고뇌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충분히 고뇌했다. ‘위험천만한 먼바다에서 고기잡이하며 사는, 조금 슬프고 특이한 작은 어촌마을’을 사랑하는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겨울바다가 얼어붙은 삭풍으로 후려치는 창문’ 아래에서 긴 기다림과 마주했다.

그 긴 기다림이 아름답고 젊은 신부가 가져다준 서정적인 영감과 만나면서 ‘최상의 산문작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구’들로 이루어진 <바다>가 탄생한 것이다. 그에게 바다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바닷가에서 바라보기에도 장중하고 두려운 존재이기만 했을까?

이런 해석에 불만의 토를 다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바다는 남들처럼 생명의 보고다. 인간을 위해 무한한 자원을 간직한 생산물의 저장고. 그래서 “모든 순수한 생명은 행복의 순간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바다에도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행복의 순간을 누릴 권리란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줄 영원을 위한 잠깐의 휴식일 뿐이다. 말하자면 “순수하게 고래만을 위한 간절한 평화”란 종의 보존을 위한 것이다. 어떤 특정한 생물의 멸종이란 인간에게도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 평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을 잡아야 하지만” 미래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우선은 살려두어야 하는 것”이다. 근본적 환경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미슐레의 자연예찬이나 멸종생물옹호론이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다.

더 큰 훼손을 위해 잠깐 훼손의 기쁨을 참자는 전략적 개발자의 논리라고 공박해도 크게 다툼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라는 것을 상기하자. 중상주의의 깃발을 단 산업혁명의 증기선들이 대양으로 뻗어가기 시작하던 시대란 사실을.

미슐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순수한 생명은 행복의 순간을 누릴 권리가 있다. 각자가 아무리 열등한 자리에 있어도 자신의 좁은 한계를 넘어, 자신을 뛰어넘어, 어두운 욕망을 넘어, 영원히 지속될 무한 속으로 침투할 순간을.”

그리고 이어 말한다. “인간의 협력이 얼마나 간절한가! 자연의 순리에 따르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면 축복받고 심연에서 별빛이 비치리라. 그렇게 하느님의 눈길을 받지 않을까. 하느님이 생명을 축복하면서, 이 지상에서 누릴 권리의 몫을 가장 작은 놈들에게도 나눠주지 않을까!”

19세기에 이미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인지한 미슐레는 멸종생물 옹호론과 자연예찬론을 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불도저와 포크레인으로 강을 파고 뒤집어 모든 생명체를 죽여 없앤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입산 생명체와 로봇물고기가 대체된다.

미슐레가 보기에 자연스럽게 강물이 흐르는 것이 순리일 테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보로 강을 막아 물을 가두는 것이 순리라고 강변한다. 그것이 생태계를 보존하는 길이요, 인간과 자연이 함께 평화와 행복의 순간을 누리는 권리라고 주장한다.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공장을 지으면서 녹색성장을 말하는 것이 오늘날 세태다. 하나의 도시(경남 창원)에서 람사르 총회가 열리는 시각에 동시에 바다매립계획이 발표되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다. 이를 두고 미슐레가 한마디 한탄을 늘어놓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항변하지 않을까.

“강을 파고 보를 쌓아 물을 가두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휴식을 주는 행위 아닌가요? 모래를 다 걷어내고 나면 모래무지나 꺽지 같은 물고기들에겐 그야말로 쉬지 않는 평화가 주어진 것 아닌가요? 새로운 환경엔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는 법이죠.” 난센스지만 어쩌면 그들은 이런 말도 쉽게 할만한 사람들이다.

미슐레는 말한다. “이렇듯 무자비한 싸움에서 인간에게 홀대를 받으면서도, 바다는 되레 인간에게 관대하며 선행을 베푼다. … 무섭고 저주받은 바다는 아무런 담보도 없이 그를 반겨 자기 품에 안고 혈기를 되찾아준다.”

