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실 해밋 - 중국 여인들의 죽음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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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책을 펴들고 진득하니 앉아 대실 해밋의 단편집에 관해 감상을 써보려다가 채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집어치우고 말았다. 해밋의 작풍이나 성정에 관해 무언가 그럴듯한 말을 꾸며내려 애쓰는 내 모습이 꼴사납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작 해밋에게는 그런 기질이 없지 않은가. 물론 그도 작가로서 자신의 문장을 갈고 닦았겠지만, 최종 결과물에서는 힘을 주어 근사한 글을 선보이겠다는 집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 콘티넨털 옵은 그저 일어난 일을 일어난 대로 말하고 생각한 것을 생각한 대로 말할 뿐이다. 중언부언하지도 않고 말을 에둘러 꼬지도 않는다. 자신이나 남의 행동을 보며 함부로 이렇다저렇다 분석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콘티넨털 옵에게는 자신을 과도하게 채찍질하는 지식인풍의 자의식이 없다.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윤리를 거듭 반추하며 겉으로는 무심한 척해도 끝없이 비아냥을 흘리며 세상의 갖은 풍경에 관심을 갖는 필립 말로의 글은 해밋에 비하면 여기저기 기름기가 많은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런즉 내가 감상을 쓴답시고, 혹은 이 책을 보기 좋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답시고 그의 행동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거나 해밋의 문장에 관해 갖은 미사여구를 덧붙인다면, 그건 그냥 바보 짓이 되기에 십상일 것이다. 작가가 검소한 한 문장으로 말해놓은 것을 어지러운 열 문장으로 '번역'하는 꼴만큼 한심한 것도 없지 않겠나.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만 말하겠다. 해밋의 단편은 해밋의 장편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많은 낱말을 필요로 하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단편도 장편들만큼이나 사납고 빠르고 영리하다. 펄프 픽션에 어울리는 자극도 한가득이다. 소재도 머리 좋은 여인과 벌이는 귀여운 지분거림부터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소란스러운 군사 작전까지 다양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의 뒷골목만 상상했던 독자라면 그 자유로움에 아마 깜짝 놀랄 거다. 그렇다고 감정의 진폭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얕지도 않다. '세련된' 범죄 소설 작가들이 정교한 언어로 세상을 잘게 조각내어 하나씩 맛보려 할 때 해밋은 그 모든 조각이 담겨 있는 덩어리를 한 손에 통째로 쥐어뜯었을 뿐이다. 차라리 그편이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나는 또 슬슬 바보짓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니 이런 하잘 것 없는 소개를 읽는 데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냥 해밋을 읽으시길. 그리고 모쪼록 그렇게 인기를 얻어 아직 소개되지 않은 해밋의 다른 단편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참, 그래도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책을 읽을 때 권말의 작가 연보도 놓치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대실 해밋 장편 전집에 수록된 연보보다 조금 더 자세한데, 그 디테일 차이가 여러 가지 즐거움(혹은 슬픔)을 선사한다. 특히 1947년에 딸과 함께 보낸 시간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포복절도했다. 당사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웃긴 건 웃긴 거니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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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강도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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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의의 쐐기를 시작으로 아이스, 킹의 몸값, 경찰 혐오자, 조각맞추기를 거쳐 여섯 번째로 만난 87분서 시리즈. 이쯤 되니 87분서는 대표작 한두 권이 아니라 시리즈로서 읽을 때 더 빛을 발한다는 말이 깊이 와 닿는다. 물론 작품마다 중심 사건은 있고, 수사 과정도 있고, 결론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 이야기의 내적 완결성을 따지기보다는 여러 작품을 관통하며 펼쳐진 87분서의 세계라는 큰 그림 쪽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리고 거꾸로 그 큰 그림 안에 담겨 있는 조각이라면 어떤 조각이든 상관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시트콤 프렌즈를 생각하면서 베스트 에피소드나 베스트 시즌을 가릴 수도 있겠으나 그 전에 열 시즌을 함께한 캐릭터들의 삶 전체를 친근히 여기게 되듯, 87분서 세계도 이제는 사건의 성격을 불문하고 그저 꾸준히 함께할 벗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인상은 어느 정도는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출간 전략 전환과도 상관있겠다. 이전까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출간한 세 권의 87분서 시리즈는 모두 중심 사건에 집중하는 밀도가 높은 작품들이었다. 살의의 쐐기』는 어쩌면 시리즈 최강인지도 모를 공간 집중력을 자랑했고, 킹의 몸값87분서 형사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괴 사건의 딜레마에 몰두했으며, 조각맞추기역시 사라진 돈의 행방이 담긴 사진 조각을 맞춘다는 목표를 놓고 한 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였다. 그게 시리즈를 막 소개하기 시작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출판사의 고민이 담긴 선택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시리즈가 쌓일수록 재미가 배가된다'는 말도 일단 책이 꾸준히 나올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은 혼자 힘만으로도 독자의 눈길을 붙잡아두며 오롯이 설 수 있는 작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시리즈의 인지도가 웬만큼 올라갔다고 판단했는지, 피니스 아프리카에서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 이제부터는 시리즈를 순서대로 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출간된 피니스 아프리카의 네 번째 87분서 시리즈 『노상강도』는, 바로 숱한 출판사에서 끝없이 재간되던 87분서 첫 번째 작품 『경찰 혐오자』의 속편이다. 이미 87분서 시리즈 작품이 여럿 나왔음에도, 어쩐지 새삼 '이제부터 진짜로 시리즈 시작'이라는 감회가 밀려온다.

