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케인
로버트 E. 하워드 지음, 이나경 옮김, 게리 지아니 그림 / 크림슨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야만인 코난의 창시자로 유명한 로버트 E. 하워드가 만든 또 다른 액션 히어로 솔로몬 케인은 설정만 놓고 보면 거부감이 확 느껴지는 캐릭터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영국인 청교도가 아프리카로 들어가서 주의 이름을 내세우며 무력으로 정의를 수호한다니, 이건 누가 봐도 제국주의의 다른 모습이오, 광신주의에 가까운 편협한 종교인의 태도가 예상되며, 인종차별적 발언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실제로 이 책에서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시선이 등장하는 대목을 찾아 지적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종종 캐릭터의 성격과, 그 캐릭터를 다루는 서술자의 태도 사이의 거리를 지적함으로써 이런 유형의 이야기를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솔로몬 케인』은 그런 식의 거리두기에도 무심하며,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자는 철저히 케인의 시선을 따라 사건을 서술한다. 

소녀는 케인이 잘 아는 입술이 두껍고 짐승 같은 서해안의 흑인들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흑인이었다. 날씬하고 섬세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피부색도 새카맣기보다는 짙은 갈색이었다. 콧대는 곧았고 입술은 지나치게 두껍지 않았다. 어딘가 그녀의 혈통에 베르베르인의 피가 짙게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240

  더구나 여기에 초창기 서구 히로익 팬터지 특유의 남성적 용맹무쌍함에 대한 찬양과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선한 의지를 지닌 이를 보호한다는 식의 순진한 사상이 결합하고 나면 현대 독자들이 의지할 바는 거의 없어 보인다. 예컨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의지만 있으면 싸울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치기 위해 마법이 실린 무기를 원할 독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옛적 아저씨들의 순진함을 비웃으며 낄낄거리는 캠피한 독서법만이 남은 것인가. 결국 이 책은 결국 별로 좋을 것 없는 영화판의 개봉에 맞추어 조금이라도 원작을 팔아보기 위해 기획된 것에 불과한가. (흠,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나라의 어떤 분들은 있는 그대로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주의 이름으로 야만인들에게 빛을!)

팔다리와 주먹으로 맞서 싸우던 케인은 마침내 유령이 움츠러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섬뜩한 웃음소리가 당황스러운 분노의 비명으로 변하고 있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지옥 입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용기이며, 심지어 지옥군단도 그에 맞서 대항하지 못한다. - p.16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고, 그런 놀라운 기적을 가능하게 해준 신께서 이제 와서 우리를 쓰러뜨리실까? 그럴 리는 없다! 인간의 도시와 세상의 황폐한 곳에서는 악이 판을 치고 우세하지만, 곧 신께서 일어나 정의로운 자들과 신을 믿는 자들을 편드실 것이다. - p.178

 이런 거 저런 거 다 잊어버리고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영웅의 박진감 넘치는 모험담을 즐기라고 권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으며 충분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지만, 정가가 1만 5천원에 이르는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갑이나 통장 잔고를 위해서라도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지 싶다. 다행히 『솔로몬 케인』에는 그 다른 접근법을 가능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은 솔로몬 케인의 무지에서 나온다. 이야기 자체가 그의 시선을 통하여 펼쳐지기는 하지만, 그의 시선이 가할 수 있는 해석의 권력은 그리 강력하지 않다. 로버트 E. 하워드가 만들어낸 아프리카 세계는 이 완고한 청교도인이 모든 것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며 나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좁고 단순하지 않다. 여기 등장하는 온갖 기기묘묘한 존재들, 문화들은 영국적 청교도 문화의 바깥에서 기원한 것들이며, 그래서 종종 케인의 청교도적 믿음과, 검술과, 총질에서 빗겨나간다. 케인은 한 점 의심 없이 자신의 신을 믿는 것처럼 그런 순간에 대해 당혹감을 느낄 때에도 거짓 없이 순수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도처에 그의 지(知)를 벗어나는 것들이 잠복해 있고, 모험이 계속될수록 케인의 심리나 태도를 서술하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는 설정과는 일관되지 않은 표현들이 발견된다. 특히 부두교 무당 응롱가가 등장하는 「해골의 달」(The Moon of Skulls)이나 「망자의 산」(The Hills of the Dead)에서는 케인이 불순한 것으로 바라보는 마법이 전면에 나서 사태를 해결함으로써 이런 부조화가 심해지고 「한밤의 날갯소리」(Wings in the Night)나 「발자국 소리」(The Footfalls Within)에서는 케인의 청교도적 우주관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순간조차 발견된다.

