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케인
로버트 E. 하워드 지음, 이나경 옮김, 게리 지아니 그림 / 크림슨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야만인 코난의 창시자로 유명한 로버트 E. 하워드가 만든 또 다른 액션 히어로 솔로몬 케인은 설정만 놓고 보면 거부감이 확 느껴지는 캐릭터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영국인 청교도가 아프리카로 들어가서 주의 이름을 내세우며 무력으로 정의를 수호한다니, 이건 누가 봐도 제국주의의 다른 모습이오, 광신주의에 가까운 편협한 종교인의 태도가 예상되며, 인종차별적 발언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실제로 이 책에서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시선이 등장하는 대목을 찾아 지적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종종 캐릭터의 성격과, 그 캐릭터를 다루는 서술자의 태도 사이의 거리를 지적함으로써 이런 유형의 이야기를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솔로몬 케인』은 그런 식의 거리두기에도 무심하며,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자는 철저히 케인의 시선을 따라 사건을 서술한다. 

소녀는 케인이 잘 아는 입술이 두껍고 짐승 같은 서해안의 흑인들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흑인이었다. 날씬하고 섬세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피부색도 새카맣기보다는 짙은 갈색이었다. 콧대는 곧았고 입술은 지나치게 두껍지 않았다. 어딘가 그녀의 혈통에 베르베르인의 피가 짙게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240

  더구나 여기에 초창기 서구 히로익 팬터지 특유의 남성적 용맹무쌍함에 대한 찬양과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선한 의지를 지닌 이를 보호한다는 식의 순진한 사상이 결합하고 나면 현대 독자들이 의지할 바는 거의 없어 보인다. 예컨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의지만 있으면 싸울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치기 위해 마법이 실린 무기를 원할 독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옛적 아저씨들의 순진함을 비웃으며 낄낄거리는 캠피한 독서법만이 남은 것인가. 결국 이 책은 결국 별로 좋을 것 없는 영화판의 개봉에 맞추어 조금이라도 원작을 팔아보기 위해 기획된 것에 불과한가. (흠,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나라의 어떤 분들은 있는 그대로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주의 이름으로 야만인들에게 빛을!)

팔다리와 주먹으로 맞서 싸우던 케인은 마침내 유령이 움츠러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섬뜩한 웃음소리가 당황스러운 분노의 비명으로 변하고 있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지옥 입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용기이며, 심지어 지옥군단도 그에 맞서 대항하지 못한다. - p.16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고, 그런 놀라운 기적을 가능하게 해준 신께서 이제 와서 우리를 쓰러뜨리실까? 그럴 리는 없다! 인간의 도시와 세상의 황폐한 곳에서는 악이 판을 치고 우세하지만, 곧 신께서 일어나 정의로운 자들과 신을 믿는 자들을 편드실 것이다. - p.178

 이런 거 저런 거 다 잊어버리고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영웅의 박진감 넘치는 모험담을 즐기라고 권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으며 충분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지만, 정가가 1만 5천원에 이르는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갑이나 통장 잔고를 위해서라도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지 싶다. 다행히 『솔로몬 케인』에는 그 다른 접근법을 가능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은 솔로몬 케인의 무지에서 나온다. 이야기 자체가 그의 시선을 통하여 펼쳐지기는 하지만, 그의 시선이 가할 수 있는 해석의 권력은 그리 강력하지 않다. 로버트 E. 하워드가 만들어낸 아프리카 세계는 이 완고한 청교도인이 모든 것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며 나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좁고 단순하지 않다. 여기 등장하는 온갖 기기묘묘한 존재들, 문화들은 영국적 청교도 문화의 바깥에서 기원한 것들이며, 그래서 종종 케인의 청교도적 믿음과, 검술과, 총질에서 빗겨나간다. 케인은 한 점 의심 없이 자신의 신을 믿는 것처럼 그런 순간에 대해 당혹감을 느낄 때에도 거짓 없이 순수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도처에 그의 지(知)를 벗어나는 것들이 잠복해 있고, 모험이 계속될수록 케인의 심리나 태도를 서술하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는 설정과는 일관되지 않은 표현들이 발견된다. 특히 부두교 무당 응롱가가 등장하는 「해골의 달」(The Moon of Skulls)이나 「망자의 산」(The Hills of the Dead)에서는 케인이 불순한 것으로 바라보는 마법이 전면에 나서 사태를 해결함으로써 이런 부조화가 심해지고 「한밤의 날갯소리」(Wings in the Night)나 「발자국 소리」(The Footfalls Within)에서는 케인의 청교도적 우주관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순간조차 발견된다.

지구력 시험이라면, 저 야만인들이 그의 용수철 같은 반사 신경만큼이나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밤이 오면 그들을 다시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케인은 자신의 피에 흐르는 양글로 색슨의 야만적인 정수에 힘입어 그들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p.292~293

놈들은 자연의 무시무시한 장난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창조가 실험이었던 태고에 이루어진 실패작이었다. 어쩌면 놈들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금지된 결합에서 나온 후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은 진화에서 일탈한 변종일지도 몰랐다. 케인은 오래전, 인간은 고등 동물에 불과하다는 고대 철학자들의 이단적인 이론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기 때문이다. - p. 330

솔로몬 케인은 몸서리쳤다. 그가 아는 생명과 다른 생명을 보았고, 그가 아는 죽음과 다른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의 네가리가 지은 먼지 쌓인 통로에서처럼, 망자들의 무시무시한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카나들과의 대결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의 삶이란 갖가지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세상은 여러 가지 세상 안에 존재할 따름이며, 존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깨달음이었다. - p.355