 

 노상강도는 굳이 분류하자면 살의의 쐐기, 킹의 몸값, 조각맞추기보다는 아이스쪽에 조금 더 가깝다. 군더더기 없이 촘촘히 엮은 플롯을 따라 열심히 책장을 넘기도록 한다기보다는 여기저기 흩뿌려진 각각의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캐릭터의 성격이나 인간관계를 음미하는 기쁨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격인 순찰 경관 버트 클링은 경찰 혐오자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잠시 근무를 쉬다가, 옛 친구를 만나고, 비공식적으로 사건을 의뢰받고, 복직하고, 새로이 사랑에 빠지고, 순찰경관 주제에 살인 사건에 기웃거린다고 혼나고, 형사가 된다. 그가 수사 자격이 없음에도 사건에 뛰어들며 겪는 곤란,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만난 여인의 마음을 여는 과정, 그의 삶의 변화는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 퍽치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두 줄기가 반드시 짜놓은 각본처럼 딱딱 들어맞으며 긴밀히 상호작용할 필요도 없다. 맥베인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소설의 설계에 따라 배치하는 장기말로 삼기보다는 나름의 생을 사는 인간으로 대한다. 직업은 직업. 범죄를 수사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생활은 있고, 반대로 사생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언저리에도 범죄의 그림자는 드리울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때로는 가장 감정의 폭이 크고 격렬한 대목이 경찰이 범인을 발견하여 붙잡는 순간이 아니라 한 식사 장면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후기작 아이스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아일린 버크 형사를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서 다시 만나는 반가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퍽치기를 잡기 위해 함정수사에 나선 그녀가 겪는 사건은 사실 중심 플롯과 큰 관련은 없다. 하지만 피하고자 한다면 피할 수도 있는 위험 속으로 발을 들이며 그녀가 들려주는 각오의 말, 현장의 두려움, 그 안에서 피어나는 동료 형사와의 유대 관계는 그 자체로 값진 아이솔라 경찰 세계의 한 풍경이다. 경찰 혐오자의 스티브 카렐라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자리를 비우고 있다가 결말에 이르러서야 형사실에 얼굴을 들이미는 그의 모습에 웃음지을 것이다. 살의의 쐐기를 읽은 독자라면 장차 잉꼬 부부 노릇을 톡톡히 할 그와 (노상강도에는 등장하지도 않은) 아내 테디의 모습을 미리 떠올리거나 되새길 수도 있겠다. 퍽치기 사건은 범인이 잡히면 그걸로 끝이지만, 연애는, 동료애는, 신혼은, 그리고 87분서라는 공동체의 세계는 이제 막 새로이 시작되었다. 독자의 시선이 작품의 경계 너머로 뻗어있는 시리즈 전체를 향할 수밖에. 아마도 이것이 노상강도를 읽는 동안 느낀 정겨움의 정체이자 노상강도를 다 읽은 후 느낀 갈증의 정체이리라.

