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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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그로이스는 『코뮤니스트 후기』(문학과지성사, 2017)에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즉 스탈린주의)야말로 공산주의의 중핵이라는 테제를 기꺼이 떠안는다. 그는 소비에트 국가가 플라톤 식의 '철인 왕국', 즉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의 처참한 실패였다는 우파의 비난을 적극 긍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로이스는 바로 그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이며, "흰 소도 일 잘하고 검은 소도 일 잘한다"는 식의 논리야말로 총체성을 손안에 그러쥐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레닌 사후의 노선 투쟁에서 좌파(트로츠키)와 우파(부하린)에 대항해 승리한 중앙파(스탈린)가 좌우파의 노선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이 대목은 스탈린이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당신들은 레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트로츠키는 저 '평범하고 음험한 사내'가 그의 주특기인 회유와 협박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오염시켰다고 비난했지만, 스탈린은 그 스스로가 레닌의 원칙, 즉 변증법에 충실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화폐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와 언어를 매개로 하는 공산주의를 대질하면서 구소련이 '언어의 왕국'이자 '철학의 왕국'이었다고 기술하는 대목,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서구보다 앞서 '언어학적 전회(기호학적 전회)'를 선취했다고 해석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그로이스는 그렇게 우파의 비난("스탈린은 레닌의 충실한 제자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모두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광포한 독재자들이라는 점에서 똑같다")을 뒤집어 놓는다. 그는 지젝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비판'은 파시즘이 충분히 '전체(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보다 불충분한 이념일 수밖에 없음을 놓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내려는 몸짓(데리다)이나 '영원한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를 긍정하는 입장(바디우)을 넘어,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해체가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있다. 이와 같은 예정설은 그로이스가 이 책에서 그토록 비난하는 '소피스트적인 말하기', 즉 궤변처럼 들린다. 그로이스가 드러내는 사유의 광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건너뛴 채 '만약if'만을 강조하는 태도("만약 레닌이 10년만 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면…"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면…" "스탈린 혁명 없는 혁명이 가능했다면…")보다 이 편이 우리를 더욱 사유하게 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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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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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의미망’으로 대체할 때, 이곳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주장을 상당히 깔끔하게 전개한다. 변증법을 ‘슈퍼 생각’이라며 떨쳐버리려는 시도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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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론 - 전면완역개정판 카이로스총서 41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김만수 옮김 / 갈무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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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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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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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컵 솔의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메멘토, 2016)는 회계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회계를 통한 재무적 책임성이 국가와 문명의 번영과 몰락에 매우 큰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이때 재무적 책임성으로 번역된 accountability는 회계accounting를 통한 책임성responsibility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회계(학)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면서 '건강하고 올바른 자본주의'를 제시하는 등 책에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주장이 들어 있다. 국내 학자가 쓴 부록에는 개성 상인의 복식부기 발견을 언급하면서 한국의 '자생적 자본주의'까지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본격적으로 창안된 복식부기 회계에 신에 대한 믿음이 녹아 들어 있고(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언급했듯이 죄schuld와 빚schulden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회계가 절대왕정 시기를 거치며 통치술로 활용되었다는 것, 근대 회계감사가 철도의 발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숫자와 제국주의 통치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행위자연결망이론에서 이야기하는 action at distance와 governing at distance) 등 베버와 푸코에 익숙한 독자라면 회계와 관련된 꽤 풍부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저자는 회계와 숫자를 비非정치적인 것 내지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다룬다. 하지만 회계는 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이를 '객관화된 믿음' 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믿음은 이중장부와 부실회계, 회계사의 자의적인 판단과 기업과의 유착 등으로 의심받는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이내 '더 올바른 회계 관행과 감사'를 요구하는 것으로 봉합된다. 그렇다면 회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회계라는 장치 없이 우리를 둘러싼 사물을 다룰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홍기빈 샘 같은 이들이 (칼 폴라니를 비롯한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안했던) 사회주의적 회계 내지 사회적 회계를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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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과 브레히트 - 예술과 정치의 실험실 엑스쿨투라 7
