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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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 아르네 베스타의 <냉전의 지구사: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에코리브르, 2020)를 읽었다. ‘냉전’과 ‘제3세계’를 탁월하게 연결한 저작이다. 지은이가 밝힌 대로 1970~1980년대의 제3세계 지역에 집중한 것도 옳은 선택으로 보인다. 민족해방의 열기가 어떻게 해방된 사회의 건설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탈냉전’과 ‘신냉전’이라는 레토릭이 역사와 현실을 오히려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전은 전후체제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았다. “’훨씬 더 강한’ 초강대국(물론 힘의 제한은 있었지만)과 다른 초강대국 간 대결(646쪽)”이었던 시기로서 냉전은 끝났다. 하지만 ‘자유의 제국’(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제3세계 전반을 조정하려는 경향과 그로부터 비롯된 개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냉전은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냉전 질서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자유민주주의 vs. 권위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설정 또한 마찬가지다(반공주의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정의의 제국’ (지은이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평등의 제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 경쟁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무너졌다. 고르바초프가 레닌주의의 이상에 충실하고자 했기에 소련의 해체를 가속화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전히 냉전의 한복판에 놓여 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고도경제성장을 이룬 (그러나 때로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찾으려 했던) 한국인은 자국의 특수성과 예외성에만 눈을 돌려왔다. 냉전을 지구사적 흐름으로 살피면서 역사적 기억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그런 의미에서 남북한은 여전히 ‘제3세계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작업에 큰 도움이 된다. 옮긴이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제3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이 개입한 결과는 진정으로 암울했다. 미국은 선한 세력(미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믿었겠지만)이 아니었으며, 미국의 급습은 많은 사회를 황폐화시켰다. 제3세계는 스스로 초래한 일의 결과로 향후 재난에 취약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미국이 생각했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조합은 남한과 대만이라는 두 반쪽 국가에서만 가능했으며, 1945년부터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약 30개국에 이르는 나라에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 성적표가 보여주는 인간적 비극의 결과는 적에게든 친구에게든 심대했다. 게다가 이는 많은 국가에 여전히 진행 중인 비극으로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까지 파괴하고도 남을 지뢰와 그 밖의 무기가 배치되어 있는 상태다(647~6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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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 - 인터뷰와 지도제작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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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신유물론이 ‘사유의 스타일‘이라고 지나가듯 언급한다. 이 표현은 신유물론으로 묶이는 이론적 담론에 대한 메타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신유물론이라는 상품의 카피 역할을 한다. 신유물론은 늘 새로움을 요구하는 시장의 논리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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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 - 인터뷰와 지도제작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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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로지 브라이도티, 마누엘 데란다, 캐런 버라드, 퀑탱 메이야수를 신유물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설정하고, 신유물론 개념의 교집합으로 '횡단성'과 '수행성'을 지목한다. 그들이 신유물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지지하는 까닭은 페미니즘이 처한 이론적 곤경, 즉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진동을 신유물론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이분법을 근대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격렬하게 비난하고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대체하기 위해 '횡단'(들뢰즈·가타리)과 '간행'(버라드)을 거듭 강조한다. 이들의 이론적 태도는 신유물론으로 묶이는 이론적 담론이 (분과학문으로서) 철학이라기보다 (학제간연구로서) 문화연구의 연장선에 놓이며, 그 자체로 문화이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저자들은 물질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재현을 거듭 부정하면서 (양자역학을 문화이론으로 치환하는) 버라드를 따라 '윤리-존재-인식론'의 담론적 헤게모니를 주장한다.


저자들과 그들이 분석하는 이론가 다수가 이분법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메이야수는 여기서 제외하는 게 맞을 듯하다.) 이들이 의식하지 않은 채 겨냥하는 맞수는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횡단성은 변증법의 나선형 전진(즉 역사의 진보)을 대체하기 위해, 수행성은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실천을 매개 없이 결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책 마지막 장의 제목 '남(여)성의 종말'은 신유물론에서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을 요약한다. (지배-피지배 관계를 함축하는) 범주 자체의 소멸, 개체화된 다수의 수평적인 연결, 흐름으로서의 대중(자율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용어로는 다중), 반재현주의로서의 반대의주의. 저자들은 아나키즘 운동과 정체성 정치를 하나로 만듦으로써 정당 없는 사회운동을 옹호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유물론 입문>의 저자가 신유물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퀑탱 메이야수 대신 제인 베넷을 배치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메이야수는 (비록 하먼과 갈라서기는 했지만) 물질의 선차성과 우발성의 필연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관계로부터 물러나는 입장을 고수한다. 흐름이나 간행, 횡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보다 생기론이 신유물론에 더 잘 부합한다.


주석이 지나치게 상세한 것 같아 처음엔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읽다 보니 반대 의견도 충실하게 소개하려는 성실함이 돋보였다. (옮긴이가 들뢰즈·가타리와 차이점보다 친연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 해러웨이가 들뢰즈·가타리의 동물 논의에 몹시 불쾌해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해러웨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유목을 강조하면서 정착생활과 반려종을 힐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동물에 조금도 관심이 없으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갖다 쓴 것에 불과하다고 항의한다. 해러웨이와 들뢰즈·가타리 사이의 거리는 옮긴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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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 극소 채석장 시리즈
베르너 하마허 지음, 조효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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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마허의 <문헌학, 극소>(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는 ‘문헌학philology’을 해체주의 이후의 해체주의로서 탈-언어화하는 작업이다. 하마허는 독서 불가능성의 알레고리(폴 드 만)를 반복함으로써 아이러니, 자동인형(기계장치)의 반복성, 이율배반, 반성하는 의식으로서 자기의식, ‘세계정신으로서의 니힐리즘(야콥 타우베스)’, 보편/범주에 대한 거부와 같은 해체주의의 공리를 정확하게(그리고 모호하게) 반복한다.


언어의 탈언을 ‘위한’ 투쟁은 언어의 폭력적인 규정을 통해 언어의 존재 조건(아무것도 아님)을 무화하려는 시도, 즉 나치즘과의 투쟁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해체주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즉 유대인) 없이 말끔한 세계라는 가짜 유토피아에 맞선, 세속화된 세계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또는 유토피아를 무화하는 유토피아주의)로서 지금도 “세계 내전과의 대결을 결코 피할 수 없다(209~210쪽, 옮긴이 해제)”.


다시 말해 (세속화된 유대철학으로서) 해체주의와 (탈세속화된 반유대주의로서) 나치즘이라는 두 유령이 벌이는 “불꽃들의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160쪽, 르네 샤르의 시 <도서관이 불탄다>). 자크 데리다, 폴 드 만, 베르너 하마허, 아비탈 로넬 등 해체주의자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소중한 논적으로서 끈기를 가지고 세심하게 다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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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 극소 채석장 시리즈
베르너 하마허 지음, 조효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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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유대철학으로서) 해체주의의 유령이 (탈세속화된 반유대주의로서) 나치즘이라는 유령과 벌이는 “불꽃들의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짧지만 강력한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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