 

 이런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는 드디어 87분서 전작 목록을 권말에 수록하였다. 오래전 절판된 삼중당 문고 정보까지 기록한 꼼꼼함도 돋보이거니와, 이제부터 여기 나열한 하나씩 다 내버리고야 말겠다는 결기도 느껴져 새삼 기대된다. 훗날 책장에 꽂힌 쉰일곱 권의 87분서 시리즈를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의 기대를 되새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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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판 사나이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1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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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첫 출간작 세 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 작가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읽음 직한 책이었는데, 셋 중 분량이 가장 많다 보니 오히려 맨 나중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그러길 정말 잘했다 싶다. 정거장이나 빅 타임이 아니라 이 책부터 읽었더라면 나는 불새에 지금처럼 호의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교열 상태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지경인 까닭이다. 이미 다른 두 권을 읽은 다음 잡은 책이라 불새 특유()의 품질에도 웬만큼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달을 판 사나이의 교열은 앞선 두 작품을 가볍게 뛰어넘어 미친 듯 엉망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읽으면서 수정해야 할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대로 휴대폰에 기록하며 책장을 넘기는데, 도대체 이게 교정지를 보는 건지 독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인라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전개가 아니었더라면 맥이 끊겨 책을 덮어도 진즉 덮고 말았으리라.

 

 게다가 번역도 (역시 다른 두 책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특히 역자가 대화에 임하는 인물 간의 간격을 읽어내고 어투를 결정하는 데에 소홀했거나 아니면 몹시 애를 먹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첫 번째 작품 "빛이여 있으라"는 두 남녀 주인공이 탁구 하듯 말을 주고받으며 애정 표현하는 과정이 SF로서의 아이디어보다도 핵심인 작품인데 번역이 그래 놓으니 작품의 맛이 절반 이상 날아가 버렸고,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더라도 나머지 다섯 작품 역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데도 작품 자체는 재미있다는 거다. 하인라인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자체보다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인데, 그러한 솜씨를 여기 실린 어느 작품에서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다 읽고 보면 별것 아닌 아이디어였다고, 혹은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순진하고 과격하다고 툴툴거릴 수는 있겠다. 하지만 하나의 과학적 아이디어가 일상 공간과 생활 방식을 점유하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고, 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대책을 내놓기 위해 미친 듯 질주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하인라인의 경쾌한 글솜씨에서 오는 기쁨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 고리짝 시절 SF의 지나친 순진무구함이 진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로는 굴러가야만 한다에서 자동 도로의 풍경과, 그 위에 건설된 움직이는 간이 식당과, 파업에 맞서고자(으음, 요즘 읽기에는 좀 그렇군) 자동 도로의 지붕 위를 달려 다니다 다시 지하로 파고드는 기술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노라면 입가에 웃음이 실실 나오는데 어쩌겠는가. 아서 코난 도일이나 쥘 베른 유의 '프로토 SF'와 빅3의 대표작으로 점철된 '황금기(?) 걸작' 사이에서, 더러는 빛나고 더러는 죽어가는 숱한 별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즐기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 혹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으며 다른 작품을 다 빼놓더라도, 중편 달을 판 사나이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아직 인류가 달에 가기 전에 발표된 이 중편에서, 어린 시절부터 달에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던 사업가 디디 해리먼은 봉이 김선달처럼 아직 가지도 않은 달에 대한 권리를 팔아먹어 가며 월행(月行)을 준비한다. 여기서 해리먼이 발휘하는 광기에 가까운 행동력은 하워드 혹스의 정신 나간 스크루볼 코미디특히 연인 프라이데이〉─에 필적하며, '작전'의 꼼꼼하고도 장대한 설계는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떠올리게 한다. 상당 부분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이거나 사회 · 문화적인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하다. 아직 인류가 한 번도 달에 가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사업자가 달에 가려면 무엇을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는가? 이거야말로 그 옛날 은하를 넘어서에서 "아빠, 전 달에 가고 싶어요." "가려무나." "어떻게요?" "글쎄, 그건 네 문제가 아니냐."라는 문답을 내놓은 SF 작가가 들려줄 만한 독창적인 이야기 아닌가. 332쪽짜리 책 중에서 128쪽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 하나만을 추천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꺼이 달을 판 사나이를 사서 주변에 돌리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열과 번역만 좀 더 제대로 됐더라면 말이다. 이 점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내 돈 주고 내 책을 사서 교정을 봐가며 읽는 것까지는 감수한다고 해도(이미 감수했으니까), 100개는 족히 넘는 항목을 담은 정오표를 들이밀며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한 일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누구?) 아는 바이지만,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이 2쇄를 찍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렇다고 하인라인의 작품이 퍼블릭 도메인일 리도 없다. 좀 더 제대로 된, 널리 추천하기 쉬운 한국어판을 다시 만날 날도 요원할 테지. 결국 불새 덕분에 이 멋진 작품을 읽을 수 있었고, 동시에 불새 탓에 이 멋진 작품을 선뜻 권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하겠어! 라는 선량한 패기가 낳은 이 가혹한 원죄.

