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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實踐哲學의 基本的 問題 設定 構圖는 人間의 存在와 行爲를 規定하는 두 側面인 自然과 自由의 結合에 있다. 自然과 自由의 結合에 있어서 核心的 槪念은 ‘目的’이며, 이 目的이 形式的 實踐原理에 더해져 實質的 實踐原理가 形成된다. 實質的 實踐原理의 目標는 倫理的 德과 現實的 幸福을 結合한 最高善으로, 이는 人間이 社會的 存在로 轉化함으로써만 實現 可能하다.

自然에서 벌어지는 事態는 반드시 先行하는 原因을 가진다. 그러나 人間의 行爲는 어느 한 地點에서 原因을 自己 自身에게 돌려야 한다. 이렇게 自身의 行爲에 대해 責任지는 態度를 歸責性이라 하는데, 人間의 行爲는 自由라는 絶對的 自發性의 領域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歸責性을 갖게 된다. 칸트는 人間을 自然의 次元에서는 生命體이면서 同時에 理性的 存在者로, 自由의 次元에서는 理性的이면서 同時에 歸責性을 自覺하는 存在者로 보았다. 그리고 世界를 自然科學으로 探究할 수 있는 感覺的 世界와 絶對的 自發性으로서의 自由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知性的 世界로 區分했다. 이처럼 人間은 自然的 次元과 自由의 次元, 感覺的 世界와 知性的 世界를 同時에 살아가는 存在다. 여기서 自然과 自由의 어긋남을 調和시키는 問題가 登場한다.

理性的 存在者로서의 人間은 技倆과 手段으로 條件的 좋음을 만들고, 歸責性을 自覺하는 人間은 智慧의 能力으로 道德的 決斷을 통해 絶對的 좋음을 만든다. 그런데 칸트의 認識理論에 따르면 人間은 絶對的인 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絶對的 좋음을 ‘要請’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絶對的 좋음을 어떻게 實現할 것인가? 知性的 世界에서 作動하는 形式的 實踐原理는 絶對的 좋음을 만드는 倫理的 德에 관한 原則이다. 形式的 實踐原理로 倫理性은 確保할 수 있어도 倫理的 行爲에 따르는 現實的 充足感, 즉 幸福은 얻을 수 없다. 現實的 幸福을 얻으려면 形式的 實踐原理에 ‘目的을 찾는 힘’이 덧붙여져야 한다. 目的을 이루기 위해서 人間은 自由라는 絶對的 自發性으로 自然的 性向을 克服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自然과 自由가 調和를 이루기 始作한다.

形式的 實踐原理에 目的을 찾는 힘이 더해져 實質的 實踐原理가 形成된다. 實質的 實踐原理의 目標는 倫理的 德과 現實的 幸福이 結合한 最高善이며, 最高善은 人間이 社會的 存在임을 前提할 때에만 意味 있는 槪念이다. 칸트에 따르면 “最高의 倫理的 善은 個個 人格이 그 自身의 道德的 完全性을 위하여 努力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最高善은 共同體的 善이며, 目的 또한 共同體的 目的이다. 칸트는 人間을 社會的 次元으로 끌어올렸다. 人間이 自己意識을 가진 存在로서 他者意識을 所有하면 社會的 意識이 形成된다. 이렇게 人間의 삶이 構造的으로 轉換되면 새로운 倫理가 要求되며, 그 過程에서 形成되는 社會的 交流는 人間에게 歸責性을 要求한다. 칸트는 歸責 能力이 없는 存在者를 ‘物件’이라고 불렀다. 社會的 存在者만이 人格性을 갖는다.

칸트의 實踐哲學에 있어서 最高善을 目標로 하는 實質的 實踐原理는 形式的 實踐原理에 目的을 찾는 힘이 더해짐으로써 形成되거니와 이때의 目的은 社會的 次元의 目的이다. 目的을 찾는 힘, 그리고 그것을 社會的 次元에서 考慮한다는 것이 칸트가 남긴 重要한 成果다. 目的을 認識하는 實踐理性은 칸트에 있어서는 理性의 思辨的 使用이라 할 수 있는데, 헤겔에 이르면 思辨은 積極的으로 思惟하는 態度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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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認識理論은 現象을 만들어내는 直觀의 活動과 그 現象을 悟性의 形式으로 分析하여 對象認識으로 만들어내는 思惟의 事後的 活動으로 이루어진 構成說的 認識理論이다. 認識을 可能하게 하는 直觀의 形式인 時間과 空間, 悟性의 形式인 範疇는 內在的이면서 超越的이다. 認識의 先天的 合理性을 想定함으로써 限界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칸트는 이로써 科學을 救出하고자 하였다.