 바로 이러한 균열, 마치 『베오울프』(Beowulf)라든가 『가윈 경과 녹색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같은 고전 영문학 영웅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상이한 가치관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는 서술자의 태도가 『솔로몬 케인』을 단순무식한 백인우월주의 영웅 서사물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해준다. 아무리 강력한 편견이 담긴 시선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이 보고 듣고 다루는 대상에 대해 솔직하고자 한다면 일말의 진실 혹은 깨우침을 담을 수 있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이나경이 옮기고 크림슨에서 출간한 『솔로몬 케인』은 아마도 북미의 Del Rey 출판사에서 낸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을 기반으로 한 책인 듯하다. 이것이 추측인 이유는 서지사항에 판권 정보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나 저작권에 민감하신 독자분들께서는 안심하셔도 좋다. 로버트 E. 하워드의 작품은 저작권이 만료된 퍼블릭 도메인이기 때문에 판권료를 따로 지불하지 않아도 번역 출간이 가능하다.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을 저본으로 선택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인데, 이 책은 로버트 E. 하워드가 쓴 모든 솔로몬 케인 이야기, 심지어 미완성 단편과 시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크림슨에서는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에 실린 게리 지아니의 삽화까지도 모두 옮겨 실었으니, (삽화의 경우에는 저작권을 얻어 수록했음이 명시되어 있다) 단순히 영화에 편승하여 대충 낸 기획이 아니라는 믿음이 생긴다. 약간 더 일찍, 촌스러운 영화 이미지를 표지에 내세워 출간된 눈과마음 출판사의 판본과 비교해 보면 눈과마음 판본의 경우 단편 「사신의 오른손」(The Right Hand of Doom)과 시 「검은 얼룩」(The Old Black Stain), 「리처드 그렌빌 경의 귀환」(The Return of Sir Richard Grenville), 「솔로몬 케인의 귀향」(Solomon Kane's Homecoming)이 빠져 있다. 목차를 통해 대조한 것이지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므로 번역 상태나 삽화 유무에 대한 비교는 할 수 없으나 (하지만 삽화를 크림슨에서 독점 계약했다고 하니 아마 눈과마음 판본에는 없을 것이다) 빠진 단편과 세 편의 시가 지닌 매력, 그리고 보는 이를 맥 빠지게 하는 영화 이미지 표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크림슨 판본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크림슨 판본은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을 저본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삽화가 게리 지아니의 서문이나 H. P. 러브크래프트의 로버트 E. 하워드에 대한 회고, 혹은 책 뒤에 실린 로버트 E. 하워드 연보 등을 수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수록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판권료를 지불해야 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 뭐, 그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적어도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의 말미에 실린 로버트 E. 하워드의 원고에 대한 설명에 상응하는 정보는 어떻게든 제공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 어디에도 「악마의 성」(The Castle of the Devil), 「사신의 검은 기수들」(Death's Black Riders), 「바스티의 매」(Hawk of Basti), 「아수르의 후예」(The Children of Asshur)가 미완성작이라는 정보가 실려 있지 않은 채 완성작들과 섞여있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당황할 만하다. 관련 정보를 책 앞에 미리 안내하고 각 작품의 연도를 밝혀두었더라면 독자의 이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구의 히로익 팬터지가 별 인기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영화 개봉에 맞추어 설렁설렁 낼 수도 있었을 만한 책을 이처럼 신경 써서 출간해 준 출판사에게는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같은 작가의 코난 사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을 해줄 수 없을까 하는 것이지만, 과연 이 책이 얼마나 판매될 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할 수 있는 청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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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고스트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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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독 기억을 파고들어 단단히 자리 잡는 책들이 많은 올해의 독서 생활 중에서도 특히 아껴가며 읽은 책이 있기에 짤막하게나마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껴가며 읽었다는 말은 그냥 수식어는 아니다. 열다섯 편(더하기 한 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거의 2주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던 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힘이 지지부진해서가 아니라, 매 편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마다 차오르는 만족감이 워낙 커서 다음 작품을 향해 책장을 넘기는 대신 잠시 책을 덮어두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한국어판의 표지에는 “제왕 스티븐 킹의 아들 조 힐의 환상 컬렉션! 멈출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악몽의 롤러코스터!”라는 홍보용 문구가 (다행히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게끔) 붙어있고, 실제로 책을 사게 된 것도 어느 정도는 좋은 공포 소설을 읽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지만, 책을 펴고 네 쪽 정도를 읽고 나니 이 작가를 굳이 아버지의 이름 아래에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편 셋을 읽고 난 뒤에는 공포 소설로 한정하여 홍보할 책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세계를 다루는 작가라는 확신이 찾아왔음을 밝혀두련다.

 

 그렇더라도, 일단은 킹의 아들이라는 점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몰아내며 읽은 것은 아니기에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면─ 

 

 훌륭한 소설가들의 재능 중에서도 특히 존경스러운 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거나 대충 접해보았거나 막연히 떠올리고 있던 어떤 체험을 적확한 표현을 통해 끄집어내어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 체험과 직접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전율케 하는 능력이고, 현대 미국 작가들 중에서 그 능력을 가장 자유분방하게 발휘해대는 작가 중 하나가 킹이 아닌가 싶다. 킹의 소설들이 아무리 타블로이드 지 구석에 박스 기사로나 실릴 만한 “말도 안 되는”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것을 (비)웃어넘기는 대신에 손에 땀을 쥐고, 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보면서 읽어치우는 건 그저 환상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독자의 욕구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그의 소설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인물들이 체험하는 공감각적 감각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받아들이고 분석하는 데에 기반이 되어주는 그들의 일상사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집 소녀가 염력을 발휘해 졸업 파티를 피바다로 만들든 과거로부터 찾아온 정체불명의 어릿광대가 살육을 저지르든 독자는 “아 뭐 시간 날 때 읽는 심심풀이 땅콩이지”라고 얼버무리는 대신에 그걸 쉬이 눈을 돌려버릴 수 없는 자신의 체험으로 공유하고 그 속에 표현된 감정들을 얼마간 공유하게 된다. 킹은 그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탠드』(Stand)에서 슈퍼 독감 때문에 미국이 결딴나는 꼴을 시공간을 오가면서 한 챕터 만에 서술한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주먹이 꼭 쥐어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하고 그 와중에 어떻게든 진실을 규명하고 타인을 살려보려고 하는 이들의 절망감에 눈물도 흘리고 한다.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은 아니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은 재능을 힐도 갖추고 있다. 책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 「신간 공포 걸작선」의 도입부 몇 장만을 읽어도 이 점을 확언할 수 있다. 인생의 3분의 1을 좋은 공포 문학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에 바쳐왔지만 스스로가 점점 지쳐가고 있고 좋은 작품들은 점점 줄어가고 있으며 그러나 할 줄 아는 짓이 그것뿐이라 쉬이 발을 빼지는 못한 채 관성에 일상을 맡기고 있는 한 공포 문학 전문 잡지의 편집자가 느끼는 피로감과,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기가 막힌 소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절절히 담겨 있는 이 대목은 비단 공포 문학 팬들 뿐만 아니라 나름 “성장기”를 거쳤다 자부하는 온갖 분야 팬들의 가슴을 순간 먹먹하게 할 만하다.  

