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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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로서 식견이 일천한 탓인지도 모르겠으나통상 단편 소설을 읽을 때는 '한순간의 빛나는 통찰'을 기대하며 책장을 펴게 된다. '빛나는'이라고 하여 밝고 건전한 감성을 기대한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한 점에 집약되어 섬광처럼 확! 하고 타오르는 그런 하나의 순간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시공과 인물을 두루 거치며 때로는 '중심 줄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재를 하염없이 지분거린 끝에 무어라 요약할 수도 없고 하나의 시선만으로 꿰뚫을 수도 없는 대하를 그려내는 것이 장편 소설의 일이라면, 단편 소설이 하는 일은 가느다란 길 여러 줄기가 우연히 마주치는 하나의 교차로를 딱! 짚어내는 것에 가깝지 않은지. 특히 모파상 같은 작가는 마치 그런 유의 소설을 쓰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내내 온힘을 모으다가 마지막에 독자의 뒤통수를 망치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단편을 쏟아냈거니와, 꼭 그런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단편이란 그 관습과 길이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굵고 짧은 한방'을 고대하도록 하는 데가 있다.

 

 과연 이와 같은 믿음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역자 정연희는 디어 라이프의 권말 해설에서 "영혼을 뒤흔드는 한순간, 당신을 일깨우는 한순간"이라는 제목을 내세우고 있으며, 주인공이나 독자가 삶에 대한 비밀을 깨닫는 "에피파니"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히 의견을 개진하자면, 이 해설에서 중요한 대목은 오히려 같은 문단에서 무심한 듯 덧붙여진, "그 순간이 독자마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아닌가 싶다. 에피파니의 순간이 독자마다 다르리라는 이 발언은 감상 주체로서 독자의 자율성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작품 내에 면밀하게 계산된 '각성'의 순간이 없다는, 혹은 모든 순간이 그러하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것이 먼로의 단편을 읽으며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놀라움이자 기쁨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세계를 빚어내는 창작자로서 단어와 문장, 구조와 흐름에 대한 계산과 안배가 없을 리 없건만, 먼로의 단편을 읽을 때면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든 어디에서 끝나든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도입부나 결말이 별반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먼로의 이야기에 담긴 인물과 세계는 활자화된 영역 너머로까지 계속 뻗어있으며, 독자인 나는 그 세계에 초청받은 외부인으로서 단지 일부만을 목격했을 뿐이라는 강한 확신이 생기는 까닭이다. 혹은 반대로 말하자면 먼로의 "타운"은 어딘가에 이미 실재하며, 먼로는 다만 그 "타운"에 들끓는 삶들을 바라보다가 얼마 만큼의 시공을 떼어와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

 

 그러한 인상은 먼로가 자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단정을 철저하리만치 피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삶의 재료를 끌어모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배치하고 의미를 전달하고자 애쓰기 마련일 터이나, 디어 라이프에서 먼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선택한 소재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은 듯하다. 더구나 디어 라이프에 담긴 이야기가 "타운"이라고 명명되는 북미 특유의 소도시 공동체에서 펼쳐지곤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작가의 수고로움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한 구성원이 이웃 무리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작은 공동체 속의 삶. 그 안에서 먼로는 기꺼이 불륜이나 어린 시절 겪은 가족의 죽음, 파경에 이른 결혼, 마을 사람들이 경원시하던 한 이웃의 초상과 같은 (자극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만한) 소재를 선택한 다음, 이것들에 가해질 수 있는 섣부른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신중히 도려낸다. 이러저러한 외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여차여차 했다는 식의 저항 서사도 아니고, 세상의 눈을 완전히 차단한 채로 오직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픽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다. 시선과 판단은 아마도 그 세계에 여전히 존재할 테지만, 서술자가 섣불리 그러한 준거에 기대어 인물과 사건을 다루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서술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여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든 먼로의 인물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과 선택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하지 않으며, 그 옳고 그름을 판결하지 않고, 결과에 마냥 기뻐하거나 오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끝없이 진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존재의 한순간에 겹쳐 흐르고 있을 수없이 많은 상념의 다발이 가공 없이 요약 불가능한 상태로 육박해 온다.

