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 - 식물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능의 미래
파코 칼보 지음, 하인해 옮김 / 휴머니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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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이처럼 다른 식물뿐 아니라 다른 종들과도 교류한다면 식물의 몸 안에서도 ‘생각’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과정과 비슷한 방식으로 어떠한 소통이 일어날 거라고 추측하는 것이 과연 지나친 상상일까?” (63쪽)


파코 칼보의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하인해 옮김, 휴머니스트, 2025)는 식물에도 지능이 있을 수 있으며, 지능 또는 지성이 생물의 위계서열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일 수 없음을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책이다. ‘식물지능’이라고 하면 어쩐지 사이비 같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지은이는 최대한 과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다시 말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재현하며 논문을 쓰고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검증의 기나긴 길을 감당하려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책은 “1부. 지능의 관점으로 다시 보는 식물”, “2부. 과학으로 보는 식물지능”, “3부. 식물지능이 펼치는 미래”의 세 가지 파트로 나뉜다. 1부에서는 동물은 빠르게 움직이지만 식물은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 때문에, 또 식물의 움직임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일 뿐 목적 지향적인 지능적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점 때문에 우리가 ‘식물맹’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식물에 지능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하나씩 풀어준다. 놀랍게도 지은이는 식물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식물의 생리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까지(!)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식물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마음[mind]은 인지과학의 [어쩌면] 영원한 숙제로 알고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식물지능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이 태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윤리적 문제도 나타나며(“인간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해도 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식물까지 연결할 때, 기존의 생활방식 전체를 조정해야 할 수 있다), 인간이 우주라는 전혀 다른 환경을 탐색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제안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식물지능의 존재 여부를 탐색하는 책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국제식물신경생물학연구소 소장 스테파노 만쿠소의 책이 꽤 여러 권 번역된 상태다(<식물을 미치도록 사랑한 남자>, <매혹하는 식물의 뇌>, <식물 혁명>,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나는 만쿠소의 책들을 깊이 살피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식물지능에 대한 책들이 너무 선언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그래, 식물에 지능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도 만쿠소의 책들과 큰 흐름에서 함께할 테지만(지은이 파코 칼보는 식물신호전달및행동철학연구소 민트[MINT]의 소장이자 만쿠소의 동료이기도 하다), 나는 식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통해 식물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지능의 정의와 범주 자체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지점에서 감동을 받았다.


내 감동 포인트: 식물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과 늘 상호작용을 하고 자신과 관계 맺는 모든 존재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식물의 지능은 큰 범주의 지능에 속할 수 있지만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지능과 ‘다른 지능’이라는 주장. 무엇보다 지능은 개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서 잠시 ‘점유’하거나 (과감하게 말하자면) ‘빌려온’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


“이는 링컨 타이즈가 경고한 “데이터의 과잉 해석, 목적론, 의인화, 철학화, 억측”의 위험을 피할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보인다. 행동이 펼쳐지는 자연환경에 초점을 맞춘다면 인지는 식물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지는 유기체와 그 주변 환경 간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무언가에 가깝다. 유기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유기체가 주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경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233쪽)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원제 “플란타 사피엔스(Planta Sapiens)”도, 한국어판의 제목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와 부제 “식물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능의 미래”도 각각 이 책의 핵심을 콕 집어준다. 식물의 지능을 인간의 기준으로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그러니까 의인화와 ‘동물중심주의’ 모두 벗어나야 한다는 것). 식물을 통해 지능의 범주 자체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지능에 대한 인식의 지평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책 한 권에 담기엔 너무 광대해 보이는 주제지만, 지은이가 하나씩 두들겨가며 놓아둔 돌다리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어느새 설득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동안 (정확하게는 글이 잘 안 쓰이는 동안) 거실에 놓인 식물을 바라봤다. 몬스테라며 고사리과 식물들이 화분에 담긴 채 조명에서 나오는 빛을 쬔다. 내가 이들을 감각하는 것만큼이나 이들 또한 나를 감각하고 있다. 지능 있는 존재가 누군가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프랑켄슈타인>보다 오래되었을 테지만,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나와 (아주 큰 범주로 넓혀야겠지만) 같은 계통수의 존재들이 굳이 나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물부터 잘 주자. 언제나 닝겐이 문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온 존재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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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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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를 면밀하게 진단한 책이다. 바버라 F. 월터의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와 같이 읽으면 좀 더 깊이 있는 독서가 가능하겠다. 두 책 모두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습격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그것도 아주 위험한 신호)로 읽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책의 원제인 <소수의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은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을 경고한 알렉시 드 토크빌과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주장을 뒤집어, 다인종 민주주의 실험을 방해하는 정치적 소수의 지배를 신랄하게 표현한 것이다.


지은이인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각각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정치 변동을 연구하는 정치학자들이다. 미국 안으로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부터 2020년대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 밖으로는 1934년 2월 극우파의 프랑스 국회의사당 습격부터 21세기의 페루와 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명확한 논점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비교정치학적 연구를 대중화한 좋은 사례다.


