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동안 수행을 하면서 돈 한 푼 쓰지 않았고 성교나 자위도 하지 않았으며 텔레비전이나 소설책도 접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도 않고, 가족도 멀리했으며 휴일도 없었고,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도 않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 한 끼 주어진 음식을 주어진 만큼 먹으며 지냈다. 17년 동안 자발적으로. 그렇게 해서 이 남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나는 프롤로그에 나오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틀릴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아니, 나에게 그가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은 계속해서 되뇌이고 싶었다.
그는 수행을 하며 부처님에게 받은 첫번째 선물로 인생이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을 때, 적어도 슬픔이나 불안감이나 외로움이 밀려올 때 호흡에 집중하면 좋다는 사실, 자신의 의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믿지는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라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같은 말일까? 그렇게 보면 예수님과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은 결국 비슷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겁니다. 다들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셨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진실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탐진치 때문이 아닐까? 탐하는 마음과 비교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그 마음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가려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불교에서 팔정도의 바른 습관을 강조한 것은 아닐지.
스님은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마음의 고통이 내 안에서 왔음을 알더라도 아픔이 덜어지지 않는다. 나는 항상 그게 너무 괴로웠다.
이 고통이 나한테서 왔음을 알고 있다. 나의 탐심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왔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금 방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내가 한없이 낮은 자세가 아니었음을, 겸손하지 않고, 진짜 본질을 잊고 있었음을.
이 책은 내용 자체도 좋지만 토마스 산체스의 그림을 삽입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아주 근사한 아우라를 담은 책이 되었다. 마음이 널을 뛸 때 자꾸만 세상탓, 남탓을 하고 싶어질 때면 이 책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주문처럼 외우고 싶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