 

 가령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그레타는 남편 피터의 배웅을 뒤로 한 채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를, 그리고 미래의 불륜 상대가 될지도 모를 남자가 기다리는) 새집으로 향한다. 기차 안에서 그레타는 우연히 만난 청년과 충동적으로 섹스를 한 뒤 객실에 돌아와 딸 케이티가 사라졌음을 깨닫고는 불안에 떨며 기차 안을 돌아다닌다. 먼로는 이 대목을 후회나 죄의식으로 가득 채우기보다는 당장의 두려움, 상상, 그리고 객차의 이름과 같은 사소한 시각적 단서가 남긴 잔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에 할애한다. 물론 거기에는 후회도 있고, 죄의식도 있으나, 먼로는 그러한 감정들이 그 순간 그레타의 의식을 완전히 사로잡는 중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감정을 고찰하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는 대신 남은 기차 여행 동안 그레타가 딸 케이티에게만 신경을 쏟았는데 그레타 평생에 그런 시간은 처음이었노라고 읊조린다.

 

 그리하여 이 단편에서 중심 사건은(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불륜이라는 그레타의 선택과 그로 인한 깨달음이라는 특정한 결과로 독자를 이끌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수많은 선택과 타협이 뒤섞였을 그레타의 생애를 한꺼번에 끌고 와 독자 앞에 쏟아붓는다. 물론 그럼으로써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여 새로운 결심을 굳히도록 할 수도 이다. 하지만 먼로는 단편 소설로서 택함 직한 안전한 결론을 또 한 번 거부한다. 결말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모든 것은 끝까지 열려 있고, 끝은 끝이 아니다. 그레타의 삶은, 그리고 어쩌면 케이티를 비롯한 그녀 주변 사람들의 삶도, 그 안에서 겪은 모든 국면의 의미와 영향력을 무어라 확정 짓지 않은 채 그저 끌어안고 계속해서 다음 상황을 향해 나아간다. 그로 인해 그레타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혹은 독자가 어떤 '주제'를 배울 수 있을지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독자는 다만 먼로의 안내 덕분에 그 삶의 국면에 자리한 수많은 결을 흘끗 보고 그러한 것들이 거기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에 먼로의 소설은 살아있다.

 

 (이와는 반대로 특정한 구도를 덧씌워 '해독'하기가 지나치게 쉬운 탓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한 작품도 있기는 하다. 예컨대 안식처는 가부장적 가정 안에서 시들어 가는 여성 주부가 가슴에 품은 불과 그것이 가부장의 틀에 내는 균열을 다루는 작품이라는 식으로 논하기가 지나치게 쉬운 탓에 먼로의 정수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 않은지? 물론 이것은 작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습적으로 익숙한 상황을 보았을 때 이미 정해진 해석을 가하려 드는 어설픈 식자의 버릇에서 비롯한 감상이기는 할 테지만, 그렇더라도 의미를 규정하지 않은 삶의 질감 자체를 전하던 다른 작품을 떠올려 보면 특히 안식처의 결말은 그 상징적인 힘 때문에 오히려 풍부한 결을 흐리고 마는 데가 있다.)

 

 한두 편의 단편이 아니라 모든 작품에서 시종일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 먼로의 경이로운 점이다. 사실상 먼로는 '단편 소설'이라는 분류를 따로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그저 소설을 썼을 뿐이지 않을까? 소설가 D. H. 로렌스는 "왜 소설이 중요한가"라는 에세이에서 소설이야말로 삶의 특정한 대목이나 특정한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총체적인 면모를 담아내어 그 세계 자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에 중요한 장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때 로렌스는 시종일관 "nove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서구에서는 이것이 장편 소설을 따로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말한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특히 장편 소설을 놓고 한 발언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복합적인 삶을 요약하지 않고 덩어리째로 구현하려면 장편의 분량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제 먼로의 단편을 접하노라니, 비로소 그 말이 장편이나 단편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소설에 관한 말일 수 있음을 알겠다. 먼로는 하나의 사건이나 사상, 국면, 관점, 믿음, 깨달음을 스타카토처럼 내려치고자 단편을 택한 작가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삶 자체를 건져내는 데에 그 정도면 충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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