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알렉세이 유르착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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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대 저항, 질서 대 자유, 위선 대 진실이라는 이분법을 깨며 구소련 연구를 갱신한 역작. 우리야말로 자본주의가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만큼, 먼저 ‘포스트‘를 지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것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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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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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단편은 역시 「관내분실」. 다시 읽으니 작가의 세심하고 예민한 감각을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구체화시킨 「감정의 물성」과, 사유의 외부성을 긍정하는 듯한 「공생 가설」도 좋았다. 사랑과 질투심을 함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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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퀑탱 메이야수 지음, 엄태연 옮김 / 이학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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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은 『유한성 이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 b, 2010)를 간략하게 보충하는 책처럼 보인다.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 문제에 대해 포퍼(과학적 사실과 위배되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칸트(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카오스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와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 사라지더라도 인식은 남는다. 당구공에는 물리학적 인과성에 따라 움직일 아무런 필연성이 없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우연성을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과학의 재현 가능성을 위배하는 사실은 존재하며, 극단적인 우발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의식하고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메이야수가 "실제로 이 법칙들이 미래에 변화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데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도 없으며, 법칙들의 항구성에 대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그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16~17쪽)고 주장할 때, 그는 은연중에 경제 지표의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경제 지표는 미래를 확증하지 못한다.)


한편 메이야수가 과학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에서 '과학 밖 세계에 대한 소설' 또는 '과학 밖 소설'을 발견할 때, '과학 밖 소설'은 마치 비평적 용어처럼 제시된다. 하지만 '과학 밖 소설'은 세계에 대한 과학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사변적 도구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과학 밖 소설의 가장 근접한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1943)을 들 때 나타난다. 『대재난』은 전기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2052년을 배경으로 이전까지 당연시되던 과학이 사라져버린 세계와 그 안에서 분투하는 인간들을 묘사한다. 오늘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부를 만한 세계가 펼쳐지고,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인 오트프로방스로 돌아가 전원적 삶을 개척한다. 도시문명에 대한 혐오와 전원생활에 대한 이상화는 그 소설이 1940년대 프랑스 괴뢰정부의 반혁명적 공기를 호흡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소설의 반혁명적 분위기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20년대 극우파 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활동한 레옹 도데는 과학을 비방하면서 "우리는 전기電氣 과학은 마치 전기 자체가 그런 것처럼 어떤 지적인 누전에 의해 소멸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90쪽)고 말한다. 이때 메이야수는 프랑스 혁명전쟁과 방데반란이라는 역사적 경험까지 파고들어가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가 나치의 침략으로 갑작스럽게 패배했듯이, 누구나 "그럴 리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전혀 다른 일이 발생한다. 여기서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는 메이야수의 토픽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는 쿠데타도 고문도 학살도 없을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 (탄핵정국과 기무사의 계엄령 준비가 좋은 예일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무런 확실성도 주어져 있지 않다. 기후변화도 지진도 노심융용도 지금 당장 벌어질 수 있다.(반대로 지금 당장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메이야수는 우리가 오직 우연성만이 확실한,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를 직시해야만 한다고 촉구한다. 절대적 존재자나 이성적 확실성에 의존하지 않은 채 우연적이고 환영적인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메이야수의 사변은 근대과학의 파국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중세의 '신이 부재하는 신학'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메이야수는 과학의 무능력을 겨냥하는 듯하지만, 그의 맞수는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적 사회주의자' 또는 '역사유물론자', 바로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야말로 '법칙'과 '경향'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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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루이 알튀세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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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 이후의 정치철학 연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알튀세르에게서 '돌발'이라는 문제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책이다. 절대군주의 돌발, 국민국가의 돌발, 그리고 혁명의 돌발이라는 문제설정(마키아벨리). (cf. 바디우에게는 '사건의 도래'라는 문제설정. 그리고 퀑탱 메이야수에게는 우발성의 필연성이라는 문제설정.)


진태원 선생은 1부 2장, 그중에서도 콩도르세(오류 이론)와 엘베시우스(도덕적 유물론과 교육)에 대한 알튀세르의 해석에 주목한다. 역자에게 익숙한 대목이기 때문에 별다르게 언급하지 않은 것일 테지만, 알튀세르의 홉스와 루소 독해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홉스를 계급투쟁의 이론가이자 "발흥하는 계급[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독재를 고안하려고 한 첫 번째 인물"(572쪽)로 주목하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의 관계 속에서 독해하고 루소를 계몽주의자인 동시에 반계몽주의자로 이해하는 대목이 그렇다.


엘베시우스가 인간 재생산의 조건을 유물론적으로 탐색함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이상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지만(더 넓은 의미의 교육으로서의 정치제도와 지도자에게 개혁의 희망을 거는 것), 루소는 엘베시우스가 나아간 길로 가지 않을 만큼 예민한 직감을 발휘했음을 밝히는 대목도 흥미롭다. 진태원 선생이 크게 아쉬워하듯이 이 책에는 정작 스피노자 강의가 없다. 스피노자 강의록이 발견된다면 알튀세르 연구가 더 진전할 텐데 안타까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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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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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의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을 읽은 뒤 페리 앤더슨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1977)(『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평의회 사상과 이행전략』(김현우·신진욱·허준석 편역, 갈무리, 1995)에 수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일종의 연구 노트이기도 한 유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에게 토대 내지 생산양식에 대한 논의가 부재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텅 빈 개념이며 '진지전'은 수정주의와 다름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때 알튀세르는 전형적인 스탈린주의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프랑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사실상 폐기하고 선거를 통한 집권을 지향하는 유로코뮤니즘 노선을 따라가는 데 대한 비판과 연관된다.(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은 그의 또 다른 유고집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18)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알튀세르를 스탈린주의자라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사회주의)를 고수하되 스탈린적 편향에 대한 반편향이 우익기회주의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뿐이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는 연구 노트라는 점에서 논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김석민 옮김, 중원문화, 2010)의 책 소개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고, 즉 우리의 실수는 출판하지 않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실수는 출판한다"라는 알튀세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실수라는 말을 절대적 오류로 이해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옳다.) 


