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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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필명을 내세워 쓴 선정소설을 묶은 중단편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그렇다고 작은 아씨들의 열렬한 팬이거나 올컷의 팬이어서, 혹은 19세기 중반의 미국 선정소설이 어떠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지 잘 알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 환호는 어떤 명확한 지식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경험을 통해 형성된 직감과 희망 사항, 그리고 머릿속에 품은 막연한 이미지에서 비롯한 환호였다. 작은 아씨들처럼 밝고 명랑하고 화목하고 우애 깊고 생기 넘치고 화사하며 단정한 숙녀의 모습 뒤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깎아내고 감추고 억누른 막대한 음() 에너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 불완전한 봉합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그 사적이고 내밀한 기운을 탐닉할 수 있으리라는, 불온한 쾌락을 향한 기대.

 

 단순명쾌한 이분법을 함부로 휘두르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을 보았으니 이제는 ''을 만끽할 차례라는 식의 논리는 듣기에는 그럴듯해도 실제 작품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이 완전히 다른 두 면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양극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또한 가리키듯, 가면 뒤의 이야기는 가면의 존재를 상정할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그렇다면 '가면' 또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겉포장이나 허례허식, 위선이나 장애물인 것이 아니라 엄연히 진실과 맞닿아 있는 핵심 구성 요소가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정치적 적절함이나 파격 혹은 전복과 혁명의 이름으로 박살 내야 마땅한 '시대적 한계'라기보다는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된 '조건'으로서의 가면.

 

 『가면 뒤에서의 작가 올컷은 이러한 게임의 규칙을 더없이 잘 알고 있다. 이 책을 두고 당대의 지배 규범을 벗어난 '악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식으로 선전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여기 실린 네 중단편은 가면을 냅다 벗어던진 뒤 규범을 깡그리 무시하고 폭주하며 일탈을 꾀하기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규범을 잘 이해하는 이가 그 규칙을 자신의 것으로 전용하여 관습의 틀을 안에서부터 허물어뜨리기에 즐겁다. 그리고 전자가 후자보다 더 '진보적'이거나 '현대적'인 것도 아니고, 후자가 전자보다 더 '체제 순응적'이거나 '타협적'인 것도 아니다. 모두의 목을 쳐 피바다를 만들고 세상을 갈아엎는 것과 규칙을 비틀어 지배 계층을 휘어잡고 그 체제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다음 막강했던 상대가 떨떠름한 표정을 새 질서를 인정하게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하고 대담한가?

 

 단순히 읽는 즐거움만 따져보더라도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아슬아슬하고 음험한 기쁨을 선사한다. 내파를 향해 뻗어 가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겉으로는 예의 바른 척하기, 속내 떠보기, 지분거리기, 입가로 비꼬기, 훔쳐보기, 위장하기, 엿듣기, 상대의 행위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변수, 계획의 어긋남 따위가 적극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을 위해서는 늘 세심한 구성과 정확한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물의 시점이 지닌 한계를 이용해 정보를 제한하거나 풀어놓는 서술자의 계략이 함께해야 한다. 올컷은 이 방면에서 오늘날의 1급 스릴러 작가가 부럽지 않을 만한 솜씨를 발휘하거니와, 특히 네 작품 중 일종의 스파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수수께끼전체, 그리고 어둠 속의 속삭임중 감금방의 공포를 묘사한 대목이 특히 뛰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설마 이런 감상을 내놓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여기에 첩보 소설이나 공포 소설의 정수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불어 이런 유의 내적 균열을 다루는 작품은 늘 마무리가 문제이기 마련인데, 이 점에서도 가면 뒤에서는 만족스럽다. 흔히 볼 수 있는 성급하고 불완전한 봉합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고, 실제로 일부 그런 대목도 있기는 했으나, 올컷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내적 논리와 긴장을 쉽사리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사상적/정치적인 결단이기 전에 대중 소설 작가로서의 자존심 덕분에 나온 선택이리라 생각한다. 기실 불완전한 봉합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고 하더라도 본편에서 제기한 예리한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면 뒤에서에 실린 한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갑자기 던져진 열쇠는 독자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도록 하기보다는 결말의 불가능성, 그러니까 그런 결말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갈등에 주목하도록 하는 법이므로. 따라서 올컷이 단지 당대 규범에 도전장을 내밀고자 하는 사상가로서 소설을 썼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타협적인 결말을 내놓거나 아예 폭주하는 결말로 나아가더라도 개의치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제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읽는 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내적으로 만족스러운 결말을 요구하기 마련이며, 올컷은 무엇보다도 이 독자의 기대를 헤아리고 충족시키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가 내놓는 결말은 예상을 기분 좋게 충족시켜주는 한편, 그 예상을 슬쩍 벗어나며 던지는 회심의 일격과도 같은 디테일 또한 준비해놓고 있다. 중편 혹은 단편 소설의 결말을 폭로하여 김을 뺄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여기 실린 작품 중 세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실제로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내질렀으며, 특히 그중 둘은 내심 예상하고 있던 보다 안정적인 결말을 슬쩍 거스르는 카운터 펀치를 날려주는 바람에 숭배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음을 고백해 둔다.

 

 끝으로, 19세기 감상주의 소설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라는 역자의 해설도 전공자 특유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씀씀이로 가득하다. 이미 제목과 보도자료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듯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작은 아씨들의 작가가 쓴, 작은 아씨들과는 완전 딴판인 못돼먹은 여인네들 이야기"라는 식으로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러나 가면과 그 속의 진짜 이면이라는 식의 과격한 구분이 도리어 작품 및 작가에 관한 이해를 해칠 것을 염려하는 역자의 말은 홍보 과정의 피치 못할 선정성을 누그러뜨리고 균형을 찾도록 도와준다. 개별 작품에 관한 해설은 다소 과도하다는 생각도 들지만(해석이 과잉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독자의 몫을 남겨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작품의 내용에서 출발하여 가면 뒤에서, 혹은 작은 아씨들을 넘어서서 올컷이라는 작가/인물 자체로까지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혹의 솜씨 또한 근사하다. "1권에 실린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고, 그 김에 작은 아씨들도 새롭게 다시 읽고 2권을 기다리는 독자 분들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본다"는 말을 단순한 바람만으로 끝내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해설이라고나 할까. (펭퀸클래식코리아는 이 책 덕분에 작은 아씨들을 최소한 한 권 더 팔게 생겼으니 감사편지 한 장 띄워보시는 건 어떨지.)

 

 그런즉, 작은 아씨들의 애독자는 물론이고 제인 에어, 워더링 하이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로맨스 벨벳 애무하기, 끌림, 핑거스미스의 팬, 또는 제인 오스틴이나 이디스 워튼의 팬을 비롯하여 엄격한 사회 규범하에서 은밀한 뉘앙스를 통해 벌어지는 애정담과 험담에 황홀해하는 독자,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서 곧잘 나타나는 시선의 게임을 사랑하는 관음꾼, 더불어 1940년대 고전기 할리우드의 발 루튼 제작 공포영화 및 불청객이나 유령과 뮤어 부인,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멜로 드라마, 혹은 지극히 도덕적인 보수성을 내세우면서도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외양을 과시하는 영국 해머 공포 영화의 이율배반적인 쾌락을 흠모하는 영화 애호가 모두(동지들!)에게까지 아낌없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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