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보르트(지음), 한석환(옮김), 《철학자 플라톤》, 이학사, 2003.

4. 왜 대화편인가?
5. 정의에서 이데아로
6. 좋음의 이데아의 여러 문제


플라톤은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를 철학의 본질인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 이끈다.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대화는 특정한 덕에 대한 정의를 묻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덕의 판별 기준이 되는 이데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논의는 아포리아 상태로 끝나지만, 플라톤은 이데아를 어떤 것이 지금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원인, 나아가 세계 전체의 원인으로 상정한다.

플라톤은 《변론》을 제외한 모든 저작을 대화 형식으로 썼다. 대화 형식으로 초기 저작 활동을 시작한 것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워 익힌 철학하는 형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중기 대화편에서는 시, 특히 고전 희극의 문학 요소를 원용하면서 대화 형식을 계속해 나간다. 대화 형식은 플라톤이 대화 참여자로 하여금 말하게 했던 내용과 플라톤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어떤 특정한 철학 사상으로 묶어두기가 어렵다. 플라톤이 생각한 철학은 가르침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철학의 본질은 끊임없이 진리와 앎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플라톤은 진리와 앎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묘사한다. 동시에 그 대화를 통해 독자를 진리 추구의 과정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초기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는 특정한 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예컨대 《에우티프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를 고소하려는 자신의 행위가 경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에우티프론과 대화를 나눈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의 정의, 즉 경건이라는 술어의 내포에 대해 묻는다. 에우티프론은 경건한 것 중 하나, 즉 술어의 외연에 속하는 한 가지 예를 대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내포와 외연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데아를 도입한다. 이데아는 어떤 행위가 경건한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때 비춰보아야 할 원형, 또는 본보기이다. 초기 대화편에서 이 이데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에 아포리아, 즉 궁지에 빠진 논변 상태에서 느닷없이 대화가 중단된 채로 끝난다.

대화에서 정의를 내리려는 대상인 덕은 최선의 상태, 좋은 상태를 말한다. 좋은 상태가 무엇인지 알려면 좋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좋음은 욕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욕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욕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견해가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려면 척도와 기준이 필요하다. 그 척도와 기준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 속에 들어있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한다. 볼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영역에서 태양에 해당하는 것이 사고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의 이데아이다. 선분의 비유에서는 경험 세계를 이데아의 사본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데아는 경험 세계에 대하여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 이데아는 관조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관조는 능동적으로 강제할 수 없으나 학문과 철학에 몰두하여 연습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일어난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앎을 진리 추구의 목표로 삼았다. 이데아의 존재와 인식에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작 문제는 인간 인식의 유한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말하게 했듯이 철학이라는 '차선의 항해'에 몰두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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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자신이 쓰는 단어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항상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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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슬프도다! 판단해야 할 사람이 잘못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판단하는 사람', 곧 권력을 가진 자의 어리석은 판단은 개인과 가족,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몰고 온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이를 경고한다.

"이제는 내가 고인들의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왕좌와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소이다." 크레온은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이게 내 뜻이오. 내가 올바른 사람들보다 사악한 자를 더 존중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오." 권력을 손에 넣은 크레온은 누가 "올바른 사람"이고 누가 "사악한 자"인지 자신이 판단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크레온이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 한 인간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크레온은 어떤 인간인가? 이제 크레온이 자신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아야 할 차례다.

크레온은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자마자 죽은 폴리네이케스를 땅에 묻지 못하도록 시신 매장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다. 얼마 후 파수꾼이 와서 누군가 몰래 시신을 매장했다고 보고한다. 코로스장은 크레온에게 암시를 준다. "왕이시여, 이번 일은 신께서 하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떠오르는군요." 크레온은 무시한다. "입 좀 닥치시오, 그대의 말에 내가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다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충고한다. "그대는 죽은 자에게 양보하시오. 죽은 자를 찌르지 마시오. 죽은 자를 죽이는 것이 무슨 용기가 되겠소?" 크레온은 예언자의 충고도 듣지 않는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했다가 붙잡힌 안티고네는 죽은 자의 시신을 방치하는 것은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이렇게 크레온은 자신의 포고령, 즉 입법으로 검증을 받는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어둠 속을 은밀히 떠돌고 있"는 소문을 아버지에게 전한다.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죄 없는 그녀가 가장 영광스런 행위 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다니!" 폴리스 시민들의 여론을 전해 들은 크레온은 오히려 아들을 조롱한다. "못난 녀석! 한낱 계집에게 굴복하다니!" 그러나 "한낱 계집"인 안티고네는 폴리스의 시민들이 보기에 "가장 죄 없는 그녀"이며, 그가 포고령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행위는 "가장 영광스런 행위"이다. 코로스는 처벌받으러 끌려가는 안티고네에게 위로와 찬사를 보낸다. "그대는 영광스럽게 칭찬받으며 사자들의 깊숙한 처소로 내려가는 것이오. [....] 살아서, 그리고 나중에 죽어서 신과 같은 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은 죽은 여인에게는 큰 영광이 되겠지요." 크레온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우리는 법질서를 옹호해야 하고, 결코 한낱 계집에게 져서는 안 된다." 이번에 크레온은 통치로 검증을 받는다. 그리고 크레온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이 드러난다.