 

 그러나 후발 독자들이여, 여러분께는 최소한 선발대가 작성한 기나긴 정오표라도 있나니. 시각적 불편함과 거친(말이 안 돼서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말 그대로 '거칠' ) 번역을 감수할 자신이 있는 독자가 있다면 모쪼록 달을 판 사나이만이라도 읽어주기를 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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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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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로서 식견이 일천한 탓인지도 모르겠으나통상 단편 소설을 읽을 때는 '한순간의 빛나는 통찰'을 기대하며 책장을 펴게 된다. '빛나는'이라고 하여 밝고 건전한 감성을 기대한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한 점에 집약되어 섬광처럼 확! 하고 타오르는 그런 하나의 순간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시공과 인물을 두루 거치며 때로는 '중심 줄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재를 하염없이 지분거린 끝에 무어라 요약할 수도 없고 하나의 시선만으로 꿰뚫을 수도 없는 대하를 그려내는 것이 장편 소설의 일이라면, 단편 소설이 하는 일은 가느다란 길 여러 줄기가 우연히 마주치는 하나의 교차로를 딱! 짚어내는 것에 가깝지 않은지. 특히 모파상 같은 작가는 마치 그런 유의 소설을 쓰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내내 온힘을 모으다가 마지막에 독자의 뒤통수를 망치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단편을 쏟아냈거니와, 꼭 그런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단편이란 그 관습과 길이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굵고 짧은 한방'을 고대하도록 하는 데가 있다.

 

 과연 이와 같은 믿음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역자 정연희는 디어 라이프의 권말 해설에서 "영혼을 뒤흔드는 한순간, 당신을 일깨우는 한순간"이라는 제목을 내세우고 있으며, 주인공이나 독자가 삶에 대한 비밀을 깨닫는 "에피파니"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히 의견을 개진하자면, 이 해설에서 중요한 대목은 오히려 같은 문단에서 무심한 듯 덧붙여진, "그 순간이 독자마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아닌가 싶다. 에피파니의 순간이 독자마다 다르리라는 이 발언은 감상 주체로서 독자의 자율성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작품 내에 면밀하게 계산된 '각성'의 순간이 없다는, 혹은 모든 순간이 그러하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것이 먼로의 단편을 읽으며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놀라움이자 기쁨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세계를 빚어내는 창작자로서 단어와 문장, 구조와 흐름에 대한 계산과 안배가 없을 리 없건만, 먼로의 단편을 읽을 때면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든 어디에서 끝나든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도입부나 결말이 별반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먼로의 이야기에 담긴 인물과 세계는 활자화된 영역 너머로까지 계속 뻗어있으며, 독자인 나는 그 세계에 초청받은 외부인으로서 단지 일부만을 목격했을 뿐이라는 강한 확신이 생기는 까닭이다. 혹은 반대로 말하자면 먼로의 "타운"은 어딘가에 이미 실재하며, 먼로는 다만 그 "타운"에 들끓는 삶들을 바라보다가 얼마 만큼의 시공을 떼어와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

 