한편 페리 앤더슨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은 알튀세르가 『검은 소』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을 시기(대략 1977~1978년경)에 쓰인 글로, 그람시 논의의 공백 내지 약점을 좀 더 정세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의 의미를 프롤레타리아의 농민 지도(레닌)에서 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 지배로 이동시켰으며, 이는 러시아와는 다른 환경하의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문제는 헤게모니의 의미가 그람시의 『옥중수고』 안에서 조금씩 다르게 바뀜에 따라 개념의 혼동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앤더슨은 무엇보다 (알튀세르라면 '부르주아 독재'라고 불렀을)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중핵인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이 부재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헤게모니 개념이 지배의 두 가지 측면인 강제와 동의 중 후자에 가깝게 쓰일 때 '부르주아 독재'의 난폭한 측면(군대와 경찰)을 망각해버리기 쉽다는 것도 짚어낸다. 아마도 당대의 유로코뮤니스트들이 그람시를 자신들의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한 것도 이런 망각 때문일 터다. 앤더슨은 '기동전 대 진지전'이라는 구도를 선취했던 논쟁으로 카를 카우츠키의 '지구전략'과 그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을 인용하면서 진지전 논의에 스며 있는 수정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앤더슨이 부연하듯이 그람시는 결코 수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끝까지 고수한 공산주의자였다. 다만 그람시의 헤게모니-진지전 개념의 공백("언제 그리고 어떻게 진지전에서 기동전으로 전환할 것인가?")은 진지전 논의를 보다 전략적으로 독해해야 할 이유가 된다. 


알튀세르와 앤더슨 모두 (그람시의 의도와는 상당히 멀어진) 헤게모니-진지전 개념의 수정주의적 편향을 지적한다. 이들이 겨냥하는 것은 그람시 자체라기보다 말 많고 탈 많은 저 유로코뮤니즘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알튀세르는 그람시를 완전한 유로코뮤니스트로 규정하다시피 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한 인터뷰에서 그람시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긴장을 해설함으로써 '반反그람시주의자 알튀세르'라는 상을 교정한다. 알튀세르는 그람시 독해를 통해 「모순과 과잉결정」(1962)을 썼지만 마오쩌둥 독해(보다 정확하게는 마오의 『모순론』 독해)를 통해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1963)를 썼다는 것, 그 때문에 그람시를 보다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읽는 동안 그는 다시 그람시로 돌아가며 진동했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에서 "이는 우리로 하여금, 「모순과 과잉결정」의 주에서 그람시를 자신의 기획에 선행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했던 알튀세르가 왜 그 후에 그람시를 마오로 대체하고 마오로부터 대량으로 차용하기에 이르렀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질문을 복잡화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아마도, 질문을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닌 한 방향으로 정위시킬 수 있게 해줍니다"라고 말한 뒤, "그리하여, 이 시점에 그는 그람시에 반대하여 자신을 내내 방어하지만, 반대로 그가 마키아벨리에게로 돌아갈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그람시를 찬양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람시의 사고의 운동 속으로 들어가 그것으로부터 조금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라고 지적한다.) 


유로코뮤니즘은 1970년대 말, 그러니까 '볼커 쇼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반격'이 있기 직전에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에스파냐 공산당 등 유럽의 유력 공산당들이 펼친 개혁주의 프로그램을 느슨하게 지칭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 당국가 외에, 적어도 자코뱅과 볼셰비키의 후예라고 할 만한) 공산당이 사라진 지금, 혁명이냐 개혁이냐 라는 식의 질문은 너무나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발리바르가 이탈리아의 연구자들과 한 대담을 다시 한 번 인용해본다. "이 시대의 우리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당신이 개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간 순간 당신은 혁명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저는 점점 더 문제를 이렇게 제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 거기서 저는 영속혁명이라는 마르크스의 관념 또는 부단혁명(不斷革命)이라는 마오의 관념을 다시 취해야 하며, 그것을 분명 공산주의 전통 전체가 치명적으로 비난한, "최종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모든 것이다"라는 베른슈타인의 유명한 말과 혼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양자를 종합할 경우, 제가 보기에 그람시의 관심사들에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어떤 것을 얻게 됩니다." 


발리바르가 이와 같이 말한 것도 당이 부재한다는 현 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람시에게 이탈리아 공산당이 있었고 알튀세르에게 프랑스 공산당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당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발리바르를 빌자면 '프랑스식 인민전선' 노선 위에 있었던 알튀세르가 진지전과 인민전선을 동일시한 이론가 그람시를 비판할 때, 그들에게 존재하던 당이, 그리고 그들이 대면하고 숙고했던 인민이 지금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상기하는 것은 알튀세르의 텍스트를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와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지 않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1)」 

http://en-movement.tistory.com/183?category=733236 


「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2)」

http://en-movement.tistory.com/184?category=7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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