 

 캐롤이 오리건 극장에서 〈더 헌팅(The Haunting)〉을 처음 본 게 열한 살 때였다. 사촌들과 함께 갔지만 불이 꺼지자 같이 간 동행들은 어둠 속에 삼켜져버렸고 캐롤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되어 숨 막히는 벽장 같은 그림자 속에 꼭 갇혀 있게 되었다. 가끔씩 눈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몸 안의 의지력을 다 끌어내야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초조한 아픔과 뒤섞인 기쁨의 전율이 천천히 일었다. 마침내 불이 켜지자 신경 말단에 한순간 구리 전선을 꽂고 전류를 통하게 한 듯 짜릿짜릿했다. 그는 바로 이 감각에 강박적 욕망을 점차 키워 나가게 되었다. 

 나중에 전문가가 되고 이런 공포소설을 읽는 게 직업이 되자 이런 느낌은 조금 덤덤해지기는 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아스라이 겪은 듯한 기분만 남아 감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감정의 추억에 더 가까워졌다. 좀 더 최근엔 그 추억조차 도망가버렸고 맥 빠진 건망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커피 탁자 위에 쌓인 잡지들을 볼 때 찾아오는 얼얼한 무관심. 아니, 가끔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지만 다른 류의 두려움이었다. (20)

 

 그런데 그처럼 비등한 재능을 발휘하면서도 힐의 소설을 아버지의 것과 비교하는 대신 다른 영역에 놓여있다고 여기게끔 하는 특징이 있으니, 바로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뭐랄까, 거친 표현이지만, 품위가 있다는 점이다. 똑같이 실감나는 인물과 사건을 보여주더라도 킹의 이야기가 “아 씨바 나도 그거 알지!”하고 어깨 툭툭 쳐가면서 읽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면 힐의 이야기는 침침한 골방에서 홀로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넘겨가면서 ‘아, 나 말고 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하며 은밀한 유대감을 맛보게 하는 느낌에 가깝다. 그 차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극명하게 느껴져, 어떤 면에서는 (책 전체에 가득 깔린 미국 문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마치 생판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글 같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런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하는 지를 잘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번역문을 통해서도─어쩌면 번역문 때문에?─확연히 드러나는 문체의 차이와 더불어) 힐이 그리는 주인공들과 사건들이 킹의 경우보다 좀 더 조용히 내면을 향해 가라앉기 때문이지 싶다. 공포 문학이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주변부에 위치한 주인공 운운하는 것은 이제는 창작을 넘어서 비평이나 감상의 클리셰로까지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힐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들은 특히나 그런 인상이 강하다. 사회적 환경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들 각자는 저마다 남에게는 쉬이 드러낼 수 없는 비밀스러운 특성이나 집착의 대상을 지니고 있고, 이야기는 그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어떤 극적인 갈등이나 변화를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대신 그냥 그런 특성들이 빚어낼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인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머무른다. 

 

 이 “머무른다”는 점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납치 감금당한 소년이나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곤충이 되어 있더라는 식의 대단히 “선정적인” 소재를 다룰 때에도 작가는 호들갑을 떨거나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극적 상황을 빠르게 연결해 가면서 감정이 물밀듯이 몰아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 나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며 그런 상황 자체가 가져다주는 감정에 대해 스스로 고민한다. (노파심에서 덧붙임: 이 문장을 결코 “지루하다”의 다른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님을 예비 독자들 앞에 맹세하는 바이다) 주인공들도 덩달아 자신의 지각과 체험을 타인과 공유하기보다는 속내에 담아두고 견디는 편에 가깝다. 마치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이해하기 힘든 잘못을 잊으려고 애쓰면서도 자꾸 그 편린을 돌아보고, 또 그러면서 계속 살아가길 희망하는 「자발적 감금」의 주인공 놀란처럼.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와 같이 아드레날린이 치솟음직한 대파국을 향해 이야기가 전개될 때조차도 등장인물이 하는 행동 자체보다도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 되짚어보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여기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이런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이러쿵저러쿵 해서 결국 이리저리 가서 이런 결말을 맞았단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이런 사람이 있었어. 이런 사람이라는 게 어떤 사람이냐면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끝내주는 롤러코스터를 타러 온 독자들이라면 그런 태도 앞에 실망하면서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냐고 반문하거나 결말이 약하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나는 힐이 액션의 속도를 늦추는 대신 타인에 대한 이해의 속도를 배가함으로써 독자를 또 다른 롤러코스터에 태워줬다고 생각한다. 클라이브 바커가 닐 게이먼의 그래픽 노블 『샌드맨』 2권 서문에서 두 가지 종류의 환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떤 환상 이야기는 우리 내면의 불안이나 불가지한 어떤 것들을 끄집어내어 형체를 부여한 뒤 그것을 다시 제거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함으로써 완성되는 일종의 엑소시즘인 반면 다른 환상들은 그렇게 쉬이 없어지지 않으며 저기서 우리와 함께 계속하여 그 형상을 바꿔가며 공존하는 실재로 남는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옆에 책이 없어 정확한 인용을 할 수 없다. 설령 내가 좀 윤색한 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이러한 논의는 바커만의 것이 아니고 공포 영화를 평할 때에도 곧잘 나오는 이론이기 때문에 큰 줄기는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말하자면 힐은 후자의 환상에 천착하는 작가이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지 책장을 넘길 때만 독자를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머무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른 존재들의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그렇게 볼 때 “20th Century Ghosts”라는 제목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 독자의 주변을 계속 맴도는 열다섯 (혹은 열여섯) 명의 유령들. 

 

 한편, 작가는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을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문화적 토양, 많은 팬들이 즐기면서 더불어 만들어 온 공포의 영토를 향한 점잖은 인사도 잊지 않는다. 이미 대강의 줄거리를 밝힌 「신간 공포 걸작선」부터가 대놓고 공포 문학을 가까이 하는 작가와 독자들에 대한 자의식적인 우화이며, 이후에도 이 어두컴컴한 세계에 진즉부터 눈길을 보내왔던 이들이라면 반길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만남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세한 내용을 밝히진 않겠지만 「20세기 고스트」와 「바비 콘로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돌아오다」는 영화팬이라면 눈물을 글썽이며 맞이할 만하고,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나 「아브라함의 아들들」처럼 대놓고 고전 다시 쓰기를 즐기는 작품들도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간에 단순한 반복에서 머무르는 대신 작가 고유의 세계를 확립하여 독창적인 즐거움도 안겨주고 있으니 갖가지 실망스러운 “포스트모더니즘” 장르 문학에 좌절한 경험이 있는 “선수”들께서도 염려 놓으시길. 