에르트무트 비치슬라 지음, 윤미애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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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트무트 비치슬라의 『벤야민과 브레히트: 예술과 정치의 실험실』(2015, 문학동네)은 당대의 가장 예리한 비평가와 작가의 만남을 다룬다. 동독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저자 에르트무트 비치슬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공식 시인 브레히트가 아니라 체제의 모순을 파헤치는 예술가 브레히트에 주목한다. 반면 벤야민은 동독에서 낯선 존재였고, 현실을 돌파하는 해방의 기획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에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비치슬라는 벤야민과 브레히트의 관계를 문헌학적으로 살펴보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맺어진 역사적 배경과 그들 사이의 교류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두 사람이 쓴 공식 논문을 비롯해 일기와 편지 등 다양한 출처의 기록을 모아놓았기에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브레히트의 자장 안에서 벤야민을 해석하는 걸 넘어 그걸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이 가끔 거슬린다. 일종의 전략적 배치일 텐데, 게르숌 숄렘과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비롯한 벤야민의 친구들이 벤야민과 브레히트 사이의 관계를 당혹감과 걱정 속에서 바라본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겠다. 숄렘은 브레히트가 벤야민의 유대-신학적 관점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도르노는 브레히트의 '유물론적' 접근에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숄렘과 아도르노, 브레히트[이들 사이에는 그레텔 카르플루스(후에 아도르노와 결혼해 그레텔 아도르노라 불린다), 에른스트 블로흐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이 끼어 있다]에게 벤야민은 저마다 자신의 이론적·정치적 입장을 투사하고 해석하는 장처럼 보인다. 서독을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아도르노의 입김이 지나치게 강했고, 숄렘은 역시 벤야민을 자기 쪽으로 견인하려 한다는 문제의식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벤야민과 브레히트 사이의 우정은 둘의 이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브레히트는 벤야민의 유대-신학적 관점에 비판적이었고 때로는 애석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단적으로 브레히트는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그 소논문은 (형이상학과 유대적인 사유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 간단하다"고 말하면서 유대-신학적 관점의 관념론과 뚜렷하게 선을 긋는다. 그럴 때마다 벤야민은 브레히트와의 차이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했을 것이다. 벤야민에게 카프카 해석과 보들레르 해석이 그렇듯, 유대-신학적 사고라는 한 극단과 역사유물론이라는 또 다른 극단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벤야민과 브레히트는 미완의 기획이었던 잡지 『크리제 운트 크리티크(위기와 비평)』를 준비하며 '개입하는 글쓰기'를 관철시키고자 시도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의 편에 선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비치슬라가 저자 후기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장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는 과거의 사람들을 감쌌던 바람 한 점이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에는 이제는 말이 없는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수십 페이지를 채운 미주에 지쳐갈 즈음, 저자 후기를 읽었을 때 통일을 전후로 한 동독에서 벤야민과 브레히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다. 비치슬라는 헤겔과 마르크스, 막스 베버, 한나 아렌트 등을 읽는 세미나에서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읽었다고 적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세미나의 주최자였던 카리스마 있는 목사가 사실 수십 년 동안 동독 비밀경찰의 스파이였음을 덧붙인다. 영화 <타인의 삶>을 연상시키는 이 부분에서,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국가보안부로서는 벤야민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는 우커마르크 출신 스파이의 서류뿐 아니라 자이델과 레클람 출판사의 편집부 직원의 통화를 도청한 증거자료에서도 드러난다. 국가보안부의 한 자료에는 "작가들 사이에 벤야민이라고 불리는 신참자 또는 초보자가 있다"라고 적혀 있다. 결과적으로 벤야민은 문화부에서 일하는 한 젊은 직원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보고 업무를 맡은 이 남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나약한 사람으로, 지적이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쉬운 인물이라고 한다." (403쪽)


  비밀경찰은 언제나 '앎(지식)'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벤야민에 대한 국가보안부의 해석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들이 제대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주 세속적이고 피상적인 한도에서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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