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의 참석자들은 각자의 의도와 방법에 따라 에로스를 찬양한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 찬양은 디오티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매개로 전개된다. 이 대화를 통해 디오티마의 이야기에 설득된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도 "에로스의 일들을 높이 평가하고 남다르게 연습"할 것을 설득한다.

  파이드로스는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신이며 가장 좋은 것들의 원인이라고 한다.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를 질적으로 구분하여 범속의 에로스와 천상의 에로스가 있다고 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인간의 자산으로서의 에로스가 아닌 우주적 원리로서의 에로스를 이야기한다. 여기까지의 논의에서 에로스는 갖춘 자이며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딸꾹질로 인해 에뤽시마코스와 연설 순서가 바뀐 아리스토파네스에서부터는 이야기의 종류가 달라진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반으로 잘린 인간의 본성과 잘려진 자신의 반쪽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으로서의 에로스를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에로스는 자기 것(oikeion)을 사랑하는 것이며, 자기 것이기에 좋은 것(agathon)이 된다. 여기서 좋은 것은 자기 것 아래에 있다. 향연의 개최자인 아가톤은 에로스를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며 모든 좋은 것들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가장 아름답다는 아가톤의 이야기를 논박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에로스다. 이처럼 무엇에 대한 에로스라는 것은 그 대상을 갈구한다는 것이고, 갈구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와 나눈 대화를 전하는 형식으로 아름다움과 추함, 지혜와 무지의 중간자로서의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갖춘 자도, 못 갖춘자도 아닌 중간자이기에 좋은 것을 갈구하는 에로스는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음에 대한 것"이다. 이로써 자기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장은 논박당하고 좋은 것 아래에 자기 것이 놓인다. 좋은 것이 늘 자신에게 있기를 원하는 것은 불사(不死, athanathon)에 대한 가사자(可死者)의 욕망이며 이는 영혼에서의 출산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제 디오티마는 "에로스 관련 일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한 최고 비의(秘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이끄는 자"의 도움을 받아 개별적 몸의 아름다움에서 몸들 일반의 보편적 아름다움, 영혼들의 아름다움, 행실들과 법들의 아름다움, 앎들의 아름다움으로 "마치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올라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올라가면 "에로스 관련 일들의 끝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 즉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된다. 인간에게 가치있는 삶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이런 삶에서만, 덕의 모상들이 아니라 참된 덕을 산출하는 일이" 일어나며, "참된 덕을 산출하고 키웠을 때 비로소 신이 친애하는 자가 되는 일"과 "불사자가 되는 일이"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디오티마에게 "설득되었기에 다른 사람들도 설득하려 시도"함으로써 이를 실천하고 있다.

  에로스는 인간을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으로 이끄는 힘이다. 향연은 '좋음'과 '좋음에 대한 갈구'로서의 에로스가 어떤 관계인지 묻는 텍스트이며, 그 핵심개념은 agathon, oikeion, athanathon이다. 향연의 후반부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를 통해 배움의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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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러링>>은 제목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 앞부분에 붙어있는 "특별부록 미러링 묵상법"을 보면 "묵상은 성경을 거울로 삼아 거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과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미러링'은 이러한 '투영'을 뜻하는 말입니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실제로 '미러링'만큼 묵상의 의미를 잘 '투영'하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묵상과 거울이라는 이미지가 결합된 '미러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떠올리게 한다. <<고백록>>은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거기서 발견한 죄에 대한 고백이다. 동시에 그 죄를 용서하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찬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찬양하면 할수록 거룩함에 투영되어 드러나는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죄를 고백하면 할수록 은총의 빛에 투영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인간이 고백해야 할 죄의 본질은 무엇일까? <<고백록>>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abs te)'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얻어 참된 안식을 누리려면 '하나님 안에(in te)' 있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묵상은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하나님 밖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백록>>과 같은 묵상의 경지에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꿈을 꾼다는 것 조차도 오만한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해도 '미러링'을 통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 안에 있는지 아니면 밖에 있는지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며 "더 깊은 묵상"으로, 더 깊은 묵상으로 꾸준히 걸어들어 가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감사의 말에서 저자는 "묵상의 초라한 배설물을 엮어서 책으로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씀은 먹어도 배설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초라한 배설물"이라는 표현은 겸손의 수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 겸손에서 비롯된 <<미러링>>이 제공하는 "묵상의 조그마한 사례"들을 사랑으로 꼭꼭 씹어 먹는다면 "우리의 인격과 신앙과 삶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에 훌륭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타산지석'이 되리라 확신한다. 일단 먹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서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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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문학작품을 읽는 방법과 실용서적을 읽는 방법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시를 읽는 방법과 소설을 읽는 방법은 또 다르다. 책의 종류에 따라 그 책을 읽는 적절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서를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서는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 책이다.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를 읽듯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올바른 읽기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는 단순한 책을 넘어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읽는 방법도 일반적인 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읽는 산상수훈>>은 성서를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말 그대로 "거꾸로" 읽는 방법이다. '거꾸로 읽기'는 "일반적으로 산상수훈을 다루면서 상고하는 순서인 5, 6, 7장 순이 아니라 역으로 결론인 7장 마지막에서부터 출발하여 5장 초두의 “팔복”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 된다. 이러한 진행은 마 7:24~27을 "산상수훈 설교를 살피는 기반"으로 삼는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장 먼저 가르쳐주셨던 가르침의 핵심이 결론부인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핵심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움"으로 이는 "진리로 자신의 기초를 쌓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로 기초를 쌓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명령이 산상수훈에 담겨 있다. 그 명령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면 결국 "기뻐하고 즐거워할 성도의 진정한 복됨"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복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복과는 다른 복이다. 거꾸로 읽기는 복을 "보이지 않는 소유개념"으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자만이 그런 모습을 갖추려고 갈구하는" 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습을 갖추"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그 자체가 "진정한 복"인 것이다.