 그러한 인상은 먼로가 자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단정을 철저하리만치 피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삶의 재료를 끌어모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배치하고 의미를 전달하고자 애쓰기 마련일 터이나, 디어 라이프에서 먼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선택한 소재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은 듯하다. 더구나 디어 라이프에 담긴 이야기가 "타운"이라고 명명되는 북미 특유의 소도시 공동체에서 펼쳐지곤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작가의 수고로움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한 구성원이 이웃 무리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작은 공동체 속의 삶. 그 안에서 먼로는 기꺼이 불륜이나 어린 시절 겪은 가족의 죽음, 파경에 이른 결혼, 마을 사람들이 경원시하던 한 이웃의 초상과 같은 (자극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만한) 소재를 선택한 다음, 이것들에 가해질 수 있는 섣부른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신중히 도려낸다. 이러저러한 외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여차여차 했다는 식의 저항 서사도 아니고, 세상의 눈을 완전히 차단한 채로 오직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픽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다. 시선과 판단은 아마도 그 세계에 여전히 존재할 테지만, 서술자가 섣불리 그러한 준거에 기대어 인물과 사건을 다루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서술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여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든 먼로의 인물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과 선택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하지 않으며, 그 옳고 그름을 판결하지 않고, 결과에 마냥 기뻐하거나 오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끝없이 진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존재의 한순간에 겹쳐 흐르고 있을 수없이 많은 상념의 다발이 가공 없이 요약 불가능한 상태로 육박해 온다.

 

 가령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그레타는 남편 피터의 배웅을 뒤로 한 채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를, 그리고 미래의 불륜 상대가 될지도 모를 남자가 기다리는) 새집으로 향한다. 기차 안에서 그레타는 우연히 만난 청년과 충동적으로 섹스를 한 뒤 객실에 돌아와 딸 케이티가 사라졌음을 깨닫고는 불안에 떨며 기차 안을 돌아다닌다. 먼로는 이 대목을 후회나 죄의식으로 가득 채우기보다는 당장의 두려움, 상상, 그리고 객차의 이름과 같은 사소한 시각적 단서가 남긴 잔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에 할애한다. 물론 거기에는 후회도 있고, 죄의식도 있으나, 먼로는 그러한 감정들이 그 순간 그레타의 의식을 완전히 사로잡는 중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감정을 고찰하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는 대신 남은 기차 여행 동안 그레타가 딸 케이티에게만 신경을 쏟았는데 그레타 평생에 그런 시간은 처음이었노라고 읊조린다.

 

 그리하여 이 단편에서 중심 사건은(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불륜이라는 그레타의 선택과 그로 인한 깨달음이라는 특정한 결과로 독자를 이끌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수많은 선택과 타협이 뒤섞였을 그레타의 생애를 한꺼번에 끌고 와 독자 앞에 쏟아붓는다. 물론 그럼으로써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여 새로운 결심을 굳히도록 할 수도 이다. 하지만 먼로는 단편 소설로서 택함 직한 안전한 결론을 또 한 번 거부한다. 결말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모든 것은 끝까지 열려 있고, 끝은 끝이 아니다. 그레타의 삶은, 그리고 어쩌면 케이티를 비롯한 그녀 주변 사람들의 삶도, 그 안에서 겪은 모든 국면의 의미와 영향력을 무어라 확정 짓지 않은 채 그저 끌어안고 계속해서 다음 상황을 향해 나아간다. 그로 인해 그레타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혹은 독자가 어떤 '주제'를 배울 수 있을지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독자는 다만 먼로의 안내 덕분에 그 삶의 국면에 자리한 수많은 결을 흘끗 보고 그러한 것들이 거기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에 먼로의 소설은 살아있다.

 

 (이와는 반대로 특정한 구도를 덧씌워 '해독'하기가 지나치게 쉬운 탓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한 작품도 있기는 하다. 예컨대 안식처는 가부장적 가정 안에서 시들어 가는 여성 주부가 가슴에 품은 불과 그것이 가부장의 틀에 내는 균열을 다루는 작품이라는 식으로 논하기가 지나치게 쉬운 탓에 먼로의 정수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 않은지? 물론 이것은 작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습적으로 익숙한 상황을 보았을 때 이미 정해진 해석을 가하려 드는 어설픈 식자의 버릇에서 비롯한 감상이기는 할 테지만, 그렇더라도 의미를 규정하지 않은 삶의 질감 자체를 전하던 다른 작품을 떠올려 보면 특히 안식처의 결말은 그 상징적인 힘 때문에 오히려 풍부한 결을 흐리고 마는 데가 있다.)