코앞에 닥친 세계인의 축제 여수엑스포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한없이 서글퍼진다. <바다>의 역자 정진국의 말처럼 “바다에 둘러싸여 살고 수많은 아름다운 섬에서 사는 우리”는 그 드넓은 바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특히 국회의원님들.  

* 이 글은 <100인닷컴(100in.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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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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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직 제가 정신이 좀 혼미해서 그런지... 추천도서를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많이 헷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충 여기에다 이렇게 몇 권의 책에 대해 추천 이유에 대한 변을 적어 올리면 되는 것인 줄은 알겠는데, 그래도 여전히 혼미.  

그리하여 오늘은 일단 책 한 권 추천 했다는 실적만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물러갑니다.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이 책 표지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지난 주에 1박 2일 일정으로 경남팸투어를 기획하고 운영할 기회가 있었는데, 김두관 경남도지사와 블로거의 간담회도 있었습니다.  

 그때 초청한 블로거 중에 한 분이 책 전문 리뷰 블로거였는데, 이 책을 김 지사에게 선물하더군요. 읽어 보시고 도정에 참조하라나요? 그래서 저도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꼭 이 책이 당첨되면 좋겠네요.  

그럼 김두관 지사와 같은 책을 같은 시기에 읽고 리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리뷰 쓰기도 훨씬 쉬워지겠네요. 김 지사에게 고함, 뭐 이런 식으로(좀 건방진가요?), 아무튼,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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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 2010-11-0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공... ^*^ 하루 늦었네요. 게다가 10월 출간도서인지도... 모르겠고요.
 
<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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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나는 왜 쓰는가>에서 조지 오웰은 그렇게 말했었다. “작가가 글을 쓰는 첫 번째 동기는 ‘순전한 이기심’ 때문이다.” 그리고 오웰은 그 ‘순전한 이기심’에 대해 친절하게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허영심.’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많이 배워야 한다거나, 그래서 허영심을 채워야 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엉뚱한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늘 내가 읽고 주제넘게 서평이란 걸 써야 하는 책, <책을 읽을 자유>의 프롤로그를 통해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움을 통해 얻는 지식은 사람에게 자신감을 준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조지 오웰도 숱한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그런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책을 읽을 자유>의 저자 이현우 역시 그 비슷한 감흥을 두툼한 책의 첫머리 프롤로그에서부터 내게 주었다. 아주 예감이 좋다. 책을 읽기도 전에 뭔가 커다란 수확을 거둔 농부처럼 마음이 풍성하다.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아.”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럼 지금껏 수많은 위인들이 특별한 책 한 권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처럼, 어떤 한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했다고 하는 것은 그럼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라딘 서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 캡쳐 이미지
 

이 멘트는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한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국인의 독서 습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독서캠페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이 한 권의 책만 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가치를 정립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걸 이 저자는 매우 자신 있게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어 그는 또 하나의 특이한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인류는 원래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것이다.

물론 이 특이한 주장 역시 그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책 읽는 뇌>라는 책의 저자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는 덧붙여 인류가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체 인류사에 견주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고, 대중적인 독서는 불과 100여 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너무 당연한 말이라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독서 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옵션’이다. “인간은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책을 읽을 자유>의 저자 이현우는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블로그의 주인장으로 더 유명하다. 나도 사실은 이현우란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을 뿐이며 로쟈란 이름부터 먼저 알았다. 특별히 지적 허영심이 강한 내게 그의 블로그는 매우 인상적이며 매력적이었다. 