外部의 對象으로부터 感覺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感覺器官의 作用을 直觀이라 한다. 直觀은 單純하고 受動的인 活動이다. 이 直觀하는 能力을 感性이라 하며 直觀 活動을 통해 感性이 받아들인 것을 現象이라 한다. 直觀이 現象을 받아들일 때 空間과 時間이라는 直觀의 形式이 介入한다. 이렇게 해서 現象이 만들어지면 思惟가 悟性의 形式, 즉 範疇를 가지고 그 現象을 分析하여 對象認識을 만든다. 다시 말해 對象認識이란 直觀이 受動的으로 받아들여서 만들어낸 現象을 材料로 使用하여 範疇라는 悟性의 形式을 통해 思惟가 事後的 活動으로 構成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認識理論을 構成說的 認識理論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對象認識은 思惟 外部에 있는 本來의 對象과 合致하지 않는다. 칸트의 認識理論에 따르면 人間의 認識은 여기까지이며 對象의 本質인 物自體는 알 수 없다.

칸트 認識理論의 重要性은 認識이 簡單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思惟의 積極的 活動으로 構成해내는 側面이 있음과 그렇다 해도 人間은 對象의 本質은 결코 알 수 없음을 確證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함께 空間과 時間이라는 直觀의 形式과 範疇라는 悟性의 形式은 人間에게 先天的으로 內在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形式을 使用하면 物自體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共通의 認識은 만들어낼 수 있다. 이 形式은 經驗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經驗을 넘어선다는 意味에서 經驗 超越的이다. 이처럼 칸트는 人間 認識의 共通性을 確保하기 위해 內在的이면서 超越的인 直觀의 形式과 悟性의 形式을 想定하였다. 變化하는 對象을 一貫性 있게 把握하려면 不變의 基準이 必要한데 칸트는 그것을 人間 안에 둔 것이다. 이는 人間이 合理的 存在임 前提하는 칸트의 合理主義的 偏見이다.

理性은 部分的이면서 同時에 普遍的이다. 部分的인 理性이 普遍性을 確保하기 위해서는 不變의 基準이 必要했고, 칸트는 그 不變의 基準을 認識의 先天的 合理性에서 구했다. 그러나 先天的 合理性을 想定했을 뿐 證明하지는 않았다. 人間의 行爲는 複合的이다. 認識도 하나의 複合的 行爲로서 몇 가지 圖式으로 規定되지 않는다. 合理的 說明이 不可能한 事態가 있음에도 普遍性을 追求해야 하는 理由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왜 이러한 構圖를 設定했는가. 칸트를 ‘獨斷의 잠'에서 깨운 흄의 懷疑論은 經驗世界에서 確實性을 모두 除去해 버렸다. 이러한 狀況에서 뉴턴 物理學의 追從者였던 칸트는 最小限의 '通約可能性'을 確保함으로써 科學을 救出하기 위해 自身의 認識理論을 定立했다. 그러나 不變의 基準을 人間 內部에 想定함으로써 發生한 問題는 道德的 實踐의 問題에서도 계속 直面한다.

뉴턴 物理學의 追從者였던 칸트는 흄의 懷疑主義에 맞서 科學的 確實性을 確保하기 위해 人間 認識 主觀의 先天的 合理性에 根據한 構成說的 認識理論을 定立하였다. 18世紀 유럽의 複雜하고 混亂한 狀況 속에서 칸트의 哲學은 近代 哲學이 다다를 수 있는 最善의, 最適의 立場을 보여주었다. 그의 限界가 直面한 問題들은 道德的 實踐을 다루는 實踐哲學의 問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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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人間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는 意味에서 普遍的이지만 同時에 誤謬 可能性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存在라는 側面에서 人間의 理性인 ‘普遍的 人間 理性'을 提示하였다. 普遍的 人間 理性이라는 有限者의 制約性을 克服하는 過程이 칸트가 定義한 '啓蒙'이다. 칸트의 啓蒙哲學은 有限者는 無限者에 이를 수 없음을 承認함으로써 限界를 明瞭하게 設定한 'kritik'의 哲學이다.

