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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천경환 지음 / 걷는나무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디자인,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내게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 것일까? 문득 책을 읽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고급스럽게 보이는 단어이기도 하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단어인 것 같기도 하고 쇼핑할 때면 디자인이 예쁜게 좋아라고 외치는 일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 디자인이란 단어를 붙인다면 그건 진열장 속 물건들이나 멋진 건물이 생각났는데 책을 읽으며 내가 알고 있는 '디자인' 이란 개념이 새롭게 정리되어 가고 디자인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까운 곳에서 다가오고 느껴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게으른 건축가가 쓴 디자인에 관한 고찰, 읽어내려 갈수록 그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색다름으로 내게 다가온다. 독특한 목차에 눈길이 한참이다. mm, cm, m, km가 목차인 책,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뻗어나가는 책 속 세상에서 내 눈걸음이 한참이나 머무른 것은 cm였다. 특히나 저자가 애착을 가지는 우산이었다.
아무런 기호도 붙어 있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내 우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때도 많다. 다른 우산들은 모두들 차별화된 모습을 하기 위해 온갖 기호와 패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기호없이 단순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새하얀 우산은 어느 상황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p.86
조금 특이한 거, 화려한 거, 이상한 거를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이 있어 내 우산들은 참으로 형형색색이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우산이 없어 편의점에서 산 아무 무늬없는 우산을 쓰고 다니면서 그 안에서 갖었던 단순함이 주는 여유로움이 생각난다. 저자가 편의점에서 파는 삼천원 우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 전의 기억이 떠 오르며 저자가 작고 소소한 물건들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고 책을 읽고 편의점이나 길을 걸을 때면 물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저자가 말하는 디자인들은 디자인에 관한 책들에 비해 그 화려함이나 소재가 상당히 다르다.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에 대한 소재로 가득한 책들을 볼 때면 얼마나 눈이 핑핑 돌았는가! 그런데 이 책은 차분해진다. 그의 소소한 이야기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것들을 떠 올리며 디자인을 생각해보고 그 디자인과 함께 알 수 없지만 추억이 떠 올라 책 한 장 넘기는 시간이 참으로 오래 걸리기도 한다.
할 말을 잊고 한참을 서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제법 서로를 깊이 잘 알고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서야 뒤늦게 제대로 마주보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 듯한기분이 들었다. -p.297
여유로운 데이트였다. 책 속에 보여지는 세상이 눈을 들면 내 앞에 펼쳐지고 저자의 생각을 듣고 본 세상은 다르게 다가온다. 내 눈이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가 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색다른 책과의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