<책을 읽을 자유>는 로쟈의 꾸준한 블로그 활동의 결과물이다. 몇 년 동안 알라딘 서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과 <한겨레>와 <경향신문>, <시사인>등에 실었던 서평이 보태졌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표현처럼 매우 ‘불룩한’ 책이 되었다. 무려 600여 페이지에 달한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600여 페이지를 달리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제, 즉 한 권의 책을 위한 서평에 보통 3페이지, 어떤 경우엔 겨우 1페이지 정도의 가벼운 산책만 하면 된다. 물론 좀 더 긴 것도 가끔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어려운 인문학 주제를 다룬 책들을 이렇게 가볍게 산보하듯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그러다 어떤 하나의 서평에 반해서 선뜻 그 책을 사서 달리기를 해볼 결심을 한다면 그야말로 더 큰 행운을 안게 되는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 책 읽기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에 김치를 먹을 때’처럼 행복한 일이다.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를 만나는 일이다. 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독서에 처형된’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이 선택 받은 저자처럼 책이 만든 단두대에 행복하게 목을 들이밀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독서를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이닦기처럼 습관처럼만 할 수 있다면 족하다. 책을 애인처럼 늘 곁에 두고 자주, 혹은 가끔이라도 애무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한 일이랴.

그러다 혹시 알겠는가. 정말 우리도 어느 순간, 행복하게 자청하여 목을 들이밀 ‘단두대의 칼날’을 얻게 될지. 그리하여 진정한 영혼의 거처를 만나게 될지도. 물론 저자의 넋두리처럼 ‘화려한 정신의 맨션’으로 안내 받는 게 아니라 ‘맨땅에 헤딩’할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ps1;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도 돈만 굴리면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발악하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라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정직한 토로다.” <379p,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사계절>

    위 글을 읽으면서 ‘책을 읽을 자유’는 고사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업 수험서를 팔 자유’밖에 없이 ‘자본의 착취’로부터 호명 받을 날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오늘날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정신들의 거처’니 ‘양식들의 창고’니 논하는 것이 배부른 헛소리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당장 육신의 생활고 때문에 영혼의 거처를 포기한다는 건 가엾은 일이 아닌가. 인류를 다른 생명체들, 예컨대 “오징어나 말미잘과 다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독서다. 인류에게 주어진 이 ‘특별한 옵션’을 포기하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더 불행한 것은, 아직 이 세상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특별한 옵션’을 집행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책이 읽기 싫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ps2; 책을 1페이지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내키는 대로 어느 페이지건 심지 뽑듯이 뽑아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마음대로 읽을 자유’가 있다.  

  • * 이 서평은 <100인닷컴>과 블로그 <파비의 칼라테레비>에도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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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0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신간도서로 확정된 순간, 걱정 많이 했었습니다.
예전에 로쟈님의 전작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서,,^^;;
이번 신간도 어렵지 않겠냐 생각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전작보다는
내용이 쉽고 단상 형식이라서 좋았습니다. 일부는 아직 기본지식이
있어야하는 글도 있지만요.. 그래도 파비님처럼 순서대로 읽기 보다는
관심이 있는 챕터나 키워드를 골라서 읽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지금은 이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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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어린 시절 으레 이발소마다 걸려 있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시를 쓴 푸슈킨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그가 쓴 <동물농장>은 이른바 ‘북한공산집단’과 대치하고 있는 ‘자유대한’에겐 가장 탁월한 반공교육 자료였다.

책이 아니라도 만화로 된 <동물농장> 한번 안 읽어보고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가 투철한 사회주의 작가이며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지양하는 새로운 민주적 사회주의를 꿈꾸었다.

영국에서 명문사립학교를 나온 그였지만 대학을 포기하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 5년 동안 제국경찰 간부로 근무하게 되는데, 제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압제의 일원’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만두게 된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피억압자가 될 필요가 있었던’ 오웰은 런던의 빈민가에서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그의 첫 번째 문학 에세이 <스파이크>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글이 조지 오웰의 수많은 에세이 중 단 29편을 모아놓은 책 <나는 왜 쓰는가>의 첫 번째 장이다.

 

조지 오웰은 1999년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 BBC방송이 실시한 조사 가운데 ‘지난 천년 간 최고의 문학가 부문’에서 세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찰스 디킨스가 4, 도스토예프스키가 8, 세르반테스가 9위였으니 그의 세계문학사적 비중을 짐작할만하다.