칸트는 “啓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答辯"에서 '普遍的 人間 理性'이라는 槪念을 내놓았다. '普遍的 理性'은 人間이 共通的으로 所有한 理性이라는 意味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眞理의 擔持體라는 前提가 있다. 그런데 人間은 有限한 存在이기 때문에 '人間 理性'이란 完全한 理性이 아니라 部分的인 理性이며, 誤謬와 偏見에 빠질 수 있는, 利害關係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는 理性이다. 따라서 '普遍的 人間 理性'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理性이지만 完全하고 絶對的인 神的 理性이 아니라 誤謬 可能性을 가진 人間의 理性이다. 다른 한편으로 人間이 誤謬 可能性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도 全的으로 誤謬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總體的 誤謬 不可能性을 함께 이야기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普遍的 人間 理性을 提示한 後 그 特徵인 誤謬와 偏見에서 벗어날 方法을 摸索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人間이 誤謬와 偏見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의 立場에 서 봄으로써 認識의 範圍를 넓혀야 한다. 對話와 討論으로 誤謬와 偏見을 除去해 나가고 個別的인 利害關係의 束縛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啓蒙의 過程이다. "啓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答辯"은 啓蒙을 未成熟한 狀態에서 벗어나는 것, 自身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 偏見이나 迷信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定義하였다. 즉, 啓蒙은 偏見에 뒤덮인 理性의 어두운 部分을 밝힘으로써 참다운 普遍的 理性에 '接近'해 나가는 것이다. '接近'은 칸트 哲學을 規定하는 重要한 述語로서 人間은 無限者에 接近할 수 있을 뿐이다. 無限者에 到達할 수 있다는 생각은 '理性의 超越的 使用'이다. 無限者라는 理念은 方向을 設定하고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統制할 뿐이다. 칸트는 理性의 超越的 使用을 否定하고 統制的 使用을 促求하였다.

理性의 統制的 使用은 다른 見解와 認識 論理에 愼重하고 寬大하며, 反對되는 立場에도 眞理의 조각이 있음을 認定하고, 自身의 誤謬를 솔직하게 밝히는 啓蒙哲學의 態度를 보여준다. 이러한 態度를 'kritik'이라고 한다. kritik은 一次的인 意味에서 '批判'이지만 칸트에 있어서는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라고 境界線을 分明하게 긋는 謙遜한 態度를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人間의 有限性을 認定하면서도 神의 變形態로서 人間은 部分的으로 神이라고 했고, 헤겔은 理性을 超越的으로 使用함으로써 無限者를 알 수 있고 無限者의 立場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無限者의 立場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絶對的 眞理의 擔持者가 된다는 것이며, 나는 眞理이고 너는 非眞理라는 黨派性의 立場에 서는 것이다. 칸트와는 完全히 다른 態度다. 有限者와 無限者의 問題는 哲學的 態度를 決定하는 重要한 要素이다.

칸트의 啓蒙哲學은 神的 理性에 接近할 수 있을 뿐 到達할 수는 없음을 分明히 한다는 점에서 有限者의 立場에 充實한 謙遜하고 敬虔한 哲學이다. 有限者의 立場에서 서서 人間은 누구나 옳을 可能性이 있고, 누구나 틀릴 可能性도 있음을 認定하는 啓蒙哲學的 立場은 民主主義의 가장 重要한 哲學的 土臺이다. 이러한 哲學的 態度는 칸트의 認識 理論과 關聯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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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의 一元的 支配가 不可能해진 南宋 時代에 中央權力과 地方權力의 分離가 不可避해진 狀況에서 地方의 鄕里 空間이 생겨나고 이를 基盤으로 自生的 文化 階層을 形成하며 새로운 社會秩序를 構想한 士大夫들이 登場하였다. 이들이 펼친 南宋道學運動은 天의 意味를 새롭게 規定함으로써 學問의 目標와 內容을 再定義하고 國家의 統治 方式에 있어서 地方分權的 形態로의 轉換을 이끌어냈다. 이 過程에서 核心的 役割을 했던 이는 朱熹로서 그는 儒敎의 經典을 四書五經 體制로 確立하고 自身을 包含한 道統을 整理하였거니와 이로써 朱子學은 體制敎學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小農과 家內手工業 中心의 自給自足的 經濟活動이 經濟的 基盤을 이룬 南宋 時代는 皇帝의 一元的 支配가 貫徹되지 않았던 時期이다. 이에 따라 中央權力과 地方權力이 對立하기 始作하였고, 地方에는 皇帝의 權力이 미치지 못하는 빈 空間인 鄕里 空間이 發生하였다. 이러한 狀況은 鄕里 空間을 規律할 새로운 社會秩序와 이를 뒷받침할 理論的 根據를 마련해야함을 意味하는 것이었다. 이를 遂行한 이들이 南宋道學運動의 士大夫들이었다. 士大夫는 科擧 合格을 통해 獲得한 自信感과 一體感을 바탕으로 形成된 새로운 文化的 階層이었다. 血統과 身分 世襲에서 벗어났던 士大夫는 中央權力과 連結되어 있던 貴族들과 對立關係를 形成했다. 初期 士大夫는 科擧 合格을 目標로 삼았으나 南宋道學運動이 本格化되면서 中央權力과의 關係를 끊고 科擧와는 無關하게 學問 속에서 孔子의 道를 攄得하여 生活에서 實踐하는 것을 새로운 目標로 삼았다. 이와 함께 書院을 設立하여 鄕里 空間을 掌握하는 據點으로 삼았다. 科擧 合格을 目的으로 하지 않는 學校인 書院은 聖賢을 崇拜하고 書籍을 出版하며 講義, 學習, 討論이 이루어지는, 그 自體로 完結된 空間이었다.