 

 한두 편의 단편이 아니라 모든 작품에서 시종일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 먼로의 경이로운 점이다. 사실상 먼로는 '단편 소설'이라는 분류를 따로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그저 소설을 썼을 뿐이지 않을까? 소설가 D. H. 로렌스는 "왜 소설이 중요한가"라는 에세이에서 소설이야말로 삶의 특정한 대목이나 특정한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총체적인 면모를 담아내어 그 세계 자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에 중요한 장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때 로렌스는 시종일관 "nove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서구에서는 이것이 장편 소설을 따로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말한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특히 장편 소설을 놓고 한 발언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복합적인 삶을 요약하지 않고 덩어리째로 구현하려면 장편의 분량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제 먼로의 단편을 접하노라니, 비로소 그 말이 장편이나 단편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소설에 관한 말일 수 있음을 알겠다. 먼로는 하나의 사건이나 사상, 국면, 관점, 믿음, 깨달음을 스타카토처럼 내려치고자 단편을 택한 작가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삶 자체를 건져내는 데에 그 정도면 충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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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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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필명을 내세워 쓴 선정소설을 묶은 중단편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그렇다고 작은 아씨들의 열렬한 팬이거나 올컷의 팬이어서, 혹은 19세기 중반의 미국 선정소설이 어떠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지 잘 알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 환호는 어떤 명확한 지식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경험을 통해 형성된 직감과 희망 사항, 그리고 머릿속에 품은 막연한 이미지에서 비롯한 환호였다. 작은 아씨들처럼 밝고 명랑하고 화목하고 우애 깊고 생기 넘치고 화사하며 단정한 숙녀의 모습 뒤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깎아내고 감추고 억누른 막대한 음() 에너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 불완전한 봉합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그 사적이고 내밀한 기운을 탐닉할 수 있으리라는, 불온한 쾌락을 향한 기대.

 

 단순명쾌한 이분법을 함부로 휘두르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을 보았으니 이제는 ''을 만끽할 차례라는 식의 논리는 듣기에는 그럴듯해도 실제 작품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이 완전히 다른 두 면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양극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또한 가리키듯, 가면 뒤의 이야기는 가면의 존재를 상정할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그렇다면 '가면' 또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겉포장이나 허례허식, 위선이나 장애물인 것이 아니라 엄연히 진실과 맞닿아 있는 핵심 구성 요소가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정치적 적절함이나 파격 혹은 전복과 혁명의 이름으로 박살 내야 마땅한 '시대적 한계'라기보다는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된 '조건'으로서의 가면.

 

 『가면 뒤에서의 작가 올컷은 이러한 게임의 규칙을 더없이 잘 알고 있다. 이 책을 두고 당대의 지배 규범을 벗어난 '악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식으로 선전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여기 실린 네 중단편은 가면을 냅다 벗어던진 뒤 규범을 깡그리 무시하고 폭주하며 일탈을 꾀하기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규범을 잘 이해하는 이가 그 규칙을 자신의 것으로 전용하여 관습의 틀을 안에서부터 허물어뜨리기에 즐겁다. 그리고 전자가 후자보다 더 '진보적'이거나 '현대적'인 것도 아니고, 후자가 전자보다 더 '체제 순응적'이거나 '타협적'인 것도 아니다. 모두의 목을 쳐 피바다를 만들고 세상을 갈아엎는 것과 규칙을 비틀어 지배 계층을 휘어잡고 그 체제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다음 막강했던 상대가 떨떠름한 표정을 새 질서를 인정하게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하고 대담한가?

 