오웰의 글은 매우 명징하고 맑아서 술술 읽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그는 그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 두 번째에다 올린 ‘미학적 열정’에 이끌려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해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조지 오웰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로 ‘순전한 이기심’을 첫 번째에 올렸는데, 그것은 매우 솔직한 진술이었다. 여기서 이기심이란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 ‘허영심’, ‘자기중심적’ 패턴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기심, 허영심과 자기중심적 욕구가 없다면 대부분의 작가는 글쓰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는 또 이에 비해 “대부분의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으며 대부분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탁견인가. 만약 “나는 허영심으로 유명해지고자 글을 쓰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이란 말은 작가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똑똑해 보이거나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거나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허위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의 동기로 오웰은 1) 순전한 이기심 2) 미학적 열정 3) 역사적 충동 4) 정치적 목적을 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나는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 번째 동기를 능가하는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빈곤과 좌절을 겪으면서 노동계급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버마에서 제국경찰로 일해본 덕에 제국주의의 본질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이런 경험들은 그가 행동하는 지식인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스페인내전이 일어나자 오웰은 프랑코 파스즘에 맞서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책상머리 좌파들이나 소련을 떠받드는 공산주의를 경멸했다. 그가 보기에 히틀러나 프랑코 같은 독재자들과 러시아 공산당은 다른 점이 없었다.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동물농장> <1984>이 한국에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지만(미국의 정보당국이 판매촉진에 앞장섰다는 설이 있다), 반공을 앞세워 독재와 탄압을 일삼던 대한민국의 현실로 보건대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했다.

오웰은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반대했다. 나찌의 파시즘과 스탈린식 공산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도 그에겐 전체주의였다. 오웰이 추구했던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는 그의 이상주의를 알리기 위해 글을 썼다. 그는 <나는 왜 글을 쓰는가>에서 이점을 분명히 밝혔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에 난센스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없”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고 주장하는 오웰은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적 예술성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고민이 묻어나는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지만, 그 이전에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지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보는, 낱말들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희열을 느끼는 이기심과 허영심으로 가득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였던 것이다.

<한겨레 출판사>가 조지 오웰의 수많은 에세이 중에 29편을 엄선해 <나는 왜 쓰는가>란 제목으로 책을 내놓았다. 오웰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썼던 수많은 에세이들 중 29편을 시간대 순으로 나열한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틈엔가 조지 오웰이 살아온 길, 변화해온 과정들을 만날 것이다.

또한 독자들은 더불어 ‘전 생애에 걸쳐 인습과 관성을 거부한 오웰의 삶으로부터 나온 사유’와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성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조지 오웰은 과거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며 내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다. 1950 1, 오웰은 오랫동안 앓던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 책의 번역자 이한중은 역자 후기를 통해 조지 오웰로부터 받은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이렇게 전한다. 

“오늘 우리가 작가 오웰에게서 구할 수 있는 미덕은 무엇일까?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심지어 업으로든 아니든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오웰이 주목한 언어의 타락에 대하여 오늘 우리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젖줄에 비유되는 강을 파헤치고 댐을 쌓아 물을 가두는 일을 ‘강 살리기’라 부르고 ‘녹색’ 뉴딜이라 일컫는다. 오웰은 말한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죽이면서 살린다고 하고, 나무와 습지를 파내면서 ‘녹색’이라고 하는 것은 <1984>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선전을 담당하는 기관이 “전쟁은 평화/자유는 예속/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전쟁이 나도 평화인 줄 알고, 노예가 되어도 자유로운 줄 알고, 모르는 게 자랑인 줄 알며 살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인터넷신문 <100인닷컴>과 블로그 <파비의 칼라테레비>에도 함께 싣습니다.  

