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맨 The SandMan 1 - 서곡과 야상곡 시공그래픽노블
닐 게이먼 외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요사이 쏟아져 나오는 미국 그래픽 노블들의 한국어판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프랭크 밀러, 알란 무어, 알렉스 로스 같은 이들의 이름을 외화 좀 쓰시는 분들의 글을 통해서만 듣고 또 일러스트 한두 장씩 훔쳐보면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새 그래픽 노블 역사에 길이 남는(다는) 걸작들을 한국어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씬 시티(Sin City)] 한국어판이 나올 때만 해도 ‘거 출판사 참 용기 있네’하는 생각이 들었고(이즈음에는 나도 가끔씩 부모님의 힘을 통해 아마존에서 그래픽 노블 한두 권쯤 본 터라 감동하진 않았다), 이후 몇 편의 (덜 유명한) 작품들이 여러 출판사를 통해서 한꺼번에 나오자 ‘이렇게 모두들 바람 들려 나오다가 또 조만간 사업 다 접고 들어가 버리는 거 아닌가’하는 걱정이 밀려왔는데, 이 시장이 생각보다 오래 버티면서 설마 볼 수 있으랴 싶었던 작품들까지 나오니 이제는 정말로 그냥 기쁘게 환영하고 싶다. 특히 알란 무어의 [왓치맨(Watchmen)]은 워낙 마음에 들어서 한국어판을 사서 다 읽고는 원서를 또 샀고, 그림 좋고 강렬하기는 하지만 그냥 폼 잡는 마초맨 아닌가 싶었던 프랭크 밀러도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Batman: The Dark Knight Returns)]과 [배트맨: 이어 원(Batman: Year One)]까지 보고 나니 수퍼히어로 장르 안에 리얼리즘을 끌어들이고자 했던 그의 시도와 결과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정말이지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샌드맨 1. 서곡과 야상곡]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고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닐 게이먼이 아니라 알란 무어와 프랭크 밀러의 팬으로서 말하련다. 알란 무어와 프랭크 밀러는 [샌드맨] 앞에서는 입 다물고 엎드려야 한다. 이건 아예… 다른 차원에 놓인 작품이 아닌가. 작가 닐 게이먼의 작품으로서도 그러하다. 팬터지 소설에 익숙한 이라면 잘 알겠지만 닐 게이먼은 우리나라에 꽤 여러 작품이 소개된 작가다. 테리 프래쳇과 공저한 멋진 코미디 소설 [멋진 징조들(Good Omens)], 영화판과 발맞추어 나온 [스타더스트(Stardust)], [스타더스트] 출간한 김에 함께 나온 듯한 [네버웨어(Neverwhere)], 조만간 애니메이션이 나온다는 [코랄린(Coraline)], 동화책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The Day, Swapped My Dad for 2 Goldfish)], 그리고 최근에 번역된 [신들의 전쟁(American Gods)]까지.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베오울프(Beowulf, 2007)]와 [미러마스크(Mirrormask, 2005)]도 극장 개봉하거나 DVD가 나왔고. 그리고 먼 옛날, 대한민국이 아직 미국산 그래픽 노블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시절, 역시 그가 작가로 참여한 그래픽 노블 [흑란(Black Orchid)]이 출간된 적도 있다(물론 그래픽 노블에 목말라 하던 나는 그걸 냉큼 샀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셨던 당시의 출판 관계자 분들께 심심한 감사와 위로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몇몇 단편집에 그가 쓴 단편이 실리기도 했고. 이 모든 작품들을 전부 일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보았다고 생각하는데, 아, 그러나 [샌드맨] 만큼 경이감에 도취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먼 옛날 DC 코믹스의 역사 속에 잠시 존재했던 수퍼히어로 캐릭터 샌드맨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여기서 닐 게이먼을 통해 그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진짜 샌드맨, 즉 서구 설화 속 잠과 꿈의 요정, 더 나아가 꿈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에 관한 이야기로 탄생한다. 1권 [서곡과 야상곡]은 샌드맨이 흑마술사들에 의해 유폐 당했다가 자유를 되찾은 뒤 잃어버린 자신의 힘을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나며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흔한 이야기라고? 그러나 보라! 마이크 미뇰라의 [헬보이(Hellboy)]를 연상시키는 선정적인 오컬트(절대 부정적인 의미로 쓴 표현이 아니다)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 셰익스피어와 단테, 밀튼 등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서구 문화 속 상상의 세계를 다룬 온갖 요소들을 경유하면서 자신을 살찌운다. 어디 그뿐인가. 닐 게이먼은 [샌드맨]을 가능케 한 DC 코믹스에게 윙크를 보내는 듯 이 세계의 수퍼히어로들과 악당들을 인용하고, 그들을 플롯의 중심으로 삼기도 한다. 게다가 때로는 스티븐 킹과 맞먹으려 드는 “현대 미국 소도시 타블로이드 스타일 공포”까지 마음껏 펼쳐낸다. 다시 한 번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고 송구스럽지만 여기서 닐 게이먼이 펼쳐내는 공포의 강렬함에 비하면 [왓치맨]에 알란 무어가 이야기 속 이야기로 넣은 해적선 이야기 쯤은 그냥 습작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소재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펼쳐내는 솜씨 또한 대단히 인상적인데, 운명의 세 여신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컷마다 여신들의 위치가 바뀐달지, 아니면 예전에는 루시퍼가 독재하고 있던 지옥이 요즘은 파리대왕 벨제붑과 아자젤까지 가세하여 삼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식의 자잘한 디테일들에서 시작하여 전체 줄거리를 풀어나가는 방식까지 모두 상상력이 물씬 묻어난다. 신과 악마급의 존재들이 나와서 갈등을 벌인다 하여 우당탕쿵탕 스테일 큰 “액션”으로 때려 부수고 그런 단순하고 손쉬운 전개는 없다. 등장인물들이 그냥 좀 “쎈 놈”들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개념의 화신인 만큼 어디까지나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권능의 특질에 따라 행동하고 겨룬다. 특히 샌드맨이 자신의 힘을 되찾기 위해 지옥의 악마와 지옥의 논리, 꿈의 논리를 이용하여 겨루는 “지옥의 희망” 에피소드나, 마지막 에피소드 “그녀의 날개소리”는 이 작품이 초월적인 존재들을 다루는 방식을 가슴 절절히 담아낸 명편이다. 