산상수훈을 거꾸로 읽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았다 해도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면 그 복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산상수훈을 거꾸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거꾸로 읽는 산상수훈>>은 산상수훈에 담긴 가르침의 표면적 의미만이 아닌 그 이면에 담겨 있는 깊은 정신, 참 뜻을 읽어 낸다. 겉과 속을 뒤집어 "거꾸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산상수훈을 거꾸로 읽어서 캐낸 각각의 구체적 가르침에 담긴 참 뜻을 거칠게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복"에 대한 이해도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왜 이러한 명령을 주셨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을 구하는 태도, 즉 '거꾸로 읽기'는 성서를 읽는 올바른 방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방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거꾸로 읽는 산상수훈>>은 성서를 올바로 읽는 방법에 관한 연습이다. 그리고 거꾸로 읽기를 연습하는 것은 단순히 성서를 읽는 방법만을 연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을 거꾸로 사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거꾸로 사는 사람이다. 지금은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때에 거꾸로 산다는 것은 말과 글을 절제함으로써 말과 글의 품격을 높이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령 남들은 모르는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뜻'을 혼자만 깨달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물론 어설픈 생각을 잡글로 끄적이고 있는 나에게 가장 먼저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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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읽는 신약성서>>는 “신약성서 및 성서의 특정 본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약성서를 “’손으로’ 읽는다 함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접어두고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한 단어 단어에 손끝을 대고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이러한 손으로 읽기는 “신약 본문의 사회정치학적인 함의”를 파악하고 “신약성서를 오늘날의 정황과 연결지”음으로써 “성서가 우리의 신앙실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주”게 한다.

신약성서의 적지않은 본문들이 무지와 오해 혹은 착각으로 인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경우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해석되고 선포되어 왔다.” 이러한 사태의 배후에는 “일선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 폄하나 불신임이 도를 지나친 경우가 있을 뿐 아니라 교회에 적대적인 신학도 한 구석에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신학과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비호의적인 무관심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천천히, 정확히” 성서를 읽는, 즉 “그것을 ‘손으로’ 읽는 것이 가장 유력한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손으로 읽기’는 성서의 구절들이 “전체적인 맥락 안에 놓여 있고, 따라서 이 맥락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오용, 남용, 악용은 “문맥을 떠난 단장취의(斷章取義)”와 “개역 성서의 모호한 번역”이 무지와 착각, 또는 욕심에서 비롯된 편견과 선입관을 만날 때 발생한다. 편견과 선입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성서 구절들의 전후 문맥을 살피는 것과 더불어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및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은 “’폭력의 만세반석’ 위에 터를 잡고 지중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룬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에 포함된 “죄로부터의 구원”은 “일견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지만, 1세기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이러한 말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 역시 띠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 또한 “단지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치학적인 함의를 띨 수밖에 없는 결단”이었다.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와 오늘날을 비교했을 때 폭력의 주체가 로마제국에서 탐욕적 자본으로 바뀌었을 뿐 힘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억압적 구조는 변하지 않고 있다. 성서의 말씀들은 “어떤 교리적 세부지침을 주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시대의 청중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서적 조망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적 삶을 살고자 하는 신앙인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성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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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오늘날 한국에서 교양인이 되려면 “스스로 방법을 터득하여 인문학을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교양의 기초라 할 인문학 고전은 “일종의 통합교과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것을 읽으려면 … 통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인문학 고전읽기와 글쓰기를 통한 ‘통합적 인문학 공부 방법’을 가르쳐준다.

인문학이 대학 교양과목이긴 하나 이미 “비즈니스맨 트레이닝 센터”로 변질된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은 그저 애물단지일뿐이다. 그러나 인문학 몇 과목 수강한다고 교양이 쌓이는 것도 아니니 교양을 습득하는 일이 어렵게 된 책임을 대학에만 떠넘길 수도 없다. 이래저래 인문학을 가까이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교양을 쌓고자 한다면 평생에 걸쳐 “책을 읽고 정리하고 글을 써야”한다.

책, 그중에서도 인문학 고전이라 알려진 책들은 “오늘날의 학문분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문학 고전을 공부하려면 문학, 역사, 철학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까지 포함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이 책에서 다루는 고전 중 하나인 플라톤의 《국가》의 경우 정치학, 형이상학, 교육학 등에 걸친 다양한 주제를 두루 다루고 있다. 또한 이를 읽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고 전쟁에 대해서도 알아야한다. “말 그대로 통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처럼 통합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고전읽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저자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한 다음 전체를 통독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짐작해 보면서 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다음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와 저자의 “독특한 표현과 비유들”을 찾아보면서 내용을 파악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소리내서 읽어 보고 그 문장을 베껴쓰거나 다시 써보면서 책을 내것으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파악한 핵심을 추려내 A4 한 장 정도 분량으로 쓴다.

인문학 공부는 고전을 읽고 정리하고 글로 쓰는 통합적 훈련이다. 여기에는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지속적으로 해나가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배우고 싶어도 마땅히 배울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는 것이 CEO 출신 실용주의자와 속칭 ‘강부자’ 집단이 지배하는 한국의 현실이다. 미련스러워 보이더라도 혼자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막막한 길찾기에 나침반이 필요하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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