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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동안 수행을 하면서 돈 한 푼 쓰지 않았고 성교나 자위도 하지 않았으며 텔레비전이나 소설책도 접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도 않고, 가족도 멀리했으며 휴일도 없었고,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도 않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 한 끼 주어진 음식을 주어진 만큼 먹으며 지냈다. 17년 동안 자발적으로. 그렇게 해서 이 남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나는 프롤로그에 나오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틀릴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아니, 나에게 그가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은 계속해서 되뇌이고 싶었다. 



그는 수행을 하며 부처님에게 받은 첫번째 선물로 인생이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을 때, 적어도 슬픔이나 불안감이나 외로움이 밀려올 때 호흡에 집중하면 좋다는 사실, 자신의 의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믿지는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라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같은 말일까? 그렇게 보면 예수님과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은 결국 비슷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겁니다. 다들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셨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진실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탐진치 때문이 아닐까? 탐하는 마음과 비교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그 마음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가려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불교에서 팔정도의 바른 습관을 강조한 것은 아닐지. 



스님은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마음의 고통이 내 안에서 왔음을 알더라도 아픔이 덜어지지 않는다. 나는 항상 그게 너무 괴로웠다. 



이 고통이 나한테서 왔음을 알고 있다. 나의 탐심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왔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금 방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내가 한없이 낮은 자세가 아니었음을, 겸손하지 않고, 진짜 본질을 잊고 있었음을.



이 책은 내용 자체도 좋지만 토마스 산체스의 그림을 삽입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아주 근사한 아우라를 담은 책이 되었다. 마음이 널을 뛸 때 자꾸만 세상탓, 남탓을 하고 싶어질 때면 이 책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주문처럼 외우고 싶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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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는 무엇일까? 처음 육아를 시작하며 잘해보고 싶었다. 잘하는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랑하는 애 아이들 잘 키워보고 싶었다. 수많은 육아서를 보았는데, 사실 잘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이유를 알고 있다. 



육아라는 것은 지속성의 영역이고, 나와 아이 뿐만 아니라 여러 환경과 유전적 요인 등 여러 가지 원인들이 조합해서 생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육아의 성공, 이런 것은 누가 무엇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아이가 명문대 가면 육아가 성공한 건가? 혹은 돈 많이 벌면 성공하는 건가?



나는 그래서 행복한 엄마가 성공하는 엄마라고 생각했다. 행복한 엄마가 이기는 엄마라고. 우리 인생을 이루는 것은 매일매일의 시간이다. 이 찰나찰나의 시간이 행복하면 결국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행복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는 이 시간이 불행하고, 아이 키우기가 너무 힘들고 죄책감과 미안함과 불안에 허덕이는데 행복해질 수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육아에서 가장 필요한 건 공부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육아서를 읽는 것과 육아를 잘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육아는 현실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육아서를 한 5~10권 정도 읽었을 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 읽으면 육아가 대략 어떤 것인지 알게 되니까



애착 이런 거고, 훈육은 이렇고, 엄마표영어는 이렇고, 그런데 실제 육아를 하다보면 육아서랑 다른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 다르네. 왜 다르지? 어어, 이러다가. 에잇. 역시 책은 현실과 달라. 내가 다시는 육아서 보나봐라. 이렇게 되는거다. 하지만 좀더 깊이 넓게 육아서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세상을 보는 시야가 확 넓어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육아서는 아이를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키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초반에 가장 도움이 많이 되었던 책은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이었다. 



가 처음 아이를 키울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이런 거였다.

 

- 혹시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우면 어떻게 하지?


- 나도 부모님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이한테 내 상처를 되물림하면 어떻게 하지


- 나는 아이한테 사랑만 듬뿍 주고 싶은데, 아이를 우리 부모님처럼 키우고 싶지 않은데, 왜 아이에게 자꾸 짜증을 날까


그러다가 문득 부모가 나한테 상처주었던 행동을 고스란히 아이한테 하고 있을 때 화들짝 놀란 기억이 있다. , 내가 싫다고 하면서 아이를 대하는 사고방식과 행동은 예전에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그대로 하고 있구나.