<나는 쓰는가> 목차  

스파이크 The Spike (1931/04)
교수형 A Hanging (1931/08)
코끼리를 쏘다 Shooting an Elephant (1936/가을)
서점의 추억 Bookshop Memories (1936/11)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Spilling the Spanish Beans (1937/07, 09)
나는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Why I Joined the Independent Labour Party (1938/06)
마라케시 Marrakech (1939/12)
좌든 우든 나의 조국 My Country Right or Left (1940/가을)
영국, 당신의 영국 England Your England (1940/12)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Wells, Hitler and the World State (1941/08)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Looking Back on the Spanish War (1942/가을)
시와 마이크 Poetry and the Microphone (1943/가을)
좋을 대로 As I Please (1944/01)
민족주의 비망록 Notes on Nationalism (1945/05)
당신과 원자탄 You and the Atom Bomb (1945/10)
과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Science? (1945/10)
문학 예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 (1946/01)
행락지 Pleasure Spots (1946/01)
물속의 ” “The Moon under Water” (1946/02)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1946/04)
두꺼비 단상斷想 Some Thoughts on the Common Toad (1946/04)
어느 서평자의 고백 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 (1946/05)
나는 쓰는가 Why I Write (1946/여름)
정치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Politics vs. Literature: An Examination of Gulliver's Travels (1946/09~10)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How the Poor Die (1946/11)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Lear, Tolstoy and the Fool (1947/03)
정말, 정말 좋았지 Such, Such Were the Joys (1947/05)
작가와 리바이어던 Writers and Leviathan (1948/03)
간디에 대한 소견 Reflections on Gandhi (1948/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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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0-11-0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리뷰를 올리다니요?...으힝
저는 이제 50페이지 정도 읽었는데...
파비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파비 2010-11-02 15:56   좋아요 0 | URL
책이 재밌더군요. 문체도 편하고... 그러다 보니... 조지 오웰에 대해 새로운 걸 알게 돼 기뻤습니다. <책을 읽을 자유>도 재밌겠어요. 제가 원하고 바라는 문체더군요. 역시 저도 오웰의 말처럼 허영에 가까운 사람인 거 같아요. ㅎㅎ 우선 보기 좋은 떡을 좋아하거든요.

cyrus 2010-11-0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의 작품들이 국내에 많이 읽혀졌던 이유 뒤에는 미국 연루설도 있었군요.
처음 알게된 사실입니다. 저도 오웰의 책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파비님의 글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얻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파비 2010-11-02 15:59   좋아요 0 | URL
연루설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정설인 듯... 하더군요.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 폭발적이었다네요. 뭐 보통 우리들도 그러지요. 우리 이야기 나오는 책 있으면 일부러 사서라도 돌리고픈.. ㅋ 고맙습니다. ^^-

자음과모음 2011-03-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있는 중에
다른 분들의 리뷰를 참고 하던 중 들렸습니다.
앞으로 책을 읽어 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파비님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마을이 학교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마을이 학교다 -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 박원순의 희망 찾기 2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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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세상을 바꾸려면 교육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운동 중에 하나가 대안학교 운동이다. 소셜디자이너란 이름으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박원순이 그 대안학교들을 둘러본 감상과 거기에서 발견했다는 희망을 들고 왔다.
 
「마을이 학교다」. 박원순이 발견한 희망은 이 책에 담겨있다. 그는 우리 사회에 깊게 드리운 절망의 그늘과 좌절의 한숨 소리에 탄식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맞이한 새로운 밀레니엄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후퇴하고, 공동체는 회색의 암담한 미래로 채색되고 말았다.”

교육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교육은 무너지고, 사교육이 공교육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가계는 사교육비 부담으로 휘청거린다. 박원순은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의 새순들이 곳곳에서 돋아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교육에서 찾을 수 없는 희망을 대안교육에서 찾고 있었는데, 이미 네트워크를 이루고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발견한 것이다. 박원순이 둘러본 20개가 넘는 학교들은 실제로 기쁨과 희망이 충만해 있었다.

