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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강도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2월
평점 :
『살의의 쐐기』를 시작으로 『아이스』, 『킹의 몸값』, 『경찰 혐오자』, 『조각맞추기』를 거쳐 여섯 번째로 만난 87분서 시리즈. 이쯤 되니 87분서는 대표작 한두 권이 아니라 시리즈로서 읽을 때 더 빛을 발한다는 말이 깊이 와 닿는다. 물론 작품마다 중심 사건은 있고, 수사 과정도 있고, 결론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 이야기의 내적 완결성을 따지기보다는 여러 작품을 관통하며 펼쳐진 87분서의 세계라는 큰 그림 쪽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리고 거꾸로 그 큰 그림 안에 담겨 있는 조각이라면 어떤 조각이든 상관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시트콤 〈프렌즈〉를 생각하면서 베스트 에피소드나 베스트 시즌을 가릴 수도 있겠으나 그 전에 열 시즌을 함께한 캐릭터들의 삶 전체를 친근히 여기게 되듯, 87분서 세계도 이제는 사건의 성격을 불문하고 그저 꾸준히 함께할 벗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인상은 어느 정도는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출간 전략 전환과도 상관있겠다. 이전까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출간한 세 권의 87분서 시리즈는 모두 중심 사건에 집중하는 밀도가 높은 작품들이었다. 『살의의 쐐기』는 어쩌면 시리즈 최강인지도 모를 공간 집중력을 자랑했고, 『킹의 몸값』은 87분서 형사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괴 사건의 딜레마에 몰두했으며, 『조각맞추기』 역시 사라진 돈의 행방이 담긴 사진 조각을 맞춘다는 목표를 놓고 한 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였다. 그게 시리즈를 막 소개하기 시작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출판사의 고민이 담긴 선택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시리즈가 쌓일수록 재미가 배가된다'는 말도 일단 책이 꾸준히 나올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은 혼자 힘만으로도 독자의 눈길을 붙잡아두며 오롯이 설 수 있는 작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시리즈의 인지도가 웬만큼 올라갔다고 판단했는지, 피니스 아프리카에서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 이제부터는 시리즈를 순서대로 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출간된 피니스 아프리카의 네 번째 87분서 시리즈 『노상강도』는, 바로 숱한 출판사에서 끝없이 재간되던 87분서 첫 번째 작품 『경찰 혐오자』의 속편이다. 이미 87분서 시리즈 작품이 여럿 나왔음에도, 어쩐지 새삼 '이제부터 진짜로 시리즈 시작'이라는 감회가 밀려온다.
『노상강도』는 굳이 분류하자면 『살의의 쐐기』, 『킹의 몸값』, 『조각맞추기』보다는 『아이스』 쪽에 조금 더 가깝다. 군더더기 없이 촘촘히 엮은 플롯을 따라 열심히 책장을 넘기도록 한다기보다는 여기저기 흩뿌려진 각각의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캐릭터의 성격이나 인간관계를 음미하는 기쁨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격인 순찰 경관 버트 클링은 『경찰 혐오자』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잠시 근무를 쉬다가, 옛 친구를 만나고, 비공식적으로 사건을 의뢰받고, 복직하고, 새로이 사랑에 빠지고, 순찰경관 주제에 살인 사건에 기웃거린다고 혼나고, 형사가 된다. 그가 수사 자격이 없음에도 사건에 뛰어들며 겪는 곤란,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만난 여인의 마음을 여는 과정, 그의 삶의 변화는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 퍽치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두 줄기가 반드시 짜놓은 각본처럼 딱딱 들어맞으며 긴밀히 상호작용할 필요도 없다. 맥베인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소설의 설계에 따라 배치하는 장기말로 삼기보다는 나름의 생을 사는 인간으로 대한다. 직업은 직업. 범죄를 수사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생활은 있고, 반대로 사생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언저리에도 범죄의 그림자는 드리울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때로는 가장 감정의 폭이 크고 격렬한 대목이 경찰이 범인을 발견하여 붙잡는 순간이 아니라 한 식사 장면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후기작 『아이스』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아일린 버크 형사를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서 다시 만나는 반가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퍽치기를 잡기 위해 함정수사에 나선 그녀가 겪는 사건은 사실 중심 플롯과 큰 관련은 없다. 하지만 피하고자 한다면 피할 수도 있는 위험 속으로 발을 들이며 그녀가 들려주는 각오의 말, 현장의 두려움, 그 안에서 피어나는 동료 형사와의 유대 관계는 그 자체로 값진 아이솔라 경찰 세계의 한 풍경이다. 또 『경찰 혐오자』의 스티브 카렐라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자리를 비우고 있다가 결말에 이르러서야 형사실에 얼굴을 들이미는 그의 모습에 웃음지을 것이다. 『살의의 쐐기』를 읽은 독자라면 장차 잉꼬 부부 노릇을 톡톡히 할 그와 (『노상강도』에는 등장하지도 않은) 아내 테디의 모습을 미리 떠올리거나 되새길 수도 있겠다. 퍽치기 사건은 범인이 잡히면 그걸로 끝이지만, 연애는, 동료애는, 신혼은, 그리고 87분서라는 공동체의 세계는 이제 막 새로이 시작되었다. 독자의 시선이 작품의 경계 너머로 뻗어있는 시리즈 전체를 향할 수밖에. 아마도 이것이 『노상강도』를 읽는 동안 느낀 정겨움의 정체이자 『노상강도』를 다 읽은 후 느낀 갈증의 정체이리라.
이런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는 드디어 87분서 전작 목록을 권말에 수록하였다. 오래전 절판된 삼중당 문고 정보까지 기록한 꼼꼼함도 돋보이거니와, 이제부터 여기 나열한 하나씩 다 내버리고야 말겠다는 결기도 느껴져 새삼 기대된다. 훗날 책장에 꽂힌 쉰일곱 권의 87분서 시리즈를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의 기대를 되새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