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좋은 책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나간 추억에만 묻혀있던 기억들을 꺼내어 다시금 되새김질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책이라면 좋은 책이라 할 수 있을까? 넘쳐나는 칭찬과 찬사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이 책은 일단 정말 잘 엮은 책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에 사대부 집안의 부모자식간의 편지왕래중에서도 아버지의 편지글만 가려 뽑았고 그 글을 쓴 10분의 선비들도 낯설지 않으니 지명도에 적절한 설득력에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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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정밀하게 따지고 살펴 묻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너희가 일찍이 따져보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지 않고, 의문이 생기지 않으므로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아무리 많이 읽은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힘쓰도록 해라. ( "유성룡의 편지"에서 )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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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많은 일 중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는 것만큼 제일로 중요한 일은 없으니 명심하고 명심해라. ( "박제가의 편지"에서 ) (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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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도 자라면서 들었을, 혹은 듣고팠던 준엄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 책에는 절절히 넘쳐난다. 소소한 장맛을 물어보는 아버지의 잔정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추는 자세에 대하여 일갈하시는 큰말씀까지 어느 것하나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 모두들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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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문득 돌아서 다른 생각을 해보기로 한다. 이 분들이 누구신가? 자식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 귀양중에도, 객지에 부임하여서도 서신왕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이 분들은 누구신가?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바라보고 우러러보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명문가들이 아니신가?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건가? 젊은날 이루지 못한 꿈을 핑계로, 혹은 꿈이라는 것조차 제대로 꾸어보지 못하고 허겁지겁 살아내며 세월과 함께 늙어오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건가? 안타깝게도 이 책의 좋은 말씀들 사이에서는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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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
며칠 전 아버지가 입원하셨다. 이십여년 전 일찌감치 어머니를 떠나보내시고 홀로되신 후 함께 살아가시는 아버지께서 입원을 하신 것이다. 지병이 있으셨고 정밀진단차 잠시 입원하신 것이기에 가족들이나 당신께서도 크게 놀라거나 걱정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원은 처음이기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평범하게 살아오시면서도 내게는 또 다른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같은 아버지기이시기에 내심 더 속이 타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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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데리고 구덕야구장으로, 혹은 부산극장으로 , 화랑대기 고교야구대회나, 이소룡,제임스 본드가 나오는 외화를 보러다니신 기억때문에 요즘엔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아내보다도 더 자주 영화를 함께 보러 다니곤 하였다. 아버지는 이십여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수 년이 흐른 뒤 그 좋아하시던 술도 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살아오셨다. 사실 세상 어디를 가도 이처럼 살아오지 않으신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버지의 편지]가 더 그리운 것이다. 다 자란 자식과 세상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글을 주고 받지는 못할 지언정 얼마나 아픈지를 살펴야 되는 요즈음의 시절이라니 안타깝고 아쉬운 시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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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나는 이 멋진, 책을 읽으며 아버지를 다시 생각한다. 내 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평범한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멋진 말씀 한 번 제대로 못 전할지라도 우리는 그 세월 속에 묻어있는 행간을 읽어내야만 할 것이라고…. 그 눈빛 속에, 그 주름살 속에 살아오신 정성들을 멋진 글로 읽어낼 줄 알아야 우리도 어느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아이들에게 정갈한 이야기 한자락 전할 수 있으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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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 겨울이 시작되는 저녁, 아버지를 찾아뵈러 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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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처럼
- 정민 교수님의 친필서명,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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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習作"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 가을에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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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 |
- 눈물로 쓴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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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낙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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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이 가까워도 문패 한 번 |
떳떳이 달아본 적 없고 앞날에의 |
깃발도 부러지고 한 쪽 날개마저 |
가난으로 잃어버린 |
바다이지만 낙엽인 너희들의 아버지 |
공납금 달라는 딸 호통으로 달래고 |
하숙비 독촉하는 아들 침묵으로 답하고 |
돌아오는 밤길 쓴 소주잔 기울이고 |
지나간 노래 부르며 가슴 속 고인 |
눈물 흩트리지만 너희들 앞에선 울 수 없는 |
강해야만 되는 사람 |
여윈 막내둥이 손목잡고 취해 잠든 |
단칸 셋방에서 줄담배 피워대도 |
해소되지 않는 갈증 |
그래 |
하숙비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고 |
공납금 한 번 제 때 마련하지 못하는 |
초라한 모습으로 너희들의 아버지는 |
밤마다 운다 |
철아,숙아,섭아 |
이제는 어미마저 못난 아비탓에 |
잃어버린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
내가 너희들에게 남길 것은 무엇인지 |
-가난의 슬픔을 배웠어요 |
숙아, |
이번 달 하숙비도 갖고 가지 못한 |
서울의 니 오빠에게서 아무런 연락없음이 더 가슴아프다 |
-자유와 정직입니다 |
아들아, |
너도 이젠 아버지의 삶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나보다 |
어린 시절 그렇게 담배를 싫어하던 네가 담배를 배우고 |
술을 마시고,사랑을 하고,…… |
-아빠,울지마 |
지금 이 작은 방에서 특별히 많은 것이라곤 |
메마른 책들뿐인 이 방에서 |
나란히 숨을 쉬며 혹은 코를 골며 |
잠들어 있는 나의 아이들아 |
아버지는 또 나가보아야 한다 |
새벽부터 나가 달빛에 취해 흔들거리며 |
들어오는 하루하루, |
너희들만으로도 행복하다 |
섭아,숙아,철아 |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
깨거든 밥 꼭 해먹고 보람된 하루 보내거라 |
그럼,갔다오마 잘 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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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
하지만 끝없이 넓은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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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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