크레온은 입법과 통치에서 왜 그런 잘못된 판단을 했을까.

크레온  그녀가 범법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테바이 백성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크레온  (코로스장에게) 보아하니, 이 애는 여자들 편인 것 같소이다.

자신들 각자가 모두 폴리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에게 크레온의 생각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재앙을 겪고 나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시인하고 후회한다. "아아! 분별없는 생각의 가혹하고도 치명적인 실수여! [....] 네 어리석음이 아니라 내 어리석음 때문에." 마지막으로 코로스가 노래한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 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크레온은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신들에게 오만했고, 안티고네를 지지하는 여론을 무시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오만했다. 판단해야 할 사람이 잘못 판단한다는 것, 그것은 오만함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오만하다는 것은 모두에게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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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무엇을 남겼을까. 《그들의 새마을운동》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새마을운동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대 농촌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도시로 유입되어 갔다. (....) 청년들이 사라진 농촌,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생력을 상실한 농촌, 자본주의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실패한 농촌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새마을운동이 고조되던 1970년대였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가 후한 이유는 어째서일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어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달랐다. 슬레이트 지붕과 반듯하고 폭이 넓은 잘 닦인 길, 전기와 텔레비전.

"이 작은 활동사진 박스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포항제철, 시원하게 뻗은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변화된 팔도강산의 모습이 차례로 보였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자랑스러운 조국 근대화의 주역임을 뿌듯한 시선으로 만끽하고 있다."

자부심으로 꽉찬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아침저녁으로 마을 앰프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일손을 멈추고 국가와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새마을운동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바로 근대 주체의 생산일 것이다."

이러한 "근대 주체"들 중에서도 "국가를 매개로 마을공동체를 움직일 수 있었"던 "마을 내의 작은 국가권력"인 청년 주체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마을 엘리트들은 농촌 근대화의 주창자이면서 또한 박정희 정권의 지지자가 되어갔다.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시기 지도자나 마을이장 역임자들은 그들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박정희 정부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사람들, 그 슬하에서 달콤한 열매를 따먹으며 자란 사람들, '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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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맥페이그 지음, 장윤재 장양미 옮김, ≪풍성한 생명≫,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이 책의 부제는 "지구의 위기 앞에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다. 신학과 경제를 함께 생각하는 이유는 자연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함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신학을 서술함으로써 "지구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고 인류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다른 방식의 풍요로운 삶을(...)강구하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균형하게 이득을 취하는 지구적 상황을 창출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생산하고 유통하고 유혹하는 '소비지향적 삶의 방식'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자연자원의 급격한 감소와 생물종의 멸종, 기후 변화 등 지구를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그리스도인들 역시 안전할 수 없으며,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지구의 위기에 책임을 져야하는가. "우리의 삶의 방식, 즉 일상적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고도의 소비적 생활양식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활양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크게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요, 대체할 수 없는 지구 생명 시스템의 해체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르게 살아야 하며, 또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전체 사물 체계 안에서 누구인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소비자로, "특히 소비적인 '풍요로운 삶'에서 오는 행복할 권리를 타고난 개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연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지구 위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특히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의 존재근거로 삼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의 목적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분배정의와 지속가능성이라는 매우 현세적인 원리"에 입각한 방식으로 "서로와 세계를 사랑함으로써 그 형상으로 더 충만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달달한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입맛을 건강한 자연의 소박한 입맛으로 바꾸려면 얼마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익숙한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다른 방식의 풍요로운 삶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제약과 희생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제자됨의 형태로, 그리고 희생하고 짐을 나누는 십자가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0:10)라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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