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철리가의 여인 Medusa Collection 12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원경 옮김 / 시작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마침내 레이먼드 챈들러, 대실 해밋과 더불어 하드보일드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고, 하드보일드가 별반 인기 없는 나라인데다 + 여전히 고전 추리 걸작들 상당수를 수십 년 전의 후줄근한 무판권 번역에나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라 도리가 없었던 거다. 이 땅에 판권이라는 개념이 들어서기 이전, 일본 번역본을 성의 없이 중역해서 펴냈던 판본을 그대로 다시 찍어내면서 한편으로는 추리소설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여튼 다른 한국어판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미끼를 내세워 책을 파는 분들의 잇속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결백한 척 하는 것으로, 혹은 그렇게 간절히 장르 걸작들에 매달릴 생각은 없는 나이롱 팬으로 보이려나. 하여튼 뒤늦게나마 이 작품을 출판해주신 시작 출판사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미 어떤 식으로든 읽은 사람이 많을 게 뻔한 터라 출판을 결정하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모쪼록 잘 팔려서 맥도널드의 다른 대표작들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사립탐정 루 아처가 나오는 시리즈가 무려 열여덟 편이라니 양심과 의식이 조금쯤 남아있는 독자로서 차마 전집을 기원할 수는 없겠다)  

 

* * *

 

 읽고 나니 굳이 비교하자면 맥도널드는 해밋보다는 챈들러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몰타의 매(The Maltese Falcon)]식으로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면서 송곳니를 서로의 몸뚱어리에 박아 넣으려는 느낌보다는 불결한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는 우수와 고독의 탐정 필립 말로의 분위기가 더 많이 난다. 미국 서부해안을 오가며 부잣집들의 구질구질하고 어두컴컴한 사연에 휘말린다는 줄거리도 그렇고.

 

 단, 루 아처의 정신연령이 말로보다 높다.

 

 나를 비롯한 전세계의 수많은 챈들러 팬들을 뻑 가게 만들었을 말로식 빈정거림이나 냉소로 위장한 채 자기 상처를 한없이 핥아대는 듯한 독백은 [위철리 가의 여인]에서는 철저하리만치 배제되어 있다. 아처는 말로와 달리 혼잣말이 적으며, 수사에 비협조적인 상대에게 신경을 긁는 농담을 날리면서 불필요하게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책날개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듯 물리적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제압하고자 나서는 데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고. 말로는 필요 이상으로 세상의 구린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매를 사서 번 다음 홀로 사무실이나 바에 틀어박혀 징징거리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스스로의 성질을 못 이긴 채 기나긴 연설을 늘어놓는 인물이었고 그런 과시적인 면모가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고 챈들러로 하여금) 그를 타락한 거리를 홀로 걷는 기사처럼 보이게 하는 데가 있었다.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울적한 세상에 대해 함께 우울해 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말로를 우러러보게 된다. 

 

 반면 아처는 그 정도의 자기 포장도 하지 않으며 징징거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수사를 더 하는 편이다. [위철리 가의 여인]을 읽으면서 감탄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아처가 수사 의뢰를 받은 당일에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증거를 모으는가 하는 거였다. 글쎄, 아마 도표를 만들어 보면 말로도 바쁘게 돌아다니기는 했겠지만 아처의 경우에는 자신의 군말을 줄인 채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니 더 부지런하게 느껴진 달까. 그래서 이 사람은 정서적으로 타락 도시에 깊이 절어있는 기사라기보다는 정말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할 뿐인 공무원처럼 보인다. (물론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기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점잖은 방문 외판원스럽지만)

 