 


그때 접했던 책이 바로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라는 책이다. 거의 대학교재처럼 두꺼운 책인데. 이 책에서는 어떻게 어린 시절의 상처가 지금도 계속해서 나한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고, 어린 시절의 각 성장단계로 돌아가서 내가 나 자신을 안아주고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사실 나는 대단한 상처나 트라우마 없이 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모르게 의도치 않은 말과 행동이 나오고,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자랄 때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러셨을 테지만 감정을 잘 받아주지 않는 부모님께 자라다보니 어떻게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고, 자꾸 위축되고, 죄책감 느끼고.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환경적 지원은 많이 받았지만 정서적 지원은 받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도 들고. 아이를 낳고 나는 사랑을 많이 주면서 키워야지 생각은 하지만 받아본 적이 없는 정서적 지원을 하려니 조금 힘들고 버겁게 느껴졌다. 왜 나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지원을 아이한테 해주어야 하나, 억울한 마음도 들고.

 


그런데 그렇다고 정서를 돌보는 역할은 부모님이 해주지 않았다고 언제까지나 구멍난 상태로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성인이 되면서 나를 사랑해준 많은 친구들, 동료들, 남편, 이런 사랑으로 정서적 지원을 채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며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이 많이 났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나를 다시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육아의 과정이 단순히 아이만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 자신을 같이 키우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10년 전 아이를 처음 키울 때의 나를 생각하면 그때의 막막하고 괴로웠던 감정이 떠오른다. 아이는 예쁜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사랑하긴 하지만 죄책감과 속상함 때문에 맘껏 행복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아이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하다.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아이가 커가는게 너무너무 아깝다. 그래서 나는 정말 사람들이 육아의 어려움, 힘듦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즐거운,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육아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 따뜻한 육아를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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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습니다 - 잠들기 전,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디아 지음 / 카시오페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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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은 기본적으로 장르와 카테고리와 같은 취향으로 최소 9가지 등급이 나뉘고, 같은 취향안에서도 개인의 문해력의 수준에 따라 최소 9단계까지 나뉘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물받은 책이 나의 취향에 딱 맞을 가능성은 최소 1/81. 이게 과연 가능성이 있는 수치일까?



그러니 선물받은 책을 한번도 기쁘게 읽은 적이 없다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그런 내가 다른 이들에게 책선물을 한번도 해주지 않았다는 것 또한 어찌보면 사필귀정. 뻔한 결말. 그런데 이런 내가 5권 넘게 다른 이들에게 선물한 책이 있으니. 바로 이 책 <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습니다> 이다. 



이 책 너무 좋다. 가슴이 사무치게 좋다. 명상, 요가, 마음공부와 같이 실제 삶에서 꼭 필요하지만 뭔가 먼 이야기같은 것들을 너무나 착 붙게 잘 설명해준다. 에세이면서도 인문학적 통찰이 담겨있어 에세이와 인문서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읽어볼만한 책이다. 



게다가 글이 너무 좋다. 글이 쉬운데 깊이까지 있다. 게다가 기품있다고 할까? 좋은 글인데 읽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한다. 쉽게 써져 있으니 문해력 수준 1~9단계까지 모두 오케이. 그래서 그럴까? 내 주변 지인들 모두 다양한 n분의 81의 취향을 가졌으나 이 책을 읽고 싫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좋다고 감사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읽을 때도 잘 읽혀지만 무엇보다 읽고 나서 한동안 이 책의 문구들이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이 책의 문구에 빗대어 나를 반추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참 좋은 책을 읽었구나 계속 생각하게 한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자기 마음을 부러 어둡게쓰는 일은 세계 공통으로 일어나는 바보짓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탓하며 자기 마음을 괴롭게 쓰는 걸 합리화해요. 그 사람이 나에게 싫은 감정을 심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탓하고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의 주인 자리를 내줍니다. 내 마음은 그의 반응에 따라 휘둘리며 움직이는 하인이 되고 말죠. (...) 이렇게 살아도 사실 틀리거나 절대적으로 나쁜 건 아닙니다. 어떻게 살지는 내 자유니까요. 울면서 살아도 되고, 화내면서 살아도 되고 웃으면서 살아도 돼요. 그렇지만 마음을 어둡게 쓰면서 사는 건 좀 어리석다고 생각해요."(51p)