지은이들의 논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인민을 대리하는 정치 엘리트가 ‘충직한 민주주의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선거에서 패배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폭력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극단주의자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힘을 얻는 쪽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동의하는 척하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하려고 극단주의자들과 손을 잡는다. 문제는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극단주의자 들을 떼어놓을 내적 동기와 외적 강제 모두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은이들에게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주로 공화당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갈수록 협소해지는 공화당의 입지를 역전할 방안을 백인우월주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충직한 민주주의자로 행동할 내적 동기가 거의 없다. 또한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나온 여러 타협의 결과가, 즉 지은이들이 ‘반다수결주의 제도’라 부르는 각종 제도적 문턱(폐쇄적인 의회[상원], 인민의 수에 비례하지 않는 선거인단, 극히 보수적인 대법원, 비민주적인 선거제도 등)이 (비록 조금씩 개선되기는 했어도) 미국의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외적 강제를 봉쇄한다.


바버라 월터와 마찬가지로,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시민들의 연대와 운동, 엘리트 계층을 향한 압력에서 민주주의를 갱신할(또한 월터가 바라는 대로 ‘2차 내전’을 예방할) 가능성을 기대한다. 이들 모두 민주화가 ‘기나긴 혁명’이며, 얼마든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안다. 문을 닫아놓는 게 이득인 문지기를 언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는 이론이 아니라 정세가 결정하기 때문이다(우리로 치면 “국민의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아이디어를 준비해놔야 한다는 지은이들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일이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한국은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때 “미국이 생각했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조합은 남한과 대만이라는 두 반쪽 국가에서만 가능(<냉전의 지구사> 648쪽)”했으나, 미국과 한국 모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조합’이라는 희망에 커다란 금이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은이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트럼프가 재선됐고, 한국에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다. 지은이들의 제안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사회대개혁 비상행동과 같은 시민운동 연대체가 투쟁에 함께해온 시민들과 연합을 구성해, 민주당과 같은 현실정치 세력이 진보적 의제를 채택하도록 견인해야 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던가, 그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계속 “나중에”를 외치면, 민주주의 자체가 나중이 된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그것만은 바라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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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서재 - 독재자의 책읽기와 혁명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6
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 너머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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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 스탈린을 그가 읽은 책으로 살펴보는 명민한 전기.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전작 <스탈린의 전쟁>과 더불어, 스탈린을 악마화하지 말고 인간화하라는 지은이의 관점이 풍부한 사료로 뒷받침된다. 혁명가를 ‘책의 사람들‘로서, 읽는 사람으로서 조명할 때 분명 많은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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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유령 - 국제공산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Philos 시리즈 33
조너선 해슬럼 지음, 우동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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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해슬럼의 <전쟁의 유령: 국제공산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우동현 옮김, 아르테(북이십일), 2024)은 부제대로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기지였던 코민테른(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에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코민테른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특히 영국)의 대응에서 찾는 책이다.


지은이는 소련 외교사와 국제관계사의 전문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사이, 이른바 ‘전간기(interwar period)’라 불리는 1920~1930년대를 냉정한 시선으로 살핀다. 그가 보기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탄생한 신생국 소련이 자신들을 크게 위협한다고 느꼈고, 그로부터 비롯한 적대감과 혐오, 공포는 국가의 외교 정책부터 외교관들의 선호까지 (비록 ‘이해관계’라는 현실정치의 제약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상당히 결정할 만큼 폭넓게 퍼졌다. 이는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혁명가들(볼셰비키)이 1919년 코민테른(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유럽과 아시아의 혁명 운동/반식민지 운동을 지원한 데 기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이 봤을 때 소련은 국가 대 국가로서는 현상유지(status quo)를 내세우지만 각국 내의 혁명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전복을 꾀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외교 관행을 어지럽히는 존재였다(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북한의 ‘화전양면전술’이라는 비난으로 익숙한 현상이기도 하다).


해슬럼은 이 책에서 기존 소련 외교사와 국제관계사 연구자들이 이념의 존재를 괄호 친 채 이해관계에만 집중하거나, 당대의 반공주의 역사관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식으로 대응해온 것을 비판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념, 특히 영국 지배계급의 보수주의가 전간기의 반공주의로 현상하고, 지배계급의 뼈 속 깊이 스며든 반공주의가 어떻게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을 용인했는지, 심지어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파시스트와 나치를 동쪽(러시아)에 대한 방벽으로 선호하기까지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물론 지은이는 구소련과 공산주의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으며, 현재 ‘민주주의 국가들’이 겪고 있는 혼란 속에서 공산주의 같은 이념이 또다시 나타나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종말론적 비관을 피력한다).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미국, 스웨덴, 에스파냐, 러시아의 문서보관소를 두루 살펴 전간기 외교관들의 의식과 관념, 서로 간의 오해와 억측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전쟁의 유령>의 특장점이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잘 알려진 (영국의 엘리트 구성원이자 소련의 스파이였던)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의 활약(?)이 소련 외교에 미친 영향도 가늠하게 해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박만섭 옮김, 휴머니스트, 2024)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협상인 파리평화회의와 협상의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이 또 다른 전쟁을 예비하리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면(케인스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핵심은 독일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드는 데 있었다), <전쟁의 유령>은 케인스 역시 공유했던 영국 엘리트들의 반공주의와 독일을 향한 유화주의적 태도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낳은 주 요인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쟁 위기로 들끓던 전간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전쟁의 유령’ 배후에 ‘혁명의 유령’ 또는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있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지금 여기에서 쓰이고 옮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의 시대가 또 다른 전간기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된 지 37년이 지나 이제 더 이상 쿠데타 같은 건 없으리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12.3 내란은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함을, 한국은 언제든지 군사독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상식은 너무나 쉽게 깨질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체제가 건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것도 확정적이지 않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극우 포퓰리즘과 가짜뉴스가 일상을 위협하고 있음을 절감하는 시대다. 이 한 권의 책이 모든 것을 알려줄 수는 없을지라도, ‘전쟁의 유령’을 퇴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탐색하는 데 실마리가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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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재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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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재훈 옮김, 휴머니스트, 2024)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철학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막상 읽어보니 명성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에세이’라는 점이, 또한 ‘생각나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명제가 무척 단순 명쾌하게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새삼 흥미로웠다.