書院을 據點으로 本格化된 南宋道學運動은 天을 形而上學的 實體로 規定하였다. 天은 모든 規範의 眞正한 根據로, 歷史的으로 傳承된 文化와는 獨立的으로 存在한다. 이러한 생각은 올바른 삶의 規範은 社會生活을 하는 가운데 習得된다고 본 新法의 王安石이나 蜀學의 蘇東波와 對立하는 主張이었다. 社會 現實 속에서 傳承된 社會的 規範은 삶의 窮極的 規範이 될 수 없다고 主張한 道學의 思想은 自然스럽게 脫歷史的 內省哲學으로 자리 잡는다. 이처럼 변함없이 지켜야 할 하늘의 理致가 있고 그 理致를 깨달아 內面의 德을 쌓는 것이 重要하다고 생각한 道學者들은 學問의 目標와 內容을 새롭게 定義하였다. 南宋 以前까지는 傳承된 文化 傳統을 골고루 工夫하는 것이 學問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內面의 德을 重視한 道學者들에게 詩와 賦를 짓는 것은 學問이 아니었다. 이들은 倫理와 道德을 重視하는 學問 世界를 構築하였다. 이에 따라 中央政府의 官僚가 되어 出世하는 것이 아니라 地域社會에서 倫理的 德行을 쌓는 것이 學問의 重要한 目標가 되었고, 皇帝에 의한 中央集權的 支配보다는 德을 쌓은 선비에 의한 地方分權的 支配를 훌륭한 統治로 여기게 되었다.

鄕里 空間에서 實踐할 學問 世界를 構築하고 政策 代案까지 마련하는 過程을 主導한 人物은 朱熹였다. 印刷 出版의 重要性을 認識했던 朱熹는 四書(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編纂하여 儒敎의 經典을 四書五經體制로 改編하였다. 孟子는 古典에 該當하지 않았으나 朱熹가 發掘하여 四書로 採擇하였다. 또한 四書五經의 入門過程에 該當하는 小學과 近思錄을 編纂하여 朱子學의 敎科 體系를 完備하였다. 朱子學의 核心은 修己治人이다. 그 밑에는 三綱領(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八條目(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이 들어있다. ‘百姓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은 원래 ‘百姓을 가까이 한다’는 뜻의 親民이었는데, 나를 닦아서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修己治人에 根據하여 親民을 新民으로 解釋함으로써 士大夫의 統治意識을 反映하였다. 齊家에서 家는 家門으로, 많은 分家를 거느린 一族을 가리키는 槪念이며, 이들이 鄕里 空間을 이룬 勢力이었다. 經典을 完備한 朱熹는 孔子로부터 始作하여 自身에 이르는 儒家 思想의 系譜를 整理하여 道統을 確立하였다. 周公과 孔子의 道를 가리키던 儒敎가 朱子의 影響으로 孔子와 孟子의 道가 되었다.