"그 사람을 제가 싫어한 까닭은 놀랍게도 '나는 여기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데 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 척 구니까 짜증 나.'였습니다. 좀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평소에 무척 ㅈ머잖고, 주목받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하곤 했거든요... 제 욕구를 확인하고 그것이 제 스트레스의 잠재적인 주범임을 알아봤습니다. ' 그 사람'이 아니라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내 욕구'가 스트레스의 뿌리였습니다." (55p)



왜 수행하라는 줄 아십니까? 마음을 길들이지 않으면 거의 괴로움 중독자처럼 살기 때문이에요. 실제 손해가 아닌데도 손해만 바라보며 계속 괴로워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괴롭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까? 당장 수행이 필요합니다. p192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면 나밖에 보이지 않거든요.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든 내가 잘했다, 못했다, 내가 잘났다, 못났다, 내가 이득을 얻었다, 손해를 입었다. 오직 '나,나,나' 하는 '나나랜드'에 갇히고 말아요. .. 나나랜드라는 그 완고한 성을 허물기는 힘들지만, 잠깐이라도 그 성에서 나오려고 명상을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 돈, 미래, 모든 결과가 나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기 위해서 말이에요. (p.285)



이외에도 좋은 부분이 너무 많지만 다 쓸 수는 없고.. 예전에 이 작가님의 <1일 1명상 1평온>에서도 너무 좋은 글귀가 많았는데,정말이지 더 유명해지셔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작가님의 책을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사회도 조금은 덜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기대를 가져보며. 나라도 이 책을 널리 뿌려보자 다짐하며. 오늘도 책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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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퍼유전자를 타고 났다고 절대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던 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제야, 드디어... 마침내?



지난 이틀간 목이 아프고 온몸이 쑤신 근육통과 오한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약 먹고 자고 약먹고 자고 중간중간 간신히 비몽사몽간에 회사일을 체크하다가 오늘 드디어 조금 제정신이 든다. 마스크를 쓰고 아이들 밥도 챙겨주고, 학교에 보내고 나니,(엄마 코로나 확진자에게 자가격리라는게 과연 가능하긴 한걸까, 왜 아무도 코로나 시국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어쨌든, 아이도 없고 밥도 먹고 약도 먹고 식탁에 앉아 있으니, 이건 뭔가. 너무 좋은 것 아닌가! 아직 몸은 아프지만, 회사에는 연차를 내고, 아이들은 학교를 가서 오후에나 올 테고, 나는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사방은 조용하고 집안은 따뜻하다. 아, 너무 행복하다. 코로나에 걸려 행복을 논한다는게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 너무 행복하다. 이런게 행복이였구나!!^^



최근에 읽었지만 계속 정리하지 못했던 책들을 다 꺼내놓았다. 먼저 <주역강의> 부터. 



낭독모임에서 다함께 읽었던 책인데 주역의 64괘를 하나씩 설명하다보니 지금 우리의 관심사와 크게 상관없는 부분도 꽤 있어서 그런 부분은 스킵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좀 너무 뻔하다고 해야 할까, 초등 도덕 교과서 같이 그저 옳고 좋은 말들이 꽤 있어서 이걸 과연 읽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부분들마저 모두 너무 뼈때리는 교훈으로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공간의 만남, 그 사이에 우리의 인생이 끼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조화 속에서만 원만히 진행될 수 있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때가 맞지 않으면 일이 성사될 수 없고, 아무리 좋은 때가 되었어도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일은 역시 어그러지게 마련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공허한 옛 말이 아니니, <주역>이 그 첫머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도 역시 이러한 시간의 절대성, 공간의 상대성, 그리고 그 둘의 조화에 관한 내용이다.

"-46p, 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내가 주역을 읽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약 10년 전, 큰 아이가 5살, 둘째가 2살일 때였다. 아이를 보면 책을 보며, 알라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그때 나를 사무치게 했던 부분은 '박' 괘였다. 꽉 막힌 시절을 견디는 지혜다. 주역에서는 꽉 막힌 시절을 어떻게 견디라고 이야기했을까? "종자를 남겨둔 군자는 수레를 얻지만, 소인은 오두막마저 깨뜨린다." 



유치하지만 나는 당시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다이어리에 틈만 나면 써놓고 이 문장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꽉 막힌 시절이라 해도 나는 종자를 품을 수 있다. 종자를 남겨야한다. 가슴속의 씨를 결코 버리지 말아야한다고 주문을 걸듯 나에게 말했었다. 



