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Space Fantasia (2001 야화) 01 2001 Space Fantasia
호시노 유키노부 글.그림, 박상준 감수 / 애니북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좋은 SF 만화를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리얼리티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다루는 이 장르의 매력은 사실 상상에서나 가능함 직한 기기묘묘한 현상을 멋지게 그려내는 데에 있는 게 아니다. SF 본연의 매력은 바로 그런 신기한 세계가 사실은 지금 독자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에 대한 주도면밀한 과학적 이해를 확장해서 만들어낸 가능항의 세계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데에 있다. 여기서 가능항의 세계라는 건 (SF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먼 미래에 실제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세계라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불가능할지라도 하여튼 몇 가지 기본 가설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거기서 출발하여 논리적으로 가닿을 수 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추상적인 예를 들자면─우리에게 현상 A와 현상 B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주는 지식이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꿈에서나 볼 법한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상상 E가 있다고 해보자. A와 B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진지하게 E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무슨 말을 듣게 될까? 몽상가, 맨날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사는 놈, “니 나이가 몇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직도 애들이나 보는…” 기타 등등. 바로 이때 SF는 화를 버럭 내면서 그래도 나는 하여튼 E를 보여줄 거라고 떼쓰는 대신에 독자를 찬찬히 구슬린다.


야, A랑 B랑은 관련이 있는 거잖아. 그거는 너도 알지? (야,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런데 A랑 B랑 그렇게 연결할 수 있는 이유가 뭐였더라? (바보냐? 이러저러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공부 좀 하고 살아라) 아, 그거였지. 근데,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A-B의 연결선상에 C라는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어… 그럴 수도 있겠네. 혹시 그런 연구 같은 거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다보니까 될 것 같아서. (그러게. 재밌는 생각이네.) 야, 근데 만약에 C가 된다고 치면 말야, 거기서 또 D도 나오지 않겠냐? (에이, 그건 좀 심하다.) 그치. 웃기긴 하지. 근데 하여튼 일단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잖아. 그럼 E도 될 것 같고. (야, 그게 말이 되냐?) 너도 아까 A-B의 연결 논리에는 동의했잖아. 그거 그대로 이어본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데 솔직히 일단 말은 되잖아. (아니, 근데…) 그치? 말은 되지? (아니 뭐…)


 이런 느낌. “공상”을 통해 E를 뚝 하고 던지면서 백일몽, 현실과 상관없는 환상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B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너무 당연해서 그 원리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도 안 해본 사람에게 그 기본 논리를 되짚어준 뒤 C, D, E 사이에 부정하기 힘든 선을 이어내는 것, 그게 SF의 원초적 힘이라고 생각한다.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최대한 못 믿을 만큼 큰 뻥을 치되 그걸 최대한 믿게끔 하기. 그 장쾌한 뻥에 속아 넘어가는 데에 SF가 제공하는 쾌락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공상 E의 환상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될 일은 아니며,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사고의 전개를 필요로 한다. SF가 무엇보다도 문학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반면 SF를 시각화하는 장르들, 만화나 영화는 종종 이 본연의 과정을 놓친 채로 E의 환상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공을 들이기 때문에 실망스러워진다. 이건 단지 창작자들의 문제만은 아니고 매체의 특성과도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시각적 표현을 중심으로 하는 매체는 실재의 표면을 보여줌으로써 분석이 필요 없는 즉각적인 감동을 전달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형체 없고, 일면 기계적이기까지 한 논리적 사고를 다루는 데에는 애를 먹기 쉬운 듯하다. 때로는 시각적 표현이 아닌 언어를 곁들임으로써 그 약점을 만회해 보려고 하지만 그러다가 종종 매체 자체의 특성을 파묻어버리는 악수를 거듭하기도 하고. 이 방면의 걸작으로 이름난 만화나 영화를 보더라도 종종 ‘이것이 과연 SF 팬으로서 느끼는 즐거움인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을 정도이다. 현상에 대한 접근 방식과 가설 설정 및 탐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광활한 우주와 온갖 상상력 넘치는 이종이기들을 전시하는 영화들보다는 오히려 우주는커녕 별빛 한 번 보여주지도 않은 채 인물들을 싸구려 공포 소설에나 나옴직한 상황 속에 밀어 넣지만 일단 그렇게 한 다음에는 철저히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혹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다 표현해 버리는 박찬욱의 [박쥐(2009)] 같은 영화가 SF의 영혼에 훨씬 더 맞닿아 있다. (만화 중에서는 아예 말로 설명하기를 그만두는 대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시공간 구축을 통해 내적으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주는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이 떠오른다. 뭐, 니헤이의 만화는 애초에 SF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지금 내가 적용한 좀 더 엄밀한 의미의 SF에도 맞아 떨어진단 얘기다)