 

 

 

 덧. 번역서의 제목이 『20세기 고스트』이며 수록된 작품들 중 두 번째 작품의 제목도 「20세기 고스트」이며, 유감스럽게도 책의 어디에도 각 단편의 원제를 밝혀두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어판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인데, 실제로 이 단행본의 제목과 두 번째 단편의 제목은 다르다. 단행본은 20th Century Ghosts이며 두 번째 단편은 “20th Century Ghos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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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철리가의 여인 Medusa Collection 12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원경 옮김 / 시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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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레이먼드 챈들러, 대실 해밋과 더불어 하드보일드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고, 하드보일드가 별반 인기 없는 나라인데다 + 여전히 고전 추리 걸작들 상당수를 수십 년 전의 후줄근한 무판권 번역에나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라 도리가 없었던 거다. 이 땅에 판권이라는 개념이 들어서기 이전, 일본 번역본을 성의 없이 중역해서 펴냈던 판본을 그대로 다시 찍어내면서 한편으로는 추리소설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여튼 다른 한국어판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미끼를 내세워 책을 파는 분들의 잇속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결백한 척 하는 것으로, 혹은 그렇게 간절히 장르 걸작들에 매달릴 생각은 없는 나이롱 팬으로 보이려나. 하여튼 뒤늦게나마 이 작품을 출판해주신 시작 출판사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미 어떤 식으로든 읽은 사람이 많을 게 뻔한 터라 출판을 결정하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모쪼록 잘 팔려서 맥도널드의 다른 대표작들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사립탐정 루 아처가 나오는 시리즈가 무려 열여덟 편이라니 양심과 의식이 조금쯤 남아있는 독자로서 차마 전집을 기원할 수는 없겠다)  

 

* * *

 

 읽고 나니 굳이 비교하자면 맥도널드는 해밋보다는 챈들러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몰타의 매(The Maltese Falcon)]식으로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면서 송곳니를 서로의 몸뚱어리에 박아 넣으려는 느낌보다는 불결한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는 우수와 고독의 탐정 필립 말로의 분위기가 더 많이 난다. 미국 서부해안을 오가며 부잣집들의 구질구질하고 어두컴컴한 사연에 휘말린다는 줄거리도 그렇고.

 

 단, 루 아처의 정신연령이 말로보다 높다.

 

 나를 비롯한 전세계의 수많은 챈들러 팬들을 뻑 가게 만들었을 말로식 빈정거림이나 냉소로 위장한 채 자기 상처를 한없이 핥아대는 듯한 독백은 [위철리 가의 여인]에서는 철저하리만치 배제되어 있다. 아처는 말로와 달리 혼잣말이 적으며, 수사에 비협조적인 상대에게 신경을 긁는 농담을 날리면서 불필요하게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책날개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듯 물리적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제압하고자 나서는 데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고. 말로는 필요 이상으로 세상의 구린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매를 사서 번 다음 홀로 사무실이나 바에 틀어박혀 징징거리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스스로의 성질을 못 이긴 채 기나긴 연설을 늘어놓는 인물이었고 그런 과시적인 면모가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고 챈들러로 하여금) 그를 타락한 거리를 홀로 걷는 기사처럼 보이게 하는 데가 있었다.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울적한 세상에 대해 함께 우울해 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말로를 우러러보게 된다. 

 

 반면 아처는 그 정도의 자기 포장도 하지 않으며 징징거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수사를 더 하는 편이다. [위철리 가의 여인]을 읽으면서 감탄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아처가 수사 의뢰를 받은 당일에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증거를 모으는가 하는 거였다. 글쎄, 아마 도표를 만들어 보면 말로도 바쁘게 돌아다니기는 했겠지만 아처의 경우에는 자신의 군말을 줄인 채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니 더 부지런하게 느껴진 달까. 그래서 이 사람은 정서적으로 타락 도시에 깊이 절어있는 기사라기보다는 정말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할 뿐인 공무원처럼 보인다. (물론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기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점잖은 방문 외판원스럽지만)

 

 말로와 아처 모두 사람들에게 쉽게 실망하지 않을 만큼 닳고 닳았고 그 와중에 그래도 나약한 사람들 내지 괜찮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애정을 보내는 인물들이지만 그럼에도 아처가 말로와 달리 좀 더 실제로 있을 법한, 그리고 좀 더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그런 절제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말로가 비탄에 젖어 읊조릴 때 독자는 그와 더불어 세상의 불결함을 느낀다기보다는 세상의 불결함에 대한 말로의 비탄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종종 말로가 아무리 울적해 하더라도 독자는 두 눈에 하트를 붙인 채 흐느적거리며 말로만 바라보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아처는 아무리 심각하고 추잡한 진상이 밝혀져도 별 말이 없다. 물론 그도 연민이나 동정, 작은 냉소나 슬픔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거의가 한두 문장으로 마무리되며, 그 내용도 독자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읊조리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라기보다는 그저 함께 공감함직한 정도의 말이다. 챈들러의 경우와 달리 밑줄을 긋거나 어디 옮겨 놓고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경우가 적은 것, 그리고 아처가 말로보다 좀 더 “심심한”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테지만, 그렇게 매혹적인 폼을 얼마간 자제한 덕분에 물기 없는 비정한 냄새가 훨씬 더 확 끼쳐오며, 비극의 무게가 독자를 함께 짓누른다. “우수”라는 표현은 여기에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 푹 젖어있어서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 그러니 하드보일드라는 표현의 의미를 돌이켜 보노라면 맥도널드 쪽이 챈들러보다 좀 더 그 정수를 꿰뚫고 있는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와 함께 세상의 추악함을 한 꺼풀 벗겨 보면서, 바로 옆에서 반 박자 정도 빠르게 우리의 생각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주는 믿음직한 관찰자이자 동료, 그게 아처다.