 어디 이야기만 좋은가. 연출도 끝장이다. 딱 부러진 직사각형 컷에 얽매이지 않고 화면 구성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이야 이 작품만의 특질은 아니지만 특히 여기서는 한 페이지, 혹은 두 페이지의 컷들이 물결치듯 이어지고, 또 컷이 없는 공간에도 그림들이 들어차면서 전체가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깊은 잠”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그러한 정조가 엿보이는데, 그래도 “깊은 잠”의 경우는 비교적 “평범한” 형태의 연출을 따라가는 편이다. 허나 샌드맨이 힘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연출이 본격적으로 과격해지면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꿈과 환상의 세계(라고 하니 무슨 에버랜드 광고 같지만)를 나아간다는 느낌을 물씬 전해준다. 예컨대 “승객들” 에피소드에서 인간들의 꿈을 타고 자리를 옮겨 가는 샌드맨의 모습을 단 한 페이지로 뇌리 속에 박아 넣는 부분은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The Chronicles of Amber)]와, “지옥의 희망” 에피소드에서 지옥의 악마들이 집결한 모습을 두 페이지 한 컷으로 펼쳐낸 부분은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ベルセルク)]와 맞먹으려 들면서 동작의 분절로 액션을 전달하는 대신 하나의 순간으로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래픽 노블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 그렇게 박력 넘치던 연출이 스티븐 킹 식 타이블로이드 공포를 제공하는 에피소드 “24시간”에 이르면 다시 비교적 딱딱하고 침착한 직사각형의 컷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고, 1권을 마무리하는 편안한 에피소드 “그녀의 날개소리”에서는 컷의 테두리를 지우거나 넓게 잡아 샌드맨의 권태와 한가로움, 그 누나 죽음(Death)의 유쾌명랑발랄상큼따뜻아름다운 동생 사랑이 배어나오게 식으로 계속 형태를 달리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표현 속에 담아낼까 하는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권 단위, 에피소드 단위, 장면 단위로 능수능란하게 바뀌는 연출이 닐 게이먼의 환상적인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정말 굉장한 예술품을 접하고 있다는 포만감과 희열을 제공한다.
 

 지금 내가 너무 미사여구를 많이 써서 마치 책 팔아먹자고 난리치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줄까봐 걱정스러운데, 그래, 격한 흥분 상태에서 이 글을 쓴 건 사실이다. 하지만 ① 솔직히 이런 경지에 이른 예술품은 많이들 좀 사 봐서 창작자들에게 보답해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고(평소 잘 안 쓰는 인터넷 서점 리뷰를 써서라도 그렇게 되도록 하고 싶단 말이다!), ②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주례사 평 안 쓰려고 구체적인 예도 들어가며 느낀대로 말했으니 떳떳하고, ③ 내가 아무리 둔한 혀를 놀려 별 소리를 다 했어도 직접 보고 나면 이런 수준의 표현은 [샌드맨]이 해낸 일의 반의반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그래픽 노블뿐만 아니라 훌륭한 팬터지, 훌륭한 이야기를 맛보고 싶으시며 우리의 꿈과 환상이 밥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 짝에도 도움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망상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고의 가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덧 하나. 번역자 이수현 님은 1권은 좀 산만한 편이라고 우려 섞인 말씀을 하시던데… 아니 다소간 우려해야 할 수준의 작품이 이 정도라면 대체 다음 권들은 어떻다는 것인가. 앞으로 열 권이 더 남았는데, 그걸 다 소화할 수 있을지 내 정신이 무척 걱정스럽다.
 

 덧 둘. 한국어판임을 알아차리기 힘든 저 표지는 DC 코믹스 측의 요구사항이라고 한다. 책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길 바란 모양인지 맨 뒷장에는 국내 출간 여부는 확실하지 않은 다른 책들의 광고까지 모두 번역되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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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9-02-1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벗님께 알라딘에서도 뽐뿌를 받고 가네요-_-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은 보관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