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고스트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유독 기억을 파고들어 단단히 자리 잡는 책들이 많은 올해의 독서 생활 중에서도 특히 아껴가며 읽은 책이 있기에 짤막하게나마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껴가며 읽었다는 말은 그냥 수식어는 아니다. 열다섯 편(더하기 한 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거의 2주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던 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힘이 지지부진해서가 아니라, 매 편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마다 차오르는 만족감이 워낙 커서 다음 작품을 향해 책장을 넘기는 대신 잠시 책을 덮어두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한국어판의 표지에는 “제왕 스티븐 킹의 아들 조 힐의 환상 컬렉션! 멈출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악몽의 롤러코스터!”라는 홍보용 문구가 (다행히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게끔) 붙어있고, 실제로 책을 사게 된 것도 어느 정도는 좋은 공포 소설을 읽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지만, 책을 펴고 네 쪽 정도를 읽고 나니 이 작가를 굳이 아버지의 이름 아래에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편 셋을 읽고 난 뒤에는 공포 소설로 한정하여 홍보할 책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세계를 다루는 작가라는 확신이 찾아왔음을 밝혀두련다.

 

 그렇더라도, 일단은 킹의 아들이라는 점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몰아내며 읽은 것은 아니기에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면─ 

 

 훌륭한 소설가들의 재능 중에서도 특히 존경스러운 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거나 대충 접해보았거나 막연히 떠올리고 있던 어떤 체험을 적확한 표현을 통해 끄집어내어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 체험과 직접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전율케 하는 능력이고, 현대 미국 작가들 중에서 그 능력을 가장 자유분방하게 발휘해대는 작가 중 하나가 킹이 아닌가 싶다. 킹의 소설들이 아무리 타블로이드 지 구석에 박스 기사로나 실릴 만한 “말도 안 되는”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것을 (비)웃어넘기는 대신에 손에 땀을 쥐고, 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보면서 읽어치우는 건 그저 환상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독자의 욕구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그의 소설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인물들이 체험하는 공감각적 감각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받아들이고 분석하는 데에 기반이 되어주는 그들의 일상사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집 소녀가 염력을 발휘해 졸업 파티를 피바다로 만들든 과거로부터 찾아온 정체불명의 어릿광대가 살육을 저지르든 독자는 “아 뭐 시간 날 때 읽는 심심풀이 땅콩이지”라고 얼버무리는 대신에 그걸 쉬이 눈을 돌려버릴 수 없는 자신의 체험으로 공유하고 그 속에 표현된 감정들을 얼마간 공유하게 된다. 킹은 그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탠드』(Stand)에서 슈퍼 독감 때문에 미국이 결딴나는 꼴을 시공간을 오가면서 한 챕터 만에 서술한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주먹이 꼭 쥐어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하고 그 와중에 어떻게든 진실을 규명하고 타인을 살려보려고 하는 이들의 절망감에 눈물도 흘리고 한다.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은 아니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은 재능을 힐도 갖추고 있다. 책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 「신간 공포 걸작선」의 도입부 몇 장만을 읽어도 이 점을 확언할 수 있다. 인생의 3분의 1을 좋은 공포 문학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에 바쳐왔지만 스스로가 점점 지쳐가고 있고 좋은 작품들은 점점 줄어가고 있으며 그러나 할 줄 아는 짓이 그것뿐이라 쉬이 발을 빼지는 못한 채 관성에 일상을 맡기고 있는 한 공포 문학 전문 잡지의 편집자가 느끼는 피로감과,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기가 막힌 소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절절히 담겨 있는 이 대목은 비단 공포 문학 팬들 뿐만 아니라 나름 “성장기”를 거쳤다 자부하는 온갖 분야 팬들의 가슴을 순간 먹먹하게 할 만하다.  

 

 캐롤이 오리건 극장에서 〈더 헌팅(The Haunting)〉을 처음 본 게 열한 살 때였다. 사촌들과 함께 갔지만 불이 꺼지자 같이 간 동행들은 어둠 속에 삼켜져버렸고 캐롤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되어 숨 막히는 벽장 같은 그림자 속에 꼭 갇혀 있게 되었다. 가끔씩 눈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몸 안의 의지력을 다 끌어내야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초조한 아픔과 뒤섞인 기쁨의 전율이 천천히 일었다. 마침내 불이 켜지자 신경 말단에 한순간 구리 전선을 꽂고 전류를 통하게 한 듯 짜릿짜릿했다. 그는 바로 이 감각에 강박적 욕망을 점차 키워 나가게 되었다. 

 나중에 전문가가 되고 이런 공포소설을 읽는 게 직업이 되자 이런 느낌은 조금 덤덤해지기는 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아스라이 겪은 듯한 기분만 남아 감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감정의 추억에 더 가까워졌다. 좀 더 최근엔 그 추억조차 도망가버렸고 맥 빠진 건망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커피 탁자 위에 쌓인 잡지들을 볼 때 찾아오는 얼얼한 무관심. 아니, 가끔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지만 다른 류의 두려움이었다. (20)

 

