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앞서, 예비 독자들께 드리는 당부 말씀. 부디 출판사의 책 소개글이나 책 뒤표지에 실린 간략한 홍보글들을 읽지 마시길. 한 번 읽고 플롯을 파악한다고 해서 금세 스러질 정도로 허약한 감흥을 제공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서 과정에서 의외의 기쁨을 제공해 줄 여러 가지 디테일들을 미리 알아버리는 건 김빠지는 일일 테니. “공룡이 나오는 과학소설” 정도만 알아둔 채로 곧장 읽는 편이 이 작품의 막장성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자세라고 하겠다. (이런 표현 자체가 이미 그저 “공룡이 나오는 과학소설”은 아니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하겠지만, 그런 정도의 막연한 예상을 가볍게 작살낼 정도의 힘은 지닌 작품이니 염려 놓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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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뜻 보면 [멸종]은 가진 패를 모두 펼쳐놓고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표지의 공룡 그림은 차치하더라도,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서 “나는 고생물학자다. 공룡 연구가다.”라는 문장이 나오고, 바로 다음 문단에는 “시간 여행.”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세 문장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공룡이 나온다. 이때 작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 번도 같은 시간대에 존재해 본 적이 없는 두 존재를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이냐, 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서 코난 도일은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에서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섬을 만들었고, 마이클 크라이튼은 [쥬라기 공원(Jurassic World)]에서 유전공학을 끌어들여 공룡을 부활시켰다. 그런 다음 두 작품 모두 그런 상황에서 가능한 모험담을 제공하는 데에 주력했다. [멸종]은 같은 문제 앞에서 시간 여행을 끌어들인다. 혹시 이것이 공룡 액션 소설이 아니라 시간 여행의 메커니즘을 진지하게 다루는 과학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볼 수도 있겠지만, 두어 문단을 더 읽다 보면 그마저도 헛된 기대로 만드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녀는 2005년에 시간 여행의 기본 원리를 발견했고, 그로부터 불과 8년 뒤인 2013년에 실제로 작동하는 타임머신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는 믿기 힘든, 정말로 믿기 힘든 위업을 이룩했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그럴 수 있었느냐고 내게 묻지는 말아 달라. 전혀 모르니까. 사실 칭-메이 자신도 이 현상에 관해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원리는 신경 끄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달라는 주문이렷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백악기 말, 공룡 멸종 전의 시대에 도착한 주인공은 주변 환경 및 생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해 나간다. 책의 제목을 되새기면서, 결론을 내렸다 : [멸종]은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가 체험해보지 못한 고시대로 간 과학자가 가설로만 알려진 사실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고리타분한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그걸 상당히 엄정한 과학적 시각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중단편 과학소설 선집 [하드 SF 르네상스 1]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작품들─핵심 모티프는 고리짝 때 것인데 그걸 촘촘한 과학적 디테일로 둘러싸 감동을 주는─을 본 적이 있기에 ‘이것도 하나의 조류인가 보다’ 싶었다.
 

 이러한 예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깨지는가에 관해서 세세하고 늘어놓고 싶지는 않으나, 실로 몰염치한 수법을 사용한다는 정도는 밝혀둬야겠다. (어쨌든 이 글은 독서 감상문이자 RE-view이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초반부에 제시된 몇 가지 소소한 디테일들, 이를테면 백악기 말 지구의 환경과 주인공 브랜든이 살던 21세기 지구의 환경 사이의 차이 같은 것이 브랜든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하면서 대담한, 미처 예기치 못한 가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실현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식으로 과학소설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리라 믿었기에, [멸종]이 내놓은 카드는 그냥 충격적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비윤리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자, 말을 너무 돌리지 않겠다. [멸종]은, 자기가 몇 십 페이지 동안 하던 이야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모티프를 갑자기 꺼내어 독자를 후려친다. 무엇보다도 그 새로 끌어들인 모티프란 것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시간 여행을 이용한 공룡 탐사” 만큼이나 곰팡내 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읽는 이를 망연자실케 한다. [반지의 제왕]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프로도를 따라 요정들의 도시 리벤델까지 와서 유일반지를 처리할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달프가 일어나서 “반지를 파괴하려면 모르도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의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구양진경』과 『구음진경』을 통해 구양신공과 구음신공을 익힌 다음 두 내공의 힘을 한데 모아 항룡십팔장으로 쳐야한다네.”이라고 말한다면 대체 기분이 어떻겠는가? 잡다한 클리셰를 섞는다는 점에서 F. 폴 윌슨의 [다이디타운(Dydeetown World)]이나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Old Man's War)] 같은 작품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이 두 작품이 비교적 유사한 카테고리 안에 있는 소재들을 취사선택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매끄럽게 질주하는 반면 [멸종]은 생판 남남일 것만 같은 소재들을 충돌시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그 순간 발생하는 흡인력이란 어떤 면에서는 막장 드라마의 흡인력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작가는 제정신인가’와 ‘대체 앞으로 어쩔 셈인가’가 끄는 쌍두마차 달리는 소리)
 