變化하는 時代가 直面한 問題와 全面的인 對決을 펼쳤던 南宋道學運動은 鄕里 空間을 中心으로 地方分權的 體制를 構築하고 修己治人을 核心으로 하는 思想的 根據를 完備하였다. 南宋道學運動의 展開 過程은 現在 우리가 처해 있는 狀況과 그것을 肯定的인 意味에서 規律할 수 있는 社會 秩序,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理論的 根據를 마련하는 일이 統合的, 持續的으로 이루어져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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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明理學의 成立 背景에는 儒敎의 體制敎學化에서 三敎一致論의 登場까지의 過程이 있다. 三敎一致論의 登場은 後漢 末期에 提起된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問題에 儒敎가 適切히 對應하지 못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儒敎, 道敎, 佛敎 사이의 思想的 混合이 일어나 中國 文化의 基盤을 이루는 思想으로 자리 잡았다.

儒敎가 體制敎學으로 자리 잡는 過程은 대략 네 段階로 나눌 수 있다. 紀元前 180年에서 紀元前 87年까지는 萌芽 段階로 約 100年 程度 所要되었다. 漢 帝國이 成立하고 禮制의 必要性이 擡頭하면서 儒家가 官吏로 登用되기 始作하였고, 이에 따라 現實 制度를 뒷받침하는 텍스트로서 五經이 整理되기 始作하였다. 紀元前 87年에서 紀元前 33年까지는 發展 段階로 儒家가 本格的으로 政界에 進出하는 시기였다. 紀元前 33年에서 紀元後 23年까지는 完成 段階에 該當한다. 理論的 側面에서 五經을 中心으로 텍스트가 完備되었고 實踐的 側面에서 儒敎的 宗廟制가 確立되었으며 모든 官吏는 儒家 出身만 選拔되었다. 儒敎는 體制敎學으로 完全히 자리를 잡고 儒敎一尊體制로 들어갔다. 그러다 後漢 以後로 넘어오면서 儒敎는 沒落의 段階를 걷는다. 儒敎一尊體制는 무너지고 隋, 唐 時代에는 道敎와 佛敎가 盛行하였다.

後漢 末期 混亂스러워진 社會에서 사람들은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要求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儒敎一尊體制가 持續되는 가운데 內部 學派 間 對立을 겪고 있던 儒敎는 여전히 制度와 形式만을 重視하며 社會的 要求에 副應하지 못하고 있었고, 結局에는 衰退하게 되었다. 이처럼 儒敎가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探究를 疏忽히 하고 있을 때 道敎와 佛敎가 사람들의 內面으로 浸透하였다. 儒敎一尊體制가 무너짐에 따라 儒, 佛, 道 三敎는 서로 對立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相對의 思想과 敎理를 參照하고 吸收하면서 새로운 思想 體系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 結果 三敎는 巨大한 眞理 體系의 一部를 各各 드러내고 있다는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게 되었다. 三敎一致論은 土着化 段界에 들어선 佛敎 및 儒敎와 道敎의 思想이 서로 一定 部分 結合함으로써 發生하였다. 思想의 結合을 통해 現實 世界의 變化에 對處하였던 것이다.

서로 다른 思想의 結合은 佛敎에서 먼저 일어났다. 隋, 唐 時代의 佛敎는 格義佛敎로서 佛敎와 道敎가 結合된 形態였다. 格義佛敎는 純粹한 意味에서의 印度 佛敎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산스크리트 語로 어루어진 印度 佛敎가 漢字로 飜譯되는 過程에서 老莊思想의 槪念들을 使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外部에서 들어온 思想을 中國式으로 理解하려는 努力이며, 이를 통해 土着化가 이루어졌다.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게 된 背景에는 이러한 過程들이 자리 잡고 있다. 外部에서 傳播된 佛敎는 固有한 思想인 儒敎와 道敎의 槪念을 借用하였고, 道敎는 理論的 土臺를 갖추기 위해 儒敎와 佛敎의 敎理를 가져왔으며, 儒敎는 人間과 宇宙의 窮極的 原理를 說明하기 위해 道敎와 佛敎를 參照하였다. 이처럼 各各의 長點과 短點이 드러남으로써 이를 補完하기 위한 交叉 參照가 일어나는 過程은 混合的 文化가 中國 思想의 밑바탕에 자리 잡는 結果로 이어졌다.

漢 帝國 時期 體制敎學으로 자리 잡았던 儒敎는 後漢 末期에 堤起된 內面性의 問題에 適切히 對應하지 못함으로써 體制敎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三敎一致論이라는 새로운 思想이 登場하였다. 새로운 思想은 社會의 混亂에 따른 構成員의 集團的 要求에 의해 登場하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오랜 時間이 所要된다. 儒敎의 體制敎學化에서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기까지 約 200年 동안 展開된 事態는 宋明理學이라는 또다른 思想이 成立하는 背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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