 그런데 그처럼 비등한 재능을 발휘하면서도 힐의 소설을 아버지의 것과 비교하는 대신 다른 영역에 놓여있다고 여기게끔 하는 특징이 있으니, 바로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뭐랄까, 거친 표현이지만, 품위가 있다는 점이다. 똑같이 실감나는 인물과 사건을 보여주더라도 킹의 이야기가 “아 씨바 나도 그거 알지!”하고 어깨 툭툭 쳐가면서 읽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면 힐의 이야기는 침침한 골방에서 홀로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넘겨가면서 ‘아, 나 말고 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하며 은밀한 유대감을 맛보게 하는 느낌에 가깝다. 그 차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극명하게 느껴져, 어떤 면에서는 (책 전체에 가득 깔린 미국 문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마치 생판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글 같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런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하는 지를 잘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번역문을 통해서도─어쩌면 번역문 때문에?─확연히 드러나는 문체의 차이와 더불어) 힐이 그리는 주인공들과 사건들이 킹의 경우보다 좀 더 조용히 내면을 향해 가라앉기 때문이지 싶다. 공포 문학이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주변부에 위치한 주인공 운운하는 것은 이제는 창작을 넘어서 비평이나 감상의 클리셰로까지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힐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들은 특히나 그런 인상이 강하다. 사회적 환경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들 각자는 저마다 남에게는 쉬이 드러낼 수 없는 비밀스러운 특성이나 집착의 대상을 지니고 있고, 이야기는 그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어떤 극적인 갈등이나 변화를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대신 그냥 그런 특성들이 빚어낼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인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머무른다. 

 

 이 “머무른다”는 점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납치 감금당한 소년이나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곤충이 되어 있더라는 식의 대단히 “선정적인” 소재를 다룰 때에도 작가는 호들갑을 떨거나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극적 상황을 빠르게 연결해 가면서 감정이 물밀듯이 몰아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 나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며 그런 상황 자체가 가져다주는 감정에 대해 스스로 고민한다. (노파심에서 덧붙임: 이 문장을 결코 “지루하다”의 다른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님을 예비 독자들 앞에 맹세하는 바이다) 주인공들도 덩달아 자신의 지각과 체험을 타인과 공유하기보다는 속내에 담아두고 견디는 편에 가깝다. 마치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이해하기 힘든 잘못을 잊으려고 애쓰면서도 자꾸 그 편린을 돌아보고, 또 그러면서 계속 살아가길 희망하는 「자발적 감금」의 주인공 놀란처럼.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와 같이 아드레날린이 치솟음직한 대파국을 향해 이야기가 전개될 때조차도 등장인물이 하는 행동 자체보다도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 되짚어보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여기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이런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이러쿵저러쿵 해서 결국 이리저리 가서 이런 결말을 맞았단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이런 사람이 있었어. 이런 사람이라는 게 어떤 사람이냐면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끝내주는 롤러코스터를 타러 온 독자들이라면 그런 태도 앞에 실망하면서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냐고 반문하거나 결말이 약하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나는 힐이 액션의 속도를 늦추는 대신 타인에 대한 이해의 속도를 배가함으로써 독자를 또 다른 롤러코스터에 태워줬다고 생각한다. 클라이브 바커가 닐 게이먼의 그래픽 노블 『샌드맨』 2권 서문에서 두 가지 종류의 환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떤 환상 이야기는 우리 내면의 불안이나 불가지한 어떤 것들을 끄집어내어 형체를 부여한 뒤 그것을 다시 제거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함으로써 완성되는 일종의 엑소시즘인 반면 다른 환상들은 그렇게 쉬이 없어지지 않으며 저기서 우리와 함께 계속하여 그 형상을 바꿔가며 공존하는 실재로 남는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옆에 책이 없어 정확한 인용을 할 수 없다. 설령 내가 좀 윤색한 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이러한 논의는 바커만의 것이 아니고 공포 영화를 평할 때에도 곧잘 나오는 이론이기 때문에 큰 줄기는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말하자면 힐은 후자의 환상에 천착하는 작가이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지 책장을 넘길 때만 독자를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머무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른 존재들의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그렇게 볼 때 “20th Century Ghosts”라는 제목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 독자의 주변을 계속 맴도는 열다섯 (혹은 열여섯) 명의 유령들. 

 

 한편, 작가는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을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문화적 토양, 많은 팬들이 즐기면서 더불어 만들어 온 공포의 영토를 향한 점잖은 인사도 잊지 않는다. 이미 대강의 줄거리를 밝힌 「신간 공포 걸작선」부터가 대놓고 공포 문학을 가까이 하는 작가와 독자들에 대한 자의식적인 우화이며, 이후에도 이 어두컴컴한 세계에 진즉부터 눈길을 보내왔던 이들이라면 반길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만남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세한 내용을 밝히진 않겠지만 「20세기 고스트」와 「바비 콘로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돌아오다」는 영화팬이라면 눈물을 글썽이며 맞이할 만하고,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나 「아브라함의 아들들」처럼 대놓고 고전 다시 쓰기를 즐기는 작품들도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간에 단순한 반복에서 머무르는 대신 작가 고유의 세계를 확립하여 독창적인 즐거움도 안겨주고 있으니 갖가지 실망스러운 “포스트모더니즘” 장르 문학에 좌절한 경험이 있는 “선수”들께서도 염려 놓으시길. 

 

 

 

 덧. 번역서의 제목이 『20세기 고스트』이며 수록된 작품들 중 두 번째 작품의 제목도 「20세기 고스트」이며, 유감스럽게도 책의 어디에도 각 단편의 원제를 밝혀두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어판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인데, 실제로 이 단행본의 제목과 두 번째 단편의 제목은 다르다. 단행본은 20th Century Ghosts이며 두 번째 단편은 “20th Century Ghos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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