 단순히 읽는 즐거움만 따져보더라도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아슬아슬하고 음험한 기쁨을 선사한다. 내파를 향해 뻗어 가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겉으로는 예의 바른 척하기, 속내 떠보기, 지분거리기, 입가로 비꼬기, 훔쳐보기, 위장하기, 엿듣기, 상대의 행위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변수, 계획의 어긋남 따위가 적극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을 위해서는 늘 세심한 구성과 정확한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물의 시점이 지닌 한계를 이용해 정보를 제한하거나 풀어놓는 서술자의 계략이 함께해야 한다. 올컷은 이 방면에서 오늘날의 1급 스릴러 작가가 부럽지 않을 만한 솜씨를 발휘하거니와, 특히 네 작품 중 일종의 스파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수수께끼전체, 그리고 어둠 속의 속삭임중 감금방의 공포를 묘사한 대목이 특히 뛰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설마 이런 감상을 내놓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여기에 첩보 소설이나 공포 소설의 정수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불어 이런 유의 내적 균열을 다루는 작품은 늘 마무리가 문제이기 마련인데, 이 점에서도 가면 뒤에서는 만족스럽다. 흔히 볼 수 있는 성급하고 불완전한 봉합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고, 실제로 일부 그런 대목도 있기는 했으나, 올컷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내적 논리와 긴장을 쉽사리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사상적/정치적인 결단이기 전에 대중 소설 작가로서의 자존심 덕분에 나온 선택이리라 생각한다. 기실 불완전한 봉합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고 하더라도 본편에서 제기한 예리한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면 뒤에서에 실린 한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갑자기 던져진 열쇠는 독자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도록 하기보다는 결말의 불가능성, 그러니까 그런 결말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갈등에 주목하도록 하는 법이므로. 따라서 올컷이 단지 당대 규범에 도전장을 내밀고자 하는 사상가로서 소설을 썼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타협적인 결말을 내놓거나 아예 폭주하는 결말로 나아가더라도 개의치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제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읽는 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내적으로 만족스러운 결말을 요구하기 마련이며, 올컷은 무엇보다도 이 독자의 기대를 헤아리고 충족시키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가 내놓는 결말은 예상을 기분 좋게 충족시켜주는 한편, 그 예상을 슬쩍 벗어나며 던지는 회심의 일격과도 같은 디테일 또한 준비해놓고 있다. 중편 혹은 단편 소설의 결말을 폭로하여 김을 뺄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여기 실린 작품 중 세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실제로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내질렀으며, 특히 그중 둘은 내심 예상하고 있던 보다 안정적인 결말을 슬쩍 거스르는 카운터 펀치를 날려주는 바람에 숭배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음을 고백해 둔다.

 

 끝으로, 19세기 감상주의 소설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라는 역자의 해설도 전공자 특유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씀씀이로 가득하다. 이미 제목과 보도자료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듯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작은 아씨들의 작가가 쓴, 작은 아씨들과는 완전 딴판인 못돼먹은 여인네들 이야기"라는 식으로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러나 가면과 그 속의 진짜 이면이라는 식의 과격한 구분이 도리어 작품 및 작가에 관한 이해를 해칠 것을 염려하는 역자의 말은 홍보 과정의 피치 못할 선정성을 누그러뜨리고 균형을 찾도록 도와준다. 개별 작품에 관한 해설은 다소 과도하다는 생각도 들지만(해석이 과잉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독자의 몫을 남겨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작품의 내용에서 출발하여 가면 뒤에서, 혹은 작은 아씨들을 넘어서서 올컷이라는 작가/인물 자체로까지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혹의 솜씨 또한 근사하다. "1권에 실린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고, 그 김에 작은 아씨들도 새롭게 다시 읽고 2권을 기다리는 독자 분들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본다"는 말을 단순한 바람만으로 끝내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해설이라고나 할까. (펭퀸클래식코리아는 이 책 덕분에 작은 아씨들을 최소한 한 권 더 팔게 생겼으니 감사편지 한 장 띄워보시는 건 어떨지.)

 

 그런즉, 작은 아씨들의 애독자는 물론이고 제인 에어, 워더링 하이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로맨스 벨벳 애무하기, 끌림, 핑거스미스의 팬, 또는 제인 오스틴이나 이디스 워튼의 팬을 비롯하여 엄격한 사회 규범하에서 은밀한 뉘앙스를 통해 벌어지는 애정담과 험담에 황홀해하는 독자,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서 곧잘 나타나는 시선의 게임을 사랑하는 관음꾼, 더불어 1940년대 고전기 할리우드의 발 루튼 제작 공포영화 및 불청객이나 유령과 뮤어 부인,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멜로 드라마, 혹은 지극히 도덕적인 보수성을 내세우면서도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외양을 과시하는 영국 해머 공포 영화의 이율배반적인 쾌락을 흠모하는 영화 애호가 모두(동지들!)에게까지 아낌없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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