지구력 시험이라면, 저 야만인들이 그의 용수철 같은 반사 신경만큼이나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밤이 오면 그들을 다시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케인은 자신의 피에 흐르는 양글로 색슨의 야만적인 정수에 힘입어 그들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p.292~293

놈들은 자연의 무시무시한 장난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창조가 실험이었던 태고에 이루어진 실패작이었다. 어쩌면 놈들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금지된 결합에서 나온 후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은 진화에서 일탈한 변종일지도 몰랐다. 케인은 오래전, 인간은 고등 동물에 불과하다는 고대 철학자들의 이단적인 이론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기 때문이다. - p. 330

솔로몬 케인은 몸서리쳤다. 그가 아는 생명과 다른 생명을 보았고, 그가 아는 죽음과 다른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의 네가리가 지은 먼지 쌓인 통로에서처럼, 망자들의 무시무시한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카나들과의 대결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의 삶이란 갖가지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세상은 여러 가지 세상 안에 존재할 따름이며, 존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깨달음이었다. - p.355

 바로 이러한 균열, 마치 『베오울프』(Beowulf)라든가 『가윈 경과 녹색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같은 고전 영문학 영웅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상이한 가치관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는 서술자의 태도가 『솔로몬 케인』을 단순무식한 백인우월주의 영웅 서사물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해준다. 아무리 강력한 편견이 담긴 시선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이 보고 듣고 다루는 대상에 대해 솔직하고자 한다면 일말의 진실 혹은 깨우침을 담을 수 있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이나경이 옮기고 크림슨에서 출간한 『솔로몬 케인』은 아마도 북미의 Del Rey 출판사에서 낸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을 기반으로 한 책인 듯하다. 이것이 추측인 이유는 서지사항에 판권 정보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나 저작권에 민감하신 독자분들께서는 안심하셔도 좋다. 로버트 E. 하워드의 작품은 저작권이 만료된 퍼블릭 도메인이기 때문에 판권료를 따로 지불하지 않아도 번역 출간이 가능하다.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을 저본으로 선택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인데, 이 책은 로버트 E. 하워드가 쓴 모든 솔로몬 케인 이야기, 심지어 미완성 단편과 시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크림슨에서는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에 실린 게리 지아니의 삽화까지도 모두 옮겨 실었으니, (삽화의 경우에는 저작권을 얻어 수록했음이 명시되어 있다) 단순히 영화에 편승하여 대충 낸 기획이 아니라는 믿음이 생긴다. 약간 더 일찍, 촌스러운 영화 이미지를 표지에 내세워 출간된 눈과마음 출판사의 판본과 비교해 보면 눈과마음 판본의 경우 단편 「사신의 오른손」(The Right Hand of Doom)과 시 「검은 얼룩」(The Old Black Stain), 「리처드 그렌빌 경의 귀환」(The Return of Sir Richard Grenville), 「솔로몬 케인의 귀향」(Solomon Kane's Homecoming)이 빠져 있다. 목차를 통해 대조한 것이지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므로 번역 상태나 삽화 유무에 대한 비교는 할 수 없으나 (하지만 삽화를 크림슨에서 독점 계약했다고 하니 아마 눈과마음 판본에는 없을 것이다) 빠진 단편과 세 편의 시가 지닌 매력, 그리고 보는 이를 맥 빠지게 하는 영화 이미지 표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크림슨 판본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크림슨 판본은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을 저본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삽화가 게리 지아니의 서문이나 H. P. 러브크래프트의 로버트 E. 하워드에 대한 회고, 혹은 책 뒤에 실린 로버트 E. 하워드 연보 등을 수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수록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판권료를 지불해야 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 뭐, 그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적어도 『The Savage Tales of Solomon Kane』의 말미에 실린 로버트 E. 하워드의 원고에 대한 설명에 상응하는 정보는 어떻게든 제공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 어디에도 「악마의 성」(The Castle of the Devil), 「사신의 검은 기수들」(Death's Black Riders), 「바스티의 매」(Hawk of Basti), 「아수르의 후예」(The Children of Asshur)가 미완성작이라는 정보가 실려 있지 않은 채 완성작들과 섞여있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당황할 만하다. 관련 정보를 책 앞에 미리 안내하고 각 작품의 연도를 밝혀두었더라면 독자의 이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구의 히로익 팬터지가 별 인기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영화 개봉에 맞추어 설렁설렁 낼 수도 있었을 만한 책을 이처럼 신경 써서 출간해 준 출판사에게는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같은 작가의 코난 사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을 해줄 수 없을까 하는 것이지만, 과연 이 책이 얼마나 판매될 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할 수 있는 청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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