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실 해밋 - 중국 여인들의 죽음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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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책을 펴들고 진득하니 앉아 대실 해밋의 단편집에 관해 감상을 써보려다가 채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집어치우고 말았다. 해밋의 작풍이나 성정에 관해 무언가 그럴듯한 말을 꾸며내려 애쓰는 내 모습이 꼴사납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작 해밋에게는 그런 기질이 없지 않은가. 물론 그도 작가로서 자신의 문장을 갈고 닦았겠지만, 최종 결과물에서는 힘을 주어 근사한 글을 선보이겠다는 집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 콘티넨털 옵은 그저 일어난 일을 일어난 대로 말하고 생각한 것을 생각한 대로 말할 뿐이다. 중언부언하지도 않고 말을 에둘러 꼬지도 않는다. 자신이나 남의 행동을 보며 함부로 이렇다저렇다 분석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콘티넨털 옵에게는 자신을 과도하게 채찍질하는 지식인풍의 자의식이 없다.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윤리를 거듭 반추하며 겉으로는 무심한 척해도 끝없이 비아냥을 흘리며 세상의 갖은 풍경에 관심을 갖는 필립 말로의 글은 해밋에 비하면 여기저기 기름기가 많은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런즉 내가 감상을 쓴답시고, 혹은 이 책을 보기 좋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답시고 그의 행동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거나 해밋의 문장에 관해 갖은 미사여구를 덧붙인다면, 그건 그냥 바보 짓이 되기에 십상일 것이다. 작가가 검소한 한 문장으로 말해놓은 것을 어지러운 열 문장으로 '번역'하는 꼴만큼 한심한 것도 없지 않겠나.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만 말하겠다. 해밋의 단편은 해밋의 장편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많은 낱말을 필요로 하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단편도 장편들만큼이나 사납고 빠르고 영리하다. 펄프 픽션에 어울리는 자극도 한가득이다. 소재도 머리 좋은 여인과 벌이는 귀여운 지분거림부터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소란스러운 군사 작전까지 다양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의 뒷골목만 상상했던 독자라면 그 자유로움에 아마 깜짝 놀랄 거다. 그렇다고 감정의 진폭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얕지도 않다. '세련된' 범죄 소설 작가들이 정교한 언어로 세상을 잘게 조각내어 하나씩 맛보려 할 때 해밋은 그 모든 조각이 담겨 있는 덩어리를 한 손에 통째로 쥐어뜯었을 뿐이다. 차라리 그편이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나는 또 슬슬 바보짓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니 이런 하잘 것 없는 소개를 읽는 데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냥 해밋을 읽으시길. 그리고 모쪼록 그렇게 인기를 얻어 아직 소개되지 않은 해밋의 다른 단편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참, 그래도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책을 읽을 때 권말의 작가 연보도 놓치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대실 해밋 장편 전집에 수록된 연보보다 조금 더 자세한데, 그 디테일 차이가 여러 가지 즐거움(혹은 슬픔)을 선사한다. 특히 1947년에 딸과 함께 보낸 시간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포복절도했다. 당사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웃긴 건 웃긴 거니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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