 

 

 덧 하나. 이원경 역자의 번역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는데 다만 욕 번역은 너무 점잖게 하신 듯하다. 원문을 보지 못했으니 원래 어떤 어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등장인물이 무슨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다른 등장인물이 “욕 좀 하지 마”라는 식으로 대꾸한다면 독자가 읽기에도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하다는 느낌이 와야 할 텐데, 오히려 “욕 좀 하지 마”라는 상대의 반응을 읽고 나서야 다시 앞 사람의 대사로 돌아가서 ‘이 중에 어느 게 욕인가’하고 살펴보곤 했다. 번역하신 책의 목록이나 역자 후기를 보노라니 혹시 역자께서 좀 점잖으신 분이라서 그러신 게 아닌가 싶다. 그 점잖음이 아처의 말을 옮기기에는 딱 맞았다 싶지만(하드보일드는 무조건 험악하고 거친 마초스러운 맛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옮겼더라면 한숨이 푹푹 내쉬어졌을 거다), 앞으로 좀 험악한 등장인물이 험악한 소리를 할 때는 보다 험악하게 옮겨주시면 좋겠다.  

 

 덧 둘. 쓰고 보니 너무 챈들러-말로 팀을 깐 분위기다. 한 작품에게 찬사를 보내기 위해 다른 작품을 까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닌데. 여러모로 느낌이 비슷해서 읽는 내내 자꾸 챈들러-말로 생각이 났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깐 것도 아니다. 하드보일드로서의 성취만 보자면 맥도널드가 더 원숙하다고 생각하지만 말로의 중얼거림에 함께 푹 절어서 스스로를 현대적인 버전의 기사 내지 수퍼히어로처럼 여기게 되는 맛도 각별하지 않은가. 정신연령이 낮다고 말하는 게 비난이나 내리 보거나 ‘나는 걔는 별로’라고 말하는 건 아니라 이 말씀. (안 그러면 어떻게 알렉상드르 뒤마의 모험 소설들이 아직도 남녀노소를 불문한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말이 많고 빈정거림이 많은 덕에 개그 레벨은 말로 쪽이 훨씬 높지 않은가. 

  

 덧 셋. 구체적인 내용 이야기도 조금 할까 하다가 그냥 맥도널드-아처 팀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서 말았는데, 하여간 꽤 마음에 들었다. 비비 꼬인 플롯을 차근차근 푸는 솜씨도 좋고, 거기다가 어딘가 고전기 퍼즐 미스터리 혹은 일본의 신본격 추리소설을 연상케 함직한 트릭을 넣은 것도 퍽 효과적이었다. 하드보일드는 주로 누가 누구를 왜 협박했나/죽였나 이런 거만 따라가면 그만인 경우가 많은데, 딱 그런 태도로 따라가다가 한 방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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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Space Fantasia (2001 야화) 01 2001 Space Fantasia
호시노 유키노부 글.그림, 박상준 감수 / 애니북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좋은 SF 만화를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리얼리티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다루는 이 장르의 매력은 사실 상상에서나 가능함 직한 기기묘묘한 현상을 멋지게 그려내는 데에 있는 게 아니다. SF 본연의 매력은 바로 그런 신기한 세계가 사실은 지금 독자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에 대한 주도면밀한 과학적 이해를 확장해서 만들어낸 가능항의 세계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데에 있다. 여기서 가능항의 세계라는 건 (SF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먼 미래에 실제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세계라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불가능할지라도 하여튼 몇 가지 기본 가설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거기서 출발하여 논리적으로 가닿을 수 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추상적인 예를 들자면─우리에게 현상 A와 현상 B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주는 지식이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꿈에서나 볼 법한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상상 E가 있다고 해보자. A와 B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진지하게 E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무슨 말을 듣게 될까? 몽상가, 맨날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사는 놈, “니 나이가 몇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직도 애들이나 보는…” 기타 등등. 바로 이때 SF는 화를 버럭 내면서 그래도 나는 하여튼 E를 보여줄 거라고 떼쓰는 대신에 독자를 찬찬히 구슬린다.


야, A랑 B랑은 관련이 있는 거잖아. 그거는 너도 알지? (야,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런데 A랑 B랑 그렇게 연결할 수 있는 이유가 뭐였더라? (바보냐? 이러저러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공부 좀 하고 살아라) 아, 그거였지. 근데,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A-B의 연결선상에 C라는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어… 그럴 수도 있겠네. 혹시 그런 연구 같은 거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다보니까 될 것 같아서. (그러게. 재밌는 생각이네.) 야, 근데 만약에 C가 된다고 치면 말야, 거기서 또 D도 나오지 않겠냐? (에이, 그건 좀 심하다.) 그치. 웃기긴 하지. 근데 하여튼 일단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잖아. 그럼 E도 될 것 같고. (야, 그게 말이 되냐?) 너도 아까 A-B의 연결 논리에는 동의했잖아. 그거 그대로 이어본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데 솔직히 일단 말은 되잖아. (아니, 근데…) 그치? 말은 되지? (아니 뭐…)


 이런 느낌. “공상”을 통해 E를 뚝 하고 던지면서 백일몽, 현실과 상관없는 환상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B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너무 당연해서 그 원리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도 안 해본 사람에게 그 기본 논리를 되짚어준 뒤 C, D, E 사이에 부정하기 힘든 선을 이어내는 것, 그게 SF의 원초적 힘이라고 생각한다.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최대한 못 믿을 만큼 큰 뻥을 치되 그걸 최대한 믿게끔 하기. 그 장쾌한 뻥에 속아 넘어가는 데에 SF가 제공하는 쾌락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공상 E의 환상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될 일은 아니며,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사고의 전개를 필요로 한다. SF가 무엇보다도 문학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반면 SF를 시각화하는 장르들, 만화나 영화는 종종 이 본연의 과정을 놓친 채로 E의 환상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공을 들이기 때문에 실망스러워진다. 이건 단지 창작자들의 문제만은 아니고 매체의 특성과도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시각적 표현을 중심으로 하는 매체는 실재의 표면을 보여줌으로써 분석이 필요 없는 즉각적인 감동을 전달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형체 없고, 일면 기계적이기까지 한 논리적 사고를 다루는 데에는 애를 먹기 쉬운 듯하다. 때로는 시각적 표현이 아닌 언어를 곁들임으로써 그 약점을 만회해 보려고 하지만 그러다가 종종 매체 자체의 특성을 파묻어버리는 악수를 거듭하기도 하고. 이 방면의 걸작으로 이름난 만화나 영화를 보더라도 종종 ‘이것이 과연 SF 팬으로서 느끼는 즐거움인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을 정도이다. 현상에 대한 접근 방식과 가설 설정 및 탐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광활한 우주와 온갖 상상력 넘치는 이종이기들을 전시하는 영화들보다는 오히려 우주는커녕 별빛 한 번 보여주지도 않은 채 인물들을 싸구려 공포 소설에나 나옴직한 상황 속에 밀어 넣지만 일단 그렇게 한 다음에는 철저히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혹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다 표현해 버리는 박찬욱의 [박쥐(2009)] 같은 영화가 SF의 영혼에 훨씬 더 맞닿아 있다. (만화 중에서는 아예 말로 설명하기를 그만두는 대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시공간 구축을 통해 내적으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주는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이 떠오른다. 뭐, 니헤이의 만화는 애초에 SF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지금 내가 적용한 좀 더 엄밀한 의미의 SF에도 맞아 떨어진단 얘기다)