 그런 터였던지라, 이번에 재간된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 야화]도 반신반의하며 집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대의 최대치는 유키무라 마코토의 [프라네테스(プラネテス)] 정도. 우주의 환상적인 모습에만 함몰되는 대신, 우주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걸 계속 탐구하고 거기서 살아나간다는 게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그 작품 수준이면 정말 심 본 거지. (여담이지만 작품 자체도 걸작이거니와 총 네 권 밖에 되지 않아 남에게 선물하기도 딱 좋은 [프라네테스]가 절판된 것은 참으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단편 여덟 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1권의 앞쪽 두 단편을 보았을 때만 해도 적잖은 실망감이 밀려왔다. 물론 출판사의 작가 소개에는 “『2001 야화』의 제목은 아랍설화 『천일야화』와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결합하여 만들었으며, 초반 도입부 역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오마주로 되어 있다”는 친절한 “경고”가 덧붙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편 하나의 핵심 아이디어와 연출 방식을 통째로 클라크의 작품(혹은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서 따온 것은 심하다 싶었다. 뭐, 오마주라니까… 하는 기분으로 읽은 두 번째 단편 “지구광”도 별반 나을 것은 없었다.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임무와 매일 같이 다투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평화주의적 연설을 늘어놓는 내용인데, “푸른 별 지구”를 바라보면서 ‘아아, 저토록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매일 싸움을 일삼는 인간들의 꼴이란 얼마나 안타까운가!’하는 구태의연한 감상에 새로운 걸 더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나마 그 “싸움을 일삼는 인간들”이라는 것이 냉전 중인 미국과 소련인지라 얄팍함이 한결 더했다.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말을 인용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1985년 작품의 한계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리가 있나. 이미 온갖 SF를 읽어왔음직한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은 세 번째 단편부터는 서서히 사그라졌다. 다행히 이 작품은 80년대라는 지구의 시간적 배경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우주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 한 채로 그저 인간들아, 인간들아, 하지도 않았다. 내성적인 동생을 잘 대해주지 못한 누나의 죄책감이나 다룰 것 같았던 세 번째 단편이 ‘우주는 인간에게 있어 죽음의 세계일까’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던지더니 그 이후로는 점점 더 막나가는, 그러나 합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단편들이 이어졌다. 특히 네 번째 단편 “소용돌이 III”는 그토록 짧은 분량 안에서 고전 하드 SF 특유의 문제 해결 테마(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과학적 탐구를 통해 해결해 내는)를 적절히 활용하는 동시에 우주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화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기대도 다루는 데다 SF 만화로서의 시각적 장쾌함 또한 도외시하지 않아 이 정도만 유지해 준다면 『2001 야화』에 대한 찬사들이 아깝지 않겠다 싶었다. 제목부터 클라크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후의 단편 둘도 아이디어 자체는 단순한 맛이 있었지만 장대한 스케일 덕분에 나쁘지는 않았고.


 (여담이지만 다섯 번째 단편 “스타차일드”를 보면서는 최근 출간된 한국 SF 단편 10선 [U, ROBOT]에 실린 박성환의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너를 사랑했단다”─그 단편집에서도 특별히 깊숙이 와 닿았던 단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둘은 동일한 설정을 공유하고 있으나 다른 방식의 전개 및 감성을 보여주는데, 두 작품의 차이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이 둘을 대조하면서 80년대의 SF와 2000년대 SF, 혹은 일본 SF와 한국 SF의 차이를 논하는 건 극심한 오버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너를 사랑했단다”가 선택한 길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 외 다른 한국 SF 단편들에서 곧잘 나타나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한국의 SF 작가들은 신나게 우주─외우주와 내우주 모두─를 탐색하러 가기에는 아직 자신들을 이 땅에 붙잡아 매고 있는 게 많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다. 혹은 얽매임 없는 탐험의 시대는 이미 다 끝나버렸다거나)


