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박지원의 '사이'를 생각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편과 저 편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등의 박지원의 '사이'. 신과 인간의 '차이',

인간과 인간의 '차이', 긍정과 부정의 '차이' 등의 니체의 '차이'.

뭐가 더 철학적이고 매력적이고 위대하고 말고라기 보다는

그냥 그 틈, 그 간격을 평생 일관되게 생각하고 사유하고

글을 쓰고 또 생각하고... 뭐, 그런 것들이 뭐랄까... 좀 아련한

확실치 않은 어떤 것들을, 어떤 생각의 파편들을 떠오르게 하네요.

생각보다 쉽다라는 착각을 가지고 읽다 보니 뭐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방금 읽은 윗줄이 생각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치매를 경험하게 하는 책이네요.

정반합의 변증법에 머무르지 않고 정과 반 사이, 반과 합 사이,

그 차이에서의 생성, 생명력, 변화와 혁명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열정적인 광기. 그 시대의 긍정의 주류들을 부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긍정의 부정을 이끌어내는 삶의 초긍정성이,

사랑이, 어린아이 같음이 왜 니체가 누구보다도 더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철학가라고 하는지 아주아주 조금 이해되려고 하네요.

수행 중 부처를 만나면 죽이라던 어느 선승처럼 니체는 스승을 죽이고,

고정관념을 죽이고, 심지어 신을 죽이면서까지 삶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신이 그렇게도 사랑한 인간을 말이지요. 섣부른 판단일까요?

어쨌든 니체는 '니체를 버려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네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니체를 버리지 않은 듯, 아니 못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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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소소한 화제를 모으는 것

같네요. 원작 재상영부터, 신민아 씨의 활약상까지.

툭 하면 천 만, 몇 백 만 관객하다보니, 숫자가 좀 작은

느낌도 있습니다만, 사실 큰 이슈 없는 영화가 200만까지

가는 건 화제가 될 만 한 것이죠.

 

또다른 소소한 화제가 있습니다.

<결혼, 하면 괴롭고 안 하면 외롭고>라는 책인데,

개그맨 보다 웃긴다는 장경동 목사님의 신간입니다.

수 많은 커플들을 상담해 온 내공이 보이는 유쾌한

책입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힐링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네요.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답이 있는

질문도 있고, 답이 없는 질문도 있죠. 어찌보면 대부분

답이 없는 질문들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에

눈에 띄는 질문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지요.

저는 이미 상황 종료인 질문이기도 한데,

 

'결혼을 해야 하는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개인들에게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사회는 없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에게 결혼과 육아는

질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냥 당연한 것이었죠.

어느 순간 개인들에는 심각한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기성세대와 사회에서는 답이 있죠. "해라, 낳아라"

두려움 섞인 대답입니다. 강요죠. 이 글을 쓰는 저도 어쩌면

기성세대의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와 책은 잘 어울립니다. 해답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낳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니까요. 즐겁게 말이죠.

파워블로거들과 있었던 영화시사회에 장경동 목사님의

짧은 강연은 같은 이유에서 의미가 있었던 듯합니다.

사실 결혼과 육아없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지도 의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어떤 것이

빠진다면 과연 그것도 인생이랄 수 있는 것인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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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

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성경구절에 곡을 붙인 것인데

가수 김세환의 소리가 진한 여운을 남기죠.

결혼은 무엇일까요?
저는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이고 괴로움이죠.

주변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지는 않지만

한마디 합니다. "왜?"

주변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지는 않지만
한마디 합니다. "왜?"

고통이고 고난이고 수난이고 괴로움입니다. 이승에서의 악업이

한 꺼풀 더 쌓이는 것이죠.

그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결혼했으며, 왜 아이를 나았는가?"
아시겠지만 저의 대답은 "몰랐다"입니다.

그런데...결혼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결혼은 관계입니다. 넝쿨재 들어 온 관계이지요.

결혼으로 인하여 새로운 관계들이 엄청 생깁니다.
마치 부족과 부족의 연합과 같은 것이죠. 그러나 꼭 그렇게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꼭 그렇게 거시적이지는 않습니다. 쏠쏠한 재미가 있죠.

일상의 사소하고 소소한 뭐 그런거요. 알콩달콩이 그렇고 티격태격이 그렇고

아이도 그렇고 경제규모가 커지는 것도 생각보다 소소한 재미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러한 소소한 재미들이 정을 이루고

큰 의미에서의 '사랑'을 이루는 것이죠. 또 사랑입니다.

마치 인간 탄생의 목적이 사랑이라는 것처럼, 세상의 길은 마치 사랑으로
통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결혼은 어쩌면 모든 사랑을 대변하는

궁극의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빙자한 '사랑이야기'.

오랜 목회 활동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겪은
깨달음과 많은 사례들, 삶의 언어들의 조합.
그렇게 재밌게, 편하게, 읽고 싶게, 결혼하고 싶게 흘러갑니다.

사랑하고 싶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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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 59p

 

어떤 분의 설교에서 들은 말씀인데,

"천국은 이미 도래해 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연히 의문이 듭니다. '근데 세상은 왜 이런가?'

질문을 많이 받으셨는 지 이어서 말씀하시네요.

인간 본성, 즉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악'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로 인해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러가지로 의문부호가 생기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위의 인용문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그 자체로 신앙일 수는 없습니다. 요소일 수는

있겠죠. '생활방식'이라는 말은 기독교가 여러가지

부정적인 삶의 태도, 즉 죄의식, 현재의 삶을 무시하고

천국만을 바라본다는 이해. 그로인해 현재의 삶에서는

무능하고 나태한 태도, 혹은 그 반대로 광신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오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삶을

최대한 긍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되지요. 생활방식,

삶의 태도에 관해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역시 '사랑'

으로 대표됩니다. 사랑하는 이유는 천국을 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지금 현재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천국은 생활방식이다."라는 니체의 말과 "천국은 이미

와 있다."라는 어느 설교자의 말은 일맥상통 한다고 봅니다.

몇몇 천국을 살았던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고, 지금도

천국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천국을 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삶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이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겸허하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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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를 죽였는가?" 죄인을 찾아라!...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들인

보복가 징벌, 심판대와 같은 장치들이 등장한다......48P

 

저는 니체도 모르고 기독교도 교회는 다니지만

잘 모릅니다. 그래도 뭔가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끔 목사님들 설교에서도 그렇고, 철학하시는 분들도 그렇고

서로를 너무 '디스'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현재 기독교 교리 완성에 철학의 공헌도 분명히 있고 내로라 하는

철학가들 중에서도 그리스도 인이 상당히 있는데 말이죠.

사유체계의 차이가 아닌가 싶네요. 어쨌든 니체 시대의 기독교가

공공의 적이였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기독교가 염세적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좀 그러네요. 제가 보기엔 삶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거든요.

왜냐하면 긍정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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