그 씨앗이 10년 동안 많이 자랐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흔들리고 심난해하며 주역을 다시 읽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마디 말을 찾아서, 나의 맥락에 꽂히는 그 하나의 괘를 찾아서 주역을 샅샅이 읽었다. 그리고 찾았다. 나에게 필요한 괘. 바로 수, 어떻게 때를 기다릴 것인가에 관한 괘이다. 



"수는 때를 기다림이다. 유부는 믿음 또는 확신이 있음을 의미한다.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왜 기다리는지, 기다리면 무엇을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믿음과 확신,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기다림을 견디기 위한 첫 번재 요건이다. 목표와 기약이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주역>은 이처럼 기다림에는 반드시 믿음과 확신,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가 도래하였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청하지 않은 세 사람의 객이 있어 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인재의 출현이 가장 가시적이고 즉자적인 타이밍의 판별 기준이 된다. 그런 귀인이 나타나는 순간을 놓치지 말고, 그를 공경해 맞이하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면 끝내는 길하다는 것이다. 


_105 수, 어떻게 때를 기다릴 것인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10년을 사업을 했지만 갈수록 확신이 없고, 잘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틈만 나면 딴 곳을 보고 방황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알량하게 다른 것을 보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믿음일것이다. 내가 00를 할 거라는 믿음, 이제 시작한지 10년, 나는 갑자기 잘 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천천히 조금씩 더디더라도 노력한만큼은 확실히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목표가 잘 보이지 않아 이런저런 헛짓거리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잘 될리가 없지. 



그러니까 사실 지금은 추락기가 아니라 추후 10년을 위한 목표를 짜야 할 때였던 거다. 그런데 지치고 힘든 나는 그것을 하기 싫어서 뻘짓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그러다보니 목표가 없어지고 그러다보니 더 내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렇지만 아직 나의 때는 오지 않았다, 처음 창업할 때 10년짜리 계획을 짰던 것처럼 이젠 앞으로의 10년짜리 계획을 짜야 할 때인 것이다. 나는 나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10년이든 20년이든, 나는 더디더라도 확실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주역에 관한 주석서를 쓰다가 계속 포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또 포기하고 산책삼아 갔던 절에서 깜빡 잠이 든 그에게 미래 혹은 전생의 그가 꿈에 나와 호통을 친다. "현세에서 주석을 끝내지 못한다면 다음 세상에서 다시 역경을 공부하고 써야 한다."고, 이후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 감동이다. 



"그러자 욕심이 사라졌다. 완벽한 주석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나 최소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거라는 판단도 생겼다. 잘못 쓴다 해도 스승이 없었으니 나 외의 다른 누군가에게 오점을 남길 일도 없었다.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어차피 애초부터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주역>의 주석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내 안에 끓어 넘치는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162



나 또한 그렇다. 완벽한 무언가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 정말이지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지. 내안에 피가 끓어서, 그것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 중요한 건 그것밖에는 없다. 그러기 이 끓는 피를, 목표로 환원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 어렵더라도. 어려울 때면 <수, 어떻게 때를 기다릴 것인가> 를 다시 읽자. 그리고 <부, 막힌 운을 뚫는 법>을 다시 읽자. 기신기신하면서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군자로서의 일을 어떻게든 계속해야 한다.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고 실을 자아내듯이, 다 나왔을 것 같은데 그 작은 누에에서 다시 실이 뽑아져 나오듯이 그렇게 끊임없이 할 일을 해야 한다. 뒷짐만 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에가 기신기신하면서도 끝까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어 가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 계우포상이다. "

 188p, 부- 막힌 운을 뚫는 두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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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녀가 있다. 16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본 적도 없고, 예방접종을 맞아본 적도, 병원을 가본적도 없다. 심지어 출생등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후출생신고를 하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버지는 사이비 광신도에 고철폐기물장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위험천만한 폐기물 작업에 동원한다. 엄마는 산파이자 약초전문가로 신비하지만 효능은 잘 모르는 오일을 만든다. 


그곳에서 태어난 8남매. 자식들은 너무 쉽게 많이 다친다. 고철폐기 작업을 하다가 고철에 찔리고, 손가락이 절단되고 산등성이에서 떨어지고 온몸에 불이 붙는다. 아버지의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시시때때로 사회와 병원과 교회가 음모를 지닌 일루미니티라고 규정하고 폭언하고 조정한다. 