 그런 터였던지라, 이번에 재간된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 야화]도 반신반의하며 집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대의 최대치는 유키무라 마코토의 [프라네테스(プラネテス)] 정도. 우주의 환상적인 모습에만 함몰되는 대신, 우주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걸 계속 탐구하고 거기서 살아나간다는 게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그 작품 수준이면 정말 심 본 거지. (여담이지만 작품 자체도 걸작이거니와 총 네 권 밖에 되지 않아 남에게 선물하기도 딱 좋은 [프라네테스]가 절판된 것은 참으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단편 여덟 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1권의 앞쪽 두 단편을 보았을 때만 해도 적잖은 실망감이 밀려왔다. 물론 출판사의 작가 소개에는 “『2001 야화』의 제목은 아랍설화 『천일야화』와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결합하여 만들었으며, 초반 도입부 역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오마주로 되어 있다”는 친절한 “경고”가 덧붙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편 하나의 핵심 아이디어와 연출 방식을 통째로 클라크의 작품(혹은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서 따온 것은 심하다 싶었다. 뭐, 오마주라니까… 하는 기분으로 읽은 두 번째 단편 “지구광”도 별반 나을 것은 없었다.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임무와 매일 같이 다투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평화주의적 연설을 늘어놓는 내용인데, “푸른 별 지구”를 바라보면서 ‘아아, 저토록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매일 싸움을 일삼는 인간들의 꼴이란 얼마나 안타까운가!’하는 구태의연한 감상에 새로운 걸 더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나마 그 “싸움을 일삼는 인간들”이라는 것이 냉전 중인 미국과 소련인지라 얄팍함이 한결 더했다.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말을 인용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1985년 작품의 한계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리가 있나. 이미 온갖 SF를 읽어왔음직한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은 세 번째 단편부터는 서서히 사그라졌다. 다행히 이 작품은 80년대라는 지구의 시간적 배경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우주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 한 채로 그저 인간들아, 인간들아, 하지도 않았다. 내성적인 동생을 잘 대해주지 못한 누나의 죄책감이나 다룰 것 같았던 세 번째 단편이 ‘우주는 인간에게 있어 죽음의 세계일까’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던지더니 그 이후로는 점점 더 막나가는, 그러나 합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단편들이 이어졌다. 특히 네 번째 단편 “소용돌이 III”는 그토록 짧은 분량 안에서 고전 하드 SF 특유의 문제 해결 테마(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과학적 탐구를 통해 해결해 내는)를 적절히 활용하는 동시에 우주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화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기대도 다루는 데다 SF 만화로서의 시각적 장쾌함 또한 도외시하지 않아 이 정도만 유지해 준다면 『2001 야화』에 대한 찬사들이 아깝지 않겠다 싶었다. 제목부터 클라크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후의 단편 둘도 아이디어 자체는 단순한 맛이 있었지만 장대한 스케일 덕분에 나쁘지는 않았고.


 (여담이지만 다섯 번째 단편 “스타차일드”를 보면서는 최근 출간된 한국 SF 단편 10선 [U, ROBOT]에 실린 박성환의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너를 사랑했단다”─그 단편집에서도 특별히 깊숙이 와 닿았던 단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둘은 동일한 설정을 공유하고 있으나 다른 방식의 전개 및 감성을 보여주는데, 두 작품의 차이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이 둘을 대조하면서 80년대의 SF와 2000년대 SF, 혹은 일본 SF와 한국 SF의 차이를 논하는 건 극심한 오버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너를 사랑했단다”가 선택한 길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 외 다른 한국 SF 단편들에서 곧잘 나타나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한국의 SF 작가들은 신나게 우주─외우주와 내우주 모두─를 탐색하러 가기에는 아직 자신들을 이 땅에 붙잡아 매고 있는 게 많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다. 혹은 얽매임 없는 탐험의 시대는 이미 다 끝나버렸다거나)