 그런데 바로 그 충돌을 가능케 하는 클리셰들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멸종]을 과학을 양념 삼아 곁들인 모험 소설이 아니라 진짜배기 과학소설로 만들어주는 원천이다. 과학소설 본연의 힘이 바로 독자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의 터전과 “허무맹랑한 공상” 사이를 논리의 확장을 통해 말이 되게 이어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도약,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관의 지각 변동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상이한 “허무맹랑한 공상”을 여러 개 펼쳐 놓은 다음 그것을 한데 그러모아서 공룡 멸종이라는 엄연한 사실에까지 연결해 내는 로버트 J. 소여의 작업에서도 같은 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모티프들은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이미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여러 차례 보아온 진부한 아이디어들에 의존하고 있고, 때로는 그나마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어물쩍 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이미 한 번 언급했으니 다시 말하자면, 특히 시간여행 쪽이 좀 그렇다) 그러나 100% 순종 남남처럼 보이는 각각의 요소들이 사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마침내는 모두가 얽히고설켜 하나의 참신하고 박력 넘치는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감동은 과학소설 특유의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는 표현으로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분명 뭐 이렇게 “공상과학”스러운 전개가 다 있냐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지금껏 무심히 읽어오며 쌓아두었던 여러 가지 관념, 가설들이 단숨에 작살나면서 그 자리를 완전히 새로운 논의가 대체해 버리니 부지불식간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 한판 뒤집기를 위해 작품 전체의 구조가 발휘하는 집중력은 실로 강력한데, 심지어 프롤로그에서 등장인물의 감성을 드러내고 자극하기 위해 쓰인 것만 같았던 브랜든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 장면조차도 사실은 작품의 중추에 위치한 과학적 사변과 직결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는 작가가 골수 과학소설 독자들에게 보내는 윙크 같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과학소설 팬들은 눈을 반짝이며 독서를 고대할 수 있겠지만 과학소설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이 작품은 무슨 최신 물리학 이론 같은 것을 가져다가 “전문적”인 가설을 전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흔히들 “애들이나 읽을” 이야기로 치부함직한 수준의 소재를 끌어올려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과학적 사변을 이루어 내고 있는지라 진입장벽도 높지 않다. 더군다나 다른 희소식도 있다. [멸종]은 그렇게 담대한 상상을 짜면서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자세 또한 잃지 않는다. 코믹할 수도, 애틋할 수도 있는 삼각관계 로맨스가 주인공 브랜든과 동료 클릭스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세계]나 [쥬라기 공원] 부럽지 않은 모험 액션 또한 빗발치듯 쏟아진다. 공룡끼리 싸우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인간끼리 싸우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공룡이랑 인간이랑 싸우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공룡이랑… 아, 이거는 스포일러니까 생략. 아무튼 읽으시라.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꺼질 듯한 장려한 스펙터클 액션 보고 싶은 사람? 읽으시라. 어디 그뿐인가, 과학소설에는 딱히 관심 없으나 공룡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기꺼이 추천할 수 있다. 작가의 과학소설가적 역량은 클리셰들을 엮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 담긴 공룡에 대한 묘사나 공룡 멸종설에 관한 논의는 ‘그런 게 있다더라. 근데 이야기의 중심 줄기랑 큰 관련은 없으니까 대충 알아두고 넘어갑시다’ 수준은 가볍게 넘어선다. 이 모든 일을 불과 36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 안에서 해내니 감탄할 밖에. 곰곰이 돌이켜 보면 이만큼 다재다능하다는 느낌을 주는 과학소설을 만난 적은 없는 듯하다. 참으로 간만에 만난 대박이다. 

  

 덧. 알라딘에서 썸네일 이미지로 활용하고 있는 표지 이미지는 색감이 실물과 많이 다르다. 미리보기를 통해 실제 색감을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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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0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09-05-0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제정신인가’와 ‘대체 앞으로 어쩔 셈인가’가 끄는 쌍두마차 달리는 소리) 전 이부분에서 빵 터졌습니다...이런 생각이 독자한테 들게끔 한다는건 그 작가 나름의 능력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