 말로와 아처 모두 사람들에게 쉽게 실망하지 않을 만큼 닳고 닳았고 그 와중에 그래도 나약한 사람들 내지 괜찮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애정을 보내는 인물들이지만 그럼에도 아처가 말로와 달리 좀 더 실제로 있을 법한, 그리고 좀 더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그런 절제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말로가 비탄에 젖어 읊조릴 때 독자는 그와 더불어 세상의 불결함을 느낀다기보다는 세상의 불결함에 대한 말로의 비탄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종종 말로가 아무리 울적해 하더라도 독자는 두 눈에 하트를 붙인 채 흐느적거리며 말로만 바라보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아처는 아무리 심각하고 추잡한 진상이 밝혀져도 별 말이 없다. 물론 그도 연민이나 동정, 작은 냉소나 슬픔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거의가 한두 문장으로 마무리되며, 그 내용도 독자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읊조리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라기보다는 그저 함께 공감함직한 정도의 말이다. 챈들러의 경우와 달리 밑줄을 긋거나 어디 옮겨 놓고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경우가 적은 것, 그리고 아처가 말로보다 좀 더 “심심한”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테지만, 그렇게 매혹적인 폼을 얼마간 자제한 덕분에 물기 없는 비정한 냄새가 훨씬 더 확 끼쳐오며, 비극의 무게가 독자를 함께 짓누른다. “우수”라는 표현은 여기에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 푹 젖어있어서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 그러니 하드보일드라는 표현의 의미를 돌이켜 보노라면 맥도널드 쪽이 챈들러보다 좀 더 그 정수를 꿰뚫고 있는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와 함께 세상의 추악함을 한 꺼풀 벗겨 보면서, 바로 옆에서 반 박자 정도 빠르게 우리의 생각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주는 믿음직한 관찰자이자 동료, 그게 아처다.

 

 

 덧 하나. 이원경 역자의 번역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는데 다만 욕 번역은 너무 점잖게 하신 듯하다. 원문을 보지 못했으니 원래 어떤 어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등장인물이 무슨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다른 등장인물이 “욕 좀 하지 마”라는 식으로 대꾸한다면 독자가 읽기에도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하다는 느낌이 와야 할 텐데, 오히려 “욕 좀 하지 마”라는 상대의 반응을 읽고 나서야 다시 앞 사람의 대사로 돌아가서 ‘이 중에 어느 게 욕인가’하고 살펴보곤 했다. 번역하신 책의 목록이나 역자 후기를 보노라니 혹시 역자께서 좀 점잖으신 분이라서 그러신 게 아닌가 싶다. 그 점잖음이 아처의 말을 옮기기에는 딱 맞았다 싶지만(하드보일드는 무조건 험악하고 거친 마초스러운 맛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옮겼더라면 한숨이 푹푹 내쉬어졌을 거다), 앞으로 좀 험악한 등장인물이 험악한 소리를 할 때는 보다 험악하게 옮겨주시면 좋겠다.  

 

 덧 둘. 쓰고 보니 너무 챈들러-말로 팀을 깐 분위기다. 한 작품에게 찬사를 보내기 위해 다른 작품을 까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닌데. 여러모로 느낌이 비슷해서 읽는 내내 자꾸 챈들러-말로 생각이 났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깐 것도 아니다. 하드보일드로서의 성취만 보자면 맥도널드가 더 원숙하다고 생각하지만 말로의 중얼거림에 함께 푹 절어서 스스로를 현대적인 버전의 기사 내지 수퍼히어로처럼 여기게 되는 맛도 각별하지 않은가. 정신연령이 낮다고 말하는 게 비난이나 내리 보거나 ‘나는 걔는 별로’라고 말하는 건 아니라 이 말씀. (안 그러면 어떻게 알렉상드르 뒤마의 모험 소설들이 아직도 남녀노소를 불문한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말이 많고 빈정거림이 많은 덕에 개그 레벨은 말로 쪽이 훨씬 높지 않은가. 

  

 덧 셋. 구체적인 내용 이야기도 조금 할까 하다가 그냥 맥도널드-아처 팀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서 말았는데, 하여간 꽤 마음에 들었다. 비비 꼬인 플롯을 차근차근 푸는 솜씨도 좋고, 거기다가 어딘가 고전기 퍼즐 미스터리 혹은 일본의 신본격 추리소설을 연상케 함직한 트릭을 넣은 것도 퍽 효과적이었다. 하드보일드는 주로 누가 누구를 왜 협박했나/죽였나 이런 거만 따라가면 그만인 경우가 많은데, 딱 그런 태도로 따라가다가 한 방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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