어머니는 유약하고 힘이 없다. 오빠 숀은 모든 여성을 창녀로 보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곳의 막내아이 이 책의 저자 타라는 17살에 대학에 합격해 게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하버드에서 방문연구,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박사가 된다. 이 책은 이 기적같은 배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바로 <배움의 발견>이다.



여러 의미에서 끝내주는 책이다. 나는 최근에 이와 같이 훌륭한 책을 읽어본적이 없다. 스토리 자체가 매혹적이지만 그 상세한 디테일은 작가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처럼 감각적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스토리 그 자체다. 16살까지 학교도 가본적이 없는 여자아이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된다. 게다가 이 아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집안 7명 중 3명의 아이가 결국 박사과정까지 공부한다. (물론 나머지 4명은 대학 문턱도 가지 못한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역시 될놈될..'이라고 썼던 한줄평도 생각난다. 그렇다. 역시 될놈될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될놈될'과 '안될놈안될'을 판가름짓는 단 하나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일기)쓰기'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일기를 계속 써왔고 일기에 상당부분 기억을 빚지고 있으며 최대한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는 순간 현실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써오는 사람, 끊임없이 경험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다시 재조직해서 재해석해서 다시 쓰기를 하는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첫번째는 사고였다면 두번째는?"


리처드의 운전한 교통사고는 '사고'였다.그렇지만 두번째 교통사고는? 숀오빠의 떨어져서 머리를 부딪힌 것은 '사고'였다. 그렇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치료하려고 15분간 방치하고 그후에 발악하다 또 머리를 부딪힌 것은? 리처드의 화재사고는? 아빠의 화재는? 그 모든 사건사고들이 모두 하느님의 의도라고 아빠는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는 사고였다. 그렇다면 두번째는?" 그 질문은 계속해서 써온 사람만이 해올 수 있는 질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두번째 놀라운 것은 저자의 디테일이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사고속에서 그 디테일의 감각을 되살려낸다. 그 디테일 속에서 나는 비로소 저자에게 배움이라는 것이 '진정'무엇을 의미하는지 감각으로서 깨닫게 되는 거다. 처음 저자에게 배움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내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것이 내 배움이요 교육이었다. 빌려 쓴 책상에 앉아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 109


그리고 그것은 연이어 자각의 길로 그녀를 안내한다. 자각은 남들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들이 잔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진실이 상대적일수 있다는 불안, 그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과정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었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 



그런 자각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사람은 결국 어떤 존재가 될까? 자기 의견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것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어떤 상황을 각각의 다른 안경으로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고, 결국 자기만의 안경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저자는 이것을 '특권'이라 부른다. 


"나는 언니가 한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471


나또한 공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언어 속에서 나에게 맞는 언어를 찾고 활용하며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어서라고. 그 능력이야말로 모든 배움의 목적이고, 그렇기에 모든 배움은 불온하다고. 모든 배움은 전복의 기운을 담고 있다. 아니 전복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다. 



그렇기에 저자가 지금까지 행복과 안락이라 느껴왔던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하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출간할 때까지 저자는 결코 가정에서 용서받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매년 고향에 내려가지만 부모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는다. 그녀는 어린시절과 괴팍하지만 사랑하던 사람들과, 끝내 믿을 수 없지만 한때 삶이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년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아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507)



나는 이렇게 완벽한 교육에 대한 정의를 본 적이 없다. 



......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던 부분이 있다. 저자가 숀 오빠의 폭력성에 대해 엄마한테 말하자 엄마가 공감해주는 부분이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딸인데, 내가 너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저자는 그 말이 평생 찾고 있던 말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저자의 수치심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반쯤 정신나간 사람이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목을 눌리고 잇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피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423~424) 


하지만 엄마가 채팅창에 써놓은 그 말을 읽는 순간 그녀는 한평생을 다시 살았다.  어린 시절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했고, 다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새로 쓰기를 결심할 정도로 감사했던 엄마의 그 말은 허위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묻어두었다. 엄마는 그저 딸의 바람을 충실히 반영해준 것 뿐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무지는 어떻게 악이 되는가. 약함이 어떻게 악이 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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