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판 사나이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1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첫 출간작 세 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 작가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읽음 직한 책이었는데, 셋 중 분량이 가장 많다 보니 오히려 맨 나중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그러길 정말 잘했다 싶다. 정거장이나 빅 타임이 아니라 이 책부터 읽었더라면 나는 불새에 지금처럼 호의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교열 상태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지경인 까닭이다. 이미 다른 두 권을 읽은 다음 잡은 책이라 불새 특유()의 품질에도 웬만큼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달을 판 사나이의 교열은 앞선 두 작품을 가볍게 뛰어넘어 미친 듯 엉망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읽으면서 수정해야 할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대로 휴대폰에 기록하며 책장을 넘기는데, 도대체 이게 교정지를 보는 건지 독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인라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전개가 아니었더라면 맥이 끊겨 책을 덮어도 진즉 덮고 말았으리라.

 

 게다가 번역도 (역시 다른 두 책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특히 역자가 대화에 임하는 인물 간의 간격을 읽어내고 어투를 결정하는 데에 소홀했거나 아니면 몹시 애를 먹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첫 번째 작품 "빛이여 있으라"는 두 남녀 주인공이 탁구 하듯 말을 주고받으며 애정 표현하는 과정이 SF로서의 아이디어보다도 핵심인 작품인데 번역이 그래 놓으니 작품의 맛이 절반 이상 날아가 버렸고,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더라도 나머지 다섯 작품 역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데도 작품 자체는 재미있다는 거다. 하인라인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자체보다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인데, 그러한 솜씨를 여기 실린 어느 작품에서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다 읽고 보면 별것 아닌 아이디어였다고, 혹은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순진하고 과격하다고 툴툴거릴 수는 있겠다. 하지만 하나의 과학적 아이디어가 일상 공간과 생활 방식을 점유하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고, 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대책을 내놓기 위해 미친 듯 질주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하인라인의 경쾌한 글솜씨에서 오는 기쁨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 고리짝 시절 SF의 지나친 순진무구함이 진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로는 굴러가야만 한다에서 자동 도로의 풍경과, 그 위에 건설된 움직이는 간이 식당과, 파업에 맞서고자(으음, 요즘 읽기에는 좀 그렇군) 자동 도로의 지붕 위를 달려 다니다 다시 지하로 파고드는 기술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노라면 입가에 웃음이 실실 나오는데 어쩌겠는가. 아서 코난 도일이나 쥘 베른 유의 '프로토 SF'와 빅3의 대표작으로 점철된 '황금기(?) 걸작' 사이에서, 더러는 빛나고 더러는 죽어가는 숱한 별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즐기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 혹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으며 다른 작품을 다 빼놓더라도, 중편 달을 판 사나이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아직 인류가 달에 가기 전에 발표된 이 중편에서, 어린 시절부터 달에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던 사업가 디디 해리먼은 봉이 김선달처럼 아직 가지도 않은 달에 대한 권리를 팔아먹어 가며 월행(月行)을 준비한다. 여기서 해리먼이 발휘하는 광기에 가까운 행동력은 하워드 혹스의 정신 나간 스크루볼 코미디특히 연인 프라이데이〉─에 필적하며, '작전'의 꼼꼼하고도 장대한 설계는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떠올리게 한다. 상당 부분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이거나 사회 · 문화적인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하다. 아직 인류가 한 번도 달에 가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사업자가 달에 가려면 무엇을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는가? 이거야말로 그 옛날 은하를 넘어서에서 "아빠, 전 달에 가고 싶어요." "가려무나." "어떻게요?" "글쎄, 그건 네 문제가 아니냐."라는 문답을 내놓은 SF 작가가 들려줄 만한 독창적인 이야기 아닌가. 332쪽짜리 책 중에서 128쪽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 하나만을 추천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꺼이 달을 판 사나이를 사서 주변에 돌리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열과 번역만 좀 더 제대로 됐더라면 말이다. 이 점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내 돈 주고 내 책을 사서 교정을 봐가며 읽는 것까지는 감수한다고 해도(이미 감수했으니까), 100개는 족히 넘는 항목을 담은 정오표를 들이밀며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한 일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누구?) 아는 바이지만,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이 2쇄를 찍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렇다고 하인라인의 작품이 퍼블릭 도메인일 리도 없다. 좀 더 제대로 된, 널리 추천하기 쉬운 한국어판을 다시 만날 날도 요원할 테지. 결국 불새 덕분에 이 멋진 작품을 읽을 수 있었고, 동시에 불새 탓에 이 멋진 작품을 선뜻 권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하겠어! 라는 선량한 패기가 낳은 이 가혹한 원죄.

 

 그러나 후발 독자들이여, 여러분께는 최소한 선발대가 작성한 기나긴 정오표라도 있나니. 시각적 불편함과 거친(말이 안 돼서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말 그대로 '거칠' ) 번역을 감수할 자신이 있는 독자가 있다면 모쪼록 달을 판 사나이만이라도 읽어주기를 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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