대안학교.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대안학교란 어떤 것일까? 제도권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혹은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특별한 학교? 아니면, 제도교육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려는 시도?

어떤 정의든 기존 교육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운동인 것만은 분명하다. 「마을이 학교다」에 등장하는 대안학교들은 하나같이 행복이 넘쳐났다. 우선 교사들이 가장 행복해보였다. 긍지와 자부심으로 넘쳐나는 교사, 그들이야말로 대안교육의 풍족한 거름이 아닐까. 

대안교육으로 가장 덕을 많이 보는 사람들은 학생과 학부모들일 것이다. 우선 학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고도 보다 양질의 제대로 된 교육을 아이들이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더 이상 주입식 교육의 저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대안학교들이 초등학교 과정에 집중돼 있었던 것이다. 행복이 넘쳐나는 교육,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지식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물론 풀무학교와 이우학교처럼 중등학교 과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풀무학교는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1호로 인정받는 학교다. 1950년대부터 그 명맥이 이어왔으니 역사도 오래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이것이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이다. ‘더불어 사는 평민’을 배출하는 것이 이 학교의 교육철학이다. 이우학교는 풀무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민족사관고가 생각났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튼 아직 우리나라 현실에서 대안교육이 성공할 수 있는 곳은 초등학교 과정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학부모들의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실로 대단하다. 나도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지만, 자라나는 새싹에게 스스로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으리라.

그러나 그런 학부모들도 중등학생의 학부모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우학교는 그런 학부모들의 이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믹스한 그런 학교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우학교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것도 100대 수능 학교에 들고 외국어와 언어 영역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 아닌가.

만약 이우학교가 나름 제도권 교육 시장에서조차 달성하기 어려운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고라도 이 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였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성을 지향하는 이우학교의 대안교육 프로그램은 매우 매력적인 것은 틀림없어보였다.

결국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매우 높고 계속 확산되어가는 추세에 있지만, 그 유용함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의 일이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꿈은 깨어진다. 그들은 어차피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삶.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비전이요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의 초두에 물었듯이, 과연 교육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교육을 통해 대안적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실천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세상은 썩어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몸에 향수를 뿌리고 깨끗한 옷으로 치장을 한다고 세상이 아름다워질까. 교육이 진실로 교육다운 교육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우선 먼저 세상부터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핀란드의 교육을 배워야 할 모델로 삼는다. 일전에 진보신당의 심상정씨가 핀란드에 다녀와 그쪽 교육 실태에 대해서 보고 겸 강연을 하는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긴 바뀐 세상 아닌가? 우리완 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그런 교육혁명도 가능했던 것 아닐까?”

아마도 우리 사회도 핀란드처럼, 아니 그 반만이라도 닮은 세상이 된다면 박원순이 기쁜 마음으로 답사한 대안학교들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의 우리 마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는 그런 학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무상급식만 말해도 좌파에 빨갱이가 되는 세상이다.  

핀란드에서 온 어떤 여성이 말했던가. “한국의 좌파는 핀란드에선 우파도 못 돼요!” 이 말을 거꾸로 하면 “핀란드의 우파는 한국의 좌파보다 훨씬 좌파적이다!” 이런 말이 되겠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그러나 어떻든 박원순이 유람한 유토피아들은 매우 의미 있는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을 던져주고, 장밋빛으로 물든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 정말 언젠가 세상이 바뀌어서 굳이 너나 할 거 없이 대학을 가야만 하는 병폐가 사라지는 그런 날이 오면, 이들이 심어 놓은 값진 노력들이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평화롭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대안교육이 주류교육이 되는 그날! 사회가 소득 순으로 서열이 매겨지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학교도 성적순으로 서열을 매길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상황은 타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기 전에는 대안교육이 튼실하게 뿌리내리길 기대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 

그래서 「마을이 학교다」에 나오는 학교들의 노력들이 더욱 가치 있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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