 일곱 번째 단편 “아득한 여행자”는 첫 번째 단편 “위대한 선조”와 마찬가지로 클라크와 큐브릭의 이미지나 갈등 상황을 대놓고 베끼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의외의 방향으로 비틀어 내어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그 결과물이 단지 오리지널에 대한 찬사를 바치거나 그것을 패러디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대신 다른 단편들을 통해 꾸준히 탐구해 온 인간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인간성이 우주와 대면한다는 것에 대한 주제를 지속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러웠고. 이 정도 해줘야 오마주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1권의 대미를 장식하는 여덟 번째 단편(중편으로 보아도 무방한 길이. 1권의 절반 가까이가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 “악마의 별”이야말로 진정 탄복스럽다. 이 단편이 처음부터 독자들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박력 있게 나가는가 하면 오히려 정반대다. 난데없는 밀실 추리극이 펼쳐질 듯하다가 ‘뭔가 뒤가 구린 교황청’ 설정이 나오더니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을 줄줄이 읊어대는가 하면 급기야 숱한 SF에서 편의주의적으로 써먹어왔던 설정 하나(스포일러가 될 테니 언급은 않겠지만 정말 이제 그 자체로는 시시하게만 들리는 설정이다)가 등장하는 등 클리셰들이 중구난방으로 등장하여 절로 한숨을 내쉬게 만든다. 그러나 이 단편은 클리셰의 나열에만 만족하는 대신 뻔뻔스러운 태도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쭉 밀고 가서 종국에는 한 점으로 연결해 버림으로써 거대한 과학적 가설 하나를 구축한다. 그 가설은 우주의 기원과 인류의 진화까지 모두 끌어들일 정도로 막 나가는 과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로버트 J. 소여의 [멸종(End of an Era)]과 비교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그 가설의 탄생은 종교와 과학이 합치되는 순간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구태의연한 ‘교황청 나빠요’ 혹은 ‘인류가 우주로 뻗어나가는 이 시점에 웬 고리타분한 종교냐’하는 식으로 갈 듯한 전개였건만, 마치 그런 우둔한 독자를 ‘종교와 과학은 세계의 탄생과 질서 그리고 운행에 관한 탐구라는 점에서 오히려 함께 가고,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다독이는 듯 인간과 우주를 포괄하는 하해와 같은 마음씨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게다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과학자로서의 태도와 사명에 대해 갈등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흉내 내기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디테일도 썩 훌륭해서 “소용돌이 III” 만큼 장쾌하지는 않지만 작은 쾌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문제해결식 SF도 배치되어 있다. 만화네 뭐네 할 것 없이 그냥 SF 굴지의 명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악마의 별”까지 읽고 나면 여기서 제기된 우주와 인간의 탄생에 대한 가설이 이 단편 안에서만 적용되는 대신 이전의 다른 단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져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위대한 선조”와 “지구광”의 주제나 디테일조차도 “악마의 별”이 제시하는 맥락 안에서 돌이켜 보면 좀 더 무게 있게 다가온다. 특히 “위대한 선조”에서 원시 생물에 대한 묘사는 클라크나 큐브릭의 비전에 비해 훨씬 공격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악마의 별”을 보고 나면 이 묘사가 단지 일회용 자극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1권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세계관 하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혹시 독자들이 눈치 못 챌까봐 아예 “위대한 선조”의 한 장면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냥 단순한 옴니버스 구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단편 하나하나를 읽어갈수록 그 깊이가 두터워진다.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으나 2권 도입부를 살짝 들춰보니 “악마의 별”에서 제시된 설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또 새로운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이미 1권에서 해낸 것만으로도 경애하는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만약 이토록 일관되면서도 드넓은 시야가 3권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생애 가장 황홀한 SF 만화와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덧 하나. 책 만듦새는 나쁘지 않으나 더스트 재킷은 다소 불만스럽다. 가운데에 창을 뚫어 놓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면 이 부분이 어디 걸려서 찢어지기 쉽고 그렇지 않더라도 쉽게 낡아서 보기 흉해진다. 심지어 제작과정에서도 파손이 잘 일어나는 모양이다. 나는 전 3권을 묶어서 파는 세트를 구입했는데, 포장을 뜯어보니 2권 더스트 재킷의 이 부분이 찢어지고 심하게 일그러져 접혀 있었다. 예전만큼 책 손상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는 않으며, 더구나 더스트 재킷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스테이지로 감싸 책에 딱 붙여 보관하는 편이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이 문제로 인해 마음 상하는 소비자들이 생길 듯하다. 


 덧 둘. SF란 무엇인가를 두고 좀 빡빡하게 말하긴 했는데, 실제 SF 독자로서의 나는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다. 꼭 SF여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SF적 소도구들을 활용하는 “느슨한” 작품들도 기꺼이 즐기는 편이다. 다만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시각성이 주가 되는 매체, 즉 만화나 영화에서는 너무 표피적인, “SF스럽게 보이는” 작품들만 많은 듯해서 한 번쯤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