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소녀가 있다. 16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본 적도 없고, 예방접종을 맞아본 적도, 병원을 가본적도 없다. 심지어 출생등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후출생신고를 하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버지는 사이비 광신도에 고철폐기물장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위험천만한 폐기물 작업에 동원한다. 엄마는 산파이자 약초전문가로 신비하지만 효능은 잘 모르는 오일을 만든다. 


그곳에서 태어난 8남매. 자식들은 너무 쉽게 많이 다친다. 고철폐기 작업을 하다가 고철에 찔리고, 손가락이 절단되고 산등성이에서 떨어지고 온몸에 불이 붙는다. 아버지의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시시때때로 사회와 병원과 교회가 음모를 지닌 일루미니티라고 규정하고 폭언하고 조정한다. 


어머니는 유약하고 힘이 없다. 오빠 숀은 모든 여성을 창녀로 보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곳의 막내아이 이 책의 저자 타라는 17살에 대학에 합격해 게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하버드에서 방문연구,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박사가 된다. 이 책은 이 기적같은 배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바로 <배움의 발견>이다.



여러 의미에서 끝내주는 책이다. 나는 최근에 이와 같이 훌륭한 책을 읽어본적이 없다. 스토리 자체가 매혹적이지만 그 상세한 디테일은 작가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처럼 감각적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스토리 그 자체다. 16살까지 학교도 가본적이 없는 여자아이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된다. 게다가 이 아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집안 7명 중 3명의 아이가 결국 박사과정까지 공부한다. (물론 나머지 4명은 대학 문턱도 가지 못한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역시 될놈될..'이라고 썼던 한줄평도 생각난다. 그렇다. 역시 될놈될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될놈될'과 '안될놈안될'을 판가름짓는 단 하나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일기)쓰기'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일기를 계속 써왔고 일기에 상당부분 기억을 빚지고 있으며 최대한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는 순간 현실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써오는 사람, 끊임없이 경험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다시 재조직해서 재해석해서 다시 쓰기를 하는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첫번째는 사고였다면 두번째는?"


리처드의 운전한 교통사고는 '사고'였다.그렇지만 두번째 교통사고는? 숀오빠의 떨어져서 머리를 부딪힌 것은 '사고'였다. 그렇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치료하려고 15분간 방치하고 그후에 발악하다 또 머리를 부딪힌 것은? 리처드의 화재사고는? 아빠의 화재는? 그 모든 사건사고들이 모두 하느님의 의도라고 아빠는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는 사고였다. 그렇다면 두번째는?" 그 질문은 계속해서 써온 사람만이 해올 수 있는 질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두번째 놀라운 것은 저자의 디테일이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사고속에서 그 디테일의 감각을 되살려낸다. 그 디테일 속에서 나는 비로소 저자에게 배움이라는 것이 '진정'무엇을 의미하는지 감각으로서 깨닫게 되는 거다. 처음 저자에게 배움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내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것이 내 배움이요 교육이었다. 빌려 쓴 책상에 앉아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 109


그리고 그것은 연이어 자각의 길로 그녀를 안내한다. 자각은 남들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들이 잔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진실이 상대적일수 있다는 불안, 그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과정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었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 



그런 자각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사람은 결국 어떤 존재가 될까? 자기 의견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것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어떤 상황을 각각의 다른 안경으로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고, 결국 자기만의 안경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저자는 이것을 '특권'이라 부른다. 


"나는 언니가 한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471


나또한 공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언어 속에서 나에게 맞는 언어를 찾고 활용하며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어서라고. 그 능력이야말로 모든 배움의 목적이고, 그렇기에 모든 배움은 불온하다고. 모든 배움은 전복의 기운을 담고 있다. 아니 전복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다. 



그렇기에 저자가 지금까지 행복과 안락이라 느껴왔던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하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출간할 때까지 저자는 결코 가정에서 용서받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매년 고향에 내려가지만 부모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는다. 그녀는 어린시절과 괴팍하지만 사랑하던 사람들과, 끝내 믿을 수 없지만 한때 삶이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년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아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507)



나는 이렇게 완벽한 교육에 대한 정의를 본 적이 없다. 



......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던 부분이 있다. 저자가 숀 오빠의 폭력성에 대해 엄마한테 말하자 엄마가 공감해주는 부분이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딸인데, 내가 너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저자는 그 말이 평생 찾고 있던 말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저자의 수치심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반쯤 정신나간 사람이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목을 눌리고 잇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피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423~424) 


하지만 엄마가 채팅창에 써놓은 그 말을 읽는 순간 그녀는 한평생을 다시 살았다.  어린 시절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했고, 다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새로 쓰기를 결심할 정도로 감사했던 엄마의 그 말은 허위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묻어두었다. 엄마는 그저 딸의 바람을 충실히 반영해준 것 뿐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무지는 어떻게 악이 되는가. 약함이 어떻게 악이 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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