 일곱 번째 단편 “아득한 여행자”는 첫 번째 단편 “위대한 선조”와 마찬가지로 클라크와 큐브릭의 이미지나 갈등 상황을 대놓고 베끼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의외의 방향으로 비틀어 내어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그 결과물이 단지 오리지널에 대한 찬사를 바치거나 그것을 패러디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대신 다른 단편들을 통해 꾸준히 탐구해 온 인간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인간성이 우주와 대면한다는 것에 대한 주제를 지속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러웠고. 이 정도 해줘야 오마주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1권의 대미를 장식하는 여덟 번째 단편(중편으로 보아도 무방한 길이. 1권의 절반 가까이가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 “악마의 별”이야말로 진정 탄복스럽다. 이 단편이 처음부터 독자들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박력 있게 나가는가 하면 오히려 정반대다. 난데없는 밀실 추리극이 펼쳐질 듯하다가 ‘뭔가 뒤가 구린 교황청’ 설정이 나오더니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을 줄줄이 읊어대는가 하면 급기야 숱한 SF에서 편의주의적으로 써먹어왔던 설정 하나(스포일러가 될 테니 언급은 않겠지만 정말 이제 그 자체로는 시시하게만 들리는 설정이다)가 등장하는 등 클리셰들이 중구난방으로 등장하여 절로 한숨을 내쉬게 만든다. 그러나 이 단편은 클리셰의 나열에만 만족하는 대신 뻔뻔스러운 태도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쭉 밀고 가서 종국에는 한 점으로 연결해 버림으로써 거대한 과학적 가설 하나를 구축한다. 그 가설은 우주의 기원과 인류의 진화까지 모두 끌어들일 정도로 막 나가는 과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로버트 J. 소여의 [멸종(End of an Era)]과 비교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그 가설의 탄생은 종교와 과학이 합치되는 순간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구태의연한 ‘교황청 나빠요’ 혹은 ‘인류가 우주로 뻗어나가는 이 시점에 웬 고리타분한 종교냐’하는 식으로 갈 듯한 전개였건만, 마치 그런 우둔한 독자를 ‘종교와 과학은 세계의 탄생과 질서 그리고 운행에 관한 탐구라는 점에서 오히려 함께 가고,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다독이는 듯 인간과 우주를 포괄하는 하해와 같은 마음씨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게다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과학자로서의 태도와 사명에 대해 갈등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흉내 내기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디테일도 썩 훌륭해서 “소용돌이 III” 만큼 장쾌하지는 않지만 작은 쾌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문제해결식 SF도 배치되어 있다. 만화네 뭐네 할 것 없이 그냥 SF 굴지의 명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악마의 별”까지 읽고 나면 여기서 제기된 우주와 인간의 탄생에 대한 가설이 이 단편 안에서만 적용되는 대신 이전의 다른 단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져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위대한 선조”와 “지구광”의 주제나 디테일조차도 “악마의 별”이 제시하는 맥락 안에서 돌이켜 보면 좀 더 무게 있게 다가온다. 특히 “위대한 선조”에서 원시 생물에 대한 묘사는 클라크나 큐브릭의 비전에 비해 훨씬 공격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악마의 별”을 보고 나면 이 묘사가 단지 일회용 자극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1권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세계관 하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혹시 독자들이 눈치 못 챌까봐 아예 “위대한 선조”의 한 장면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냥 단순한 옴니버스 구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단편 하나하나를 읽어갈수록 그 깊이가 두터워진다.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으나 2권 도입부를 살짝 들춰보니 “악마의 별”에서 제시된 설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또 새로운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이미 1권에서 해낸 것만으로도 경애하는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만약 이토록 일관되면서도 드넓은 시야가 3권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생애 가장 황홀한 SF 만화와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덧 하나. 책 만듦새는 나쁘지 않으나 더스트 재킷은 다소 불만스럽다. 가운데에 창을 뚫어 놓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면 이 부분이 어디 걸려서 찢어지기 쉽고 그렇지 않더라도 쉽게 낡아서 보기 흉해진다. 심지어 제작과정에서도 파손이 잘 일어나는 모양이다. 나는 전 3권을 묶어서 파는 세트를 구입했는데, 포장을 뜯어보니 2권 더스트 재킷의 이 부분이 찢어지고 심하게 일그러져 접혀 있었다. 예전만큼 책 손상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는 않으며, 더구나 더스트 재킷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스테이지로 감싸 책에 딱 붙여 보관하는 편이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이 문제로 인해 마음 상하는 소비자들이 생길 듯하다. 


 덧 둘. SF란 무엇인가를 두고 좀 빡빡하게 말하긴 했는데, 실제 SF 독자로서의 나는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다. 꼭 SF여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SF적 소도구들을 활용하는 “느슨한” 작품들도 기꺼이 즐기는 편이다. 다만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시각성이 주가 되는 매체, 즉 만화나 영화에서는 너무 표피적인, “SF스럽게 보이는” 작품들만 많은 듯해서 한 번쯤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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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앞서, 예비 독자들께 드리는 당부 말씀. 부디 출판사의 책 소개글이나 책 뒤표지에 실린 간략한 홍보글들을 읽지 마시길. 한 번 읽고 플롯을 파악한다고 해서 금세 스러질 정도로 허약한 감흥을 제공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서 과정에서 의외의 기쁨을 제공해 줄 여러 가지 디테일들을 미리 알아버리는 건 김빠지는 일일 테니. “공룡이 나오는 과학소설” 정도만 알아둔 채로 곧장 읽는 편이 이 작품의 막장성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자세라고 하겠다. (이런 표현 자체가 이미 그저 “공룡이 나오는 과학소설”은 아니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하겠지만, 그런 정도의 막연한 예상을 가볍게 작살낼 정도의 힘은 지닌 작품이니 염려 놓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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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뜻 보면 [멸종]은 가진 패를 모두 펼쳐놓고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표지의 공룡 그림은 차치하더라도,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서 “나는 고생물학자다. 공룡 연구가다.”라는 문장이 나오고, 바로 다음 문단에는 “시간 여행.”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세 문장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공룡이 나온다. 이때 작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 번도 같은 시간대에 존재해 본 적이 없는 두 존재를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이냐, 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서 코난 도일은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에서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섬을 만들었고, 마이클 크라이튼은 [쥬라기 공원(Jurassic World)]에서 유전공학을 끌어들여 공룡을 부활시켰다. 그런 다음 두 작품 모두 그런 상황에서 가능한 모험담을 제공하는 데에 주력했다. [멸종]은 같은 문제 앞에서 시간 여행을 끌어들인다. 혹시 이것이 공룡 액션 소설이 아니라 시간 여행의 메커니즘을 진지하게 다루는 과학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볼 수도 있겠지만, 두어 문단을 더 읽다 보면 그마저도 헛된 기대로 만드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녀는 2005년에 시간 여행의 기본 원리를 발견했고, 그로부터 불과 8년 뒤인 2013년에 실제로 작동하는 타임머신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는 믿기 힘든, 정말로 믿기 힘든 위업을 이룩했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그럴 수 있었느냐고 내게 묻지는 말아 달라. 전혀 모르니까. 사실 칭-메이 자신도 이 현상에 관해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원리는 신경 끄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달라는 주문이렷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백악기 말, 공룡 멸종 전의 시대에 도착한 주인공은 주변 환경 및 생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해 나간다. 책의 제목을 되새기면서, 결론을 내렸다 : [멸종]은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가 체험해보지 못한 고시대로 간 과학자가 가설로만 알려진 사실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고리타분한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그걸 상당히 엄정한 과학적 시각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중단편 과학소설 선집 [하드 SF 르네상스 1]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작품들─핵심 모티프는 고리짝 때 것인데 그걸 촘촘한 과학적 디테일로 둘러싸 감동을 주는─을 본 적이 있기에 ‘이것도 하나의 조류인가 보다’ 싶었다.
 

