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문학작품을 읽는 방법과 실용서적을 읽는 방법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시를 읽는 방법과 소설을 읽는 방법은 또 다르다. 책의 종류에 따라 그 책을 읽는 적절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서를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서는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 책이다.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를 읽듯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올바른 읽기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는 단순한 책을 넘어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읽는 방법도 일반적인 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읽는 산상수훈>>은 성서를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말 그대로 "거꾸로" 읽는 방법이다. '거꾸로 읽기'는 "일반적으로 산상수훈을 다루면서 상고하는 순서인 5, 6, 7장 순이 아니라 역으로 결론인 7장 마지막에서부터 출발하여 5장 초두의 “팔복”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 된다. 이러한 진행은 마 7:24~27을 "산상수훈 설교를 살피는 기반"으로 삼는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장 먼저 가르쳐주셨던 가르침의 핵심이 결론부인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핵심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움"으로 이는 "진리로 자신의 기초를 쌓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로 기초를 쌓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명령이 산상수훈에 담겨 있다. 그 명령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면 결국 "기뻐하고 즐거워할 성도의 진정한 복됨"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복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복과는 다른 복이다. 거꾸로 읽기는 복을 "보이지 않는 소유개념"으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자만이 그런 모습을 갖추려고 갈구하는" 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습을 갖추"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그 자체가 "진정한 복"인 것이다.

산상수훈을 거꾸로 읽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았다 해도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면 그 복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산상수훈을 거꾸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거꾸로 읽는 산상수훈>>은 산상수훈에 담긴 가르침의 표면적 의미만이 아닌 그 이면에 담겨 있는 깊은 정신, 참 뜻을 읽어 낸다. 겉과 속을 뒤집어 "거꾸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산상수훈을 거꾸로 읽어서 캐낸 각각의 구체적 가르침에 담긴 참 뜻을 거칠게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복"에 대한 이해도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왜 이러한 명령을 주셨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을 구하는 태도, 즉 '거꾸로 읽기'는 성서를 읽는 올바른 방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방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거꾸로 읽는 산상수훈>>은 성서를 올바로 읽는 방법에 관한 연습이다. 그리고 거꾸로 읽기를 연습하는 것은 단순히 성서를 읽는 방법만을 연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을 거꾸로 사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거꾸로 사는 사람이다. 지금은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때에 거꾸로 산다는 것은 말과 글을 절제함으로써 말과 글의 품격을 높이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령 남들은 모르는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뜻'을 혼자만 깨달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물론 어설픈 생각을 잡글로 끄적이고 있는 나에게 가장 먼저 해당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