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 젊은날
시바타 쇼 지음, 김성연 옮김 / 한마음사 / 199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인생 베스트 5 중의 하나로 꼽았던 책이다. 신형철이 읽은 책은 1993년에 나왔던 이 책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0년에 출간된, 세로줄로 된 책이다.

아래 포스팅한 글에 사진을 올렸지만 다시 한번 올리련다.

 

             

 

먼저 제호. 초판본은 <그래도 우리들의 나날>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제호가 <그래도, 우리 젊은 날>로 바뀌었고,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란 이름으로 문학동네에서 올해 나올 모양이다. 흠, '그래도' 란 이름 덕분에 '그래도'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가보다.

 

나이를 따져보면, 1980년에 나온 책이니 이미 한 세대(약 30년)가 지났고 새로운 세대로 진입한지도 9년 가까이 된 셈이다. 번역본이 그렇다는 얘기고 일본 원작은 1964년에 나왔다. 일본 현대 소설의 고전 중 하나라고 한다. 신형철이 소개했으니 머잖아 떠오르는 소설로 널리 읽혀질지도 모른다.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으니 기분은 삼삼하나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스무 살의 내게 도착했고, 삶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과 '언어'를 건네주었다.'라고 신형철은 썼는데, 스무 살에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읽었을 지도 모르는 이 책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20대에 이 책을 왜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 이유를 추측해본다. 1980년은 5.18 이 일어난 해이다. 특별히 운동권이 아니어도 그 당시 대학생이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일본 전후 학생운동 세대를 다루는 이 소설이 잘 먹혀들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나 였다면, '피곤함'이 앞섰을 것 같다. 우리와 일본을 비교해보자는 호기심이 작동할 만도 한데 너무나 친숙한 주제로 다가와 이내 호기심을 거둬들였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등장 인물을 계속 괴롭히는 질문, "죽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이 질문이 가슴에 다가왔을까? 당시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국문학을 수강했던 나는 '죽음'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했던 어떤 교수의 수업에서 '죽음'에 대한 공부를 '강제로' 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죽음이란 주제는 다룰 성질이 못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부의 피로감. 그러니 "죽는 순간에..."라는 질문을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었더라도 등장 인물들을 지배하는 어떤 정신적인 공허감이나 허무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것이다. 대학 때는 특히 그런 정신세계에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읽었더라도 눈으로만 읽었을 확률이 높다.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오는 아무리 좋은 글도 단지 시험 대비용 글로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배움에 대한 개념이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읽은 것도 같고 안 읽은 것도 같다는 얘기. 이제라도 책을 읽을 때 밑줄 긋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정신적인 흔적은 둘째치더라도 물질적인 흔적이라도 남겨야 읽었다는 증거가 되니까.

 

 

 

이제는 이 책이 잘 읽힌다. 재밌다. 마치 이제야 <장자>를 읽게 된 것처럼. 그렇다고 <장자>와 같은 깊이를 요구하는 소설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다음에 옮기는 구절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구닥다리 표현으로 보이겠으나 내게는 20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번역된 책들을 읽었으므로. 다소 틀린 맞춤법도 그대로 옮긴다.

 

제가 언제나 상대방의 사람과 그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싶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 그 어떤 공통의 의미를 갖고 싶다고 원한 것도 이 망막한 세계 속에 확실한 말뚝을 뿌리박고 싶다, 그것을 한 개 한 개씩 뿌리박음으로써 거기에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 역사라고 부를만 한 것을 생성하고 싶다고 원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주위에 펼쳐져 있는 이 무한한 공간, 우리들을 이윽고 죽음 속으로 소멸시켜 갈 이 무한한 시간에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추구하기에 곤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추구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었읍니다. (117쪽)

 

이윽고 우리들이 정말로 나이들었을 때 젊은이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시절엔 어땠었느냐고. 그때 우리들은 대답하리라. 우리들 시절에도 똑같은 곤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니까 다른 곤란이었겠지만, 곤란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똑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과 친숙해지면서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시대의 곤란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생활로 용감히 진출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을 젊은이들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옛날에도 있었던 이상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용기를 갖는다는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갔던 우리들의 생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이런 번역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글이 명료하고 분명해야 생각도 명료하고 분명해지고 생각을 거치는 표현도 정확해진다. '정확성'이란 표현을 정확하게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새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또 헷갈리려나? 과연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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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2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적인 흔적은 물질적인 흔적으로 표해야겠네요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

nama 2018-10-26 17:43   좋아요 0 | URL
불질적인 흔적을 남겨도 나중에 보면 낯설게 다가오지요. ˝내가 읽은 게 맞아?˝하면서요. 그런 경험 때문에 언젠가부터 밑줄을 긋지 않았거든요. 하기야 늘 새로운 것도 나쁘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