《방법서설》은 1637년 익명으로 출간된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서문으로 쓰였다. 즉 일종의 방법론 소개인 셈으로, 데카르트가 자신의 연구 방향을 독자들에게 나름 친근하게(현대의 우리말 독자들에게는 해설이 없다면 충격과 공포이지만.) 설명하려고 프랑스어로 쓴 글이다. 책을 읽다 보면 원제에 해당하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서설”(휴머니스트판은 원제 전체를 제목으로 삼았다.)이 “내가 공부하는 법” 또는 “나처럼 공부하면 이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로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특히 지나치게 겸손 떠는 이런 문구를 읽고 있자니 종교전쟁 시대의, 그리고 교권이 아직 강력했던 시대의 자기 방어술로 보여서 쓴웃음도 나왔다. “이처럼 나의 계획은 이성을 잘 인도하려고 각자가 따라야만 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이성을 인도하려고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19쪽).”


이 책에서 이재훈 국립창원대 철학과 교수가 해석하는 데카르트는 몽테뉴의 《에세》의 독자, 르네상스 인문주의 전통의 계승자다.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자들의 책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다 몽테뉴를 따라 ‘세계라는 책’을 여행하기로 결심했고, 세계라는 책 속 여행의 끝에서 ‘나라는 책’을 여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한다. 이 판본에서 눈길이 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데카르트의 시대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또는 이행기로 규정하고 단절에 집중하는 방식이 아니라, 데카르트 사유의 연속성을 당대의 휴머니티(humanity) 탐구라는 관점에서 살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끝날 줄 모르는 혼란 속에서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과연 종교전쟁 시대의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본인이 수학에 능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논리학과 기하학, 대수학조차 진리 탐구의 전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현학적이고 동어반복적인 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 내가 스스로 관찰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는 범위 안의 내가 진리의 출발이라고 선언한다. 그 어떤 지적 권위가 아니라 나로부터 사고를 시작한다는 이 단순한 명제가 많은 것(이른바 ‘문명’이든 파괴든 또는 이 둘의 변증법이든)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 중요하다(데카르트의 사유는 당대 철학자들의 문예공화국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김호경 옮김, 글항아리, 2014]에서, 스피노자 또한 데카르트의 독자로서 여러 데카르트 주석서를 쓰고 편지를 통해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서술된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데카르트가 의사 또는 생리학자로서 심장의 운동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과 (지금의 관점으로는) 종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는 대목으로 악명 높지만, 데카르트를 현대적인 시각(철학이 사유 일반에 관한 활동이 아니라 분과 학문 체계에 편입된 종목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의 ‘철학자’가 아니라 전일론적인 자연철학자로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이에 대해서는 홍성욱의 글을 참고할 만하다. 〈생리학자 데카르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7920&cid=58939&categoryId=58951


옮긴이 이재훈 교수의 주석과 해설이 있었기에 데카르트에 대한 편견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에게 근대주의의 폐해를 전적으로 돌리는 시각 같은 것. ‘생각하는 나’는 많은 질문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생산도 파괴도 일어났지만, 데카르트가 인간의 절대성을 부각하고 주장했다는 식의 해설로부터는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준다(데카르트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다분히 스토아철학적인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만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중에는 신체와 정신의 양생도 포함된다는 식의 접근을 말한다).


한편 옮긴이는 오늘날 철학의 기본 전제가 된 듯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술(techne)을 강조하는 철학적 경향을 신학적 절대주의의 세속화된 버전으로서 ‘기술적 절대주의’로, 기술적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이들의 에피고넨(epigonen)들(184쪽 각주 19번)”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니체와 하이데거의 에피고넨에는 프리드리히 키틀러 이후의 매체학자, 브뤼노 라투르를 비롯한 행위자연결망이론(ANT) 연구자, 이른바 ‘신유물론’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이론적 담론의 제안자(마누엘 데란다, 제인 베넷 등)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보다 면밀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휴머니티 탐구를 옹호하는 새로운 《방법서설》을 살펴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다. 데카르트는 여전히 간단하게 기각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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