 이러한 예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깨지는가에 관해서 세세하고 늘어놓고 싶지는 않으나, 실로 몰염치한 수법을 사용한다는 정도는 밝혀둬야겠다. (어쨌든 이 글은 독서 감상문이자 RE-view이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초반부에 제시된 몇 가지 소소한 디테일들, 이를테면 백악기 말 지구의 환경과 주인공 브랜든이 살던 21세기 지구의 환경 사이의 차이 같은 것이 브랜든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하면서 대담한, 미처 예기치 못한 가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실현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식으로 과학소설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리라 믿었기에, [멸종]이 내놓은 카드는 그냥 충격적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비윤리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자, 말을 너무 돌리지 않겠다. [멸종]은, 자기가 몇 십 페이지 동안 하던 이야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모티프를 갑자기 꺼내어 독자를 후려친다. 무엇보다도 그 새로 끌어들인 모티프란 것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시간 여행을 이용한 공룡 탐사” 만큼이나 곰팡내 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읽는 이를 망연자실케 한다. [반지의 제왕]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프로도를 따라 요정들의 도시 리벤델까지 와서 유일반지를 처리할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달프가 일어나서 “반지를 파괴하려면 모르도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의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구양진경』과 『구음진경』을 통해 구양신공과 구음신공을 익힌 다음 두 내공의 힘을 한데 모아 항룡십팔장으로 쳐야한다네.”이라고 말한다면 대체 기분이 어떻겠는가? 잡다한 클리셰를 섞는다는 점에서 F. 폴 윌슨의 [다이디타운(Dydeetown World)]이나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Old Man's War)] 같은 작품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이 두 작품이 비교적 유사한 카테고리 안에 있는 소재들을 취사선택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매끄럽게 질주하는 반면 [멸종]은 생판 남남일 것만 같은 소재들을 충돌시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그 순간 발생하는 흡인력이란 어떤 면에서는 막장 드라마의 흡인력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작가는 제정신인가’와 ‘대체 앞으로 어쩔 셈인가’가 끄는 쌍두마차 달리는 소리)
 

 그런데 바로 그 충돌을 가능케 하는 클리셰들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멸종]을 과학을 양념 삼아 곁들인 모험 소설이 아니라 진짜배기 과학소설로 만들어주는 원천이다. 과학소설 본연의 힘이 바로 독자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의 터전과 “허무맹랑한 공상” 사이를 논리의 확장을 통해 말이 되게 이어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도약,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관의 지각 변동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상이한 “허무맹랑한 공상”을 여러 개 펼쳐 놓은 다음 그것을 한데 그러모아서 공룡 멸종이라는 엄연한 사실에까지 연결해 내는 로버트 J. 소여의 작업에서도 같은 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모티프들은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이미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여러 차례 보아온 진부한 아이디어들에 의존하고 있고, 때로는 그나마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어물쩍 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이미 한 번 언급했으니 다시 말하자면, 특히 시간여행 쪽이 좀 그렇다) 그러나 100% 순종 남남처럼 보이는 각각의 요소들이 사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마침내는 모두가 얽히고설켜 하나의 참신하고 박력 넘치는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감동은 과학소설 특유의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는 표현으로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분명 뭐 이렇게 “공상과학”스러운 전개가 다 있냐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지금껏 무심히 읽어오며 쌓아두었던 여러 가지 관념, 가설들이 단숨에 작살나면서 그 자리를 완전히 새로운 논의가 대체해 버리니 부지불식간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 한판 뒤집기를 위해 작품 전체의 구조가 발휘하는 집중력은 실로 강력한데, 심지어 프롤로그에서 등장인물의 감성을 드러내고 자극하기 위해 쓰인 것만 같았던 브랜든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 장면조차도 사실은 작품의 중추에 위치한 과학적 사변과 직결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는 작가가 골수 과학소설 독자들에게 보내는 윙크 같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과학소설 팬들은 눈을 반짝이며 독서를 고대할 수 있겠지만 과학소설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이 작품은 무슨 최신 물리학 이론 같은 것을 가져다가 “전문적”인 가설을 전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흔히들 “애들이나 읽을” 이야기로 치부함직한 수준의 소재를 끌어올려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과학적 사변을 이루어 내고 있는지라 진입장벽도 높지 않다. 더군다나 다른 희소식도 있다. [멸종]은 그렇게 담대한 상상을 짜면서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자세 또한 잃지 않는다. 코믹할 수도, 애틋할 수도 있는 삼각관계 로맨스가 주인공 브랜든과 동료 클릭스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세계]나 [쥬라기 공원] 부럽지 않은 모험 액션 또한 빗발치듯 쏟아진다. 공룡끼리 싸우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인간끼리 싸우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공룡이랑 인간이랑 싸우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공룡이랑… 아, 이거는 스포일러니까 생략. 아무튼 읽으시라.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꺼질 듯한 장려한 스펙터클 액션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어디 그뿐인가, 과학소설에는 딱히 관심 없으나 공룡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기꺼이 추천할 수 있다. 작가의 과학소설가적 역량은 클리셰들을 엮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 담긴 공룡에 대한 묘사나 공룡 멸종설에 관한 논의는 ‘그런 게 있다더라. 근데 이야기의 중심 줄기랑 큰 관련은 없으니까 대충 알아두고 넘어갑시다’ 수준은 가볍게 넘어선다. 이 모든 일을 불과 36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 안에서 해내니 감탄할 밖에. 곰곰이 돌이켜 보면 이만큼 다재다능하다는 느낌을 주는 과학소설을 만난 적은 없는 듯하다. 참으로 간만에 만난 대박이다. 

  

 덧. 알라딘에서 썸네일 이미지로 활용하고 있는 표지 이미지는 색감이 실물과 많이 다르다. 미리보기를 통해 실제 색감을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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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0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09-05-0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제정신인가’와 ‘대체 앞으로 어쩔 셈인가’가 끄는 쌍두마차 달리는 소리) 전 이부분에서 빵 터졌습니다...이런 생각이 독자한테 들게끔 한다는건 그 작가 나름의 능력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