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 내전을 분석하면서 "전쟁은 난폭한 교사"라고 정의한다. 전쟁은 기존의 도덕과 질서를 파괴하고 가치 판단을 뒤바꾸며, 그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무감각한 일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의 분석에 따르면 헬라스 세계 전체를 극단적인 잔혹함으로 몰아넣은 "이 모든 악의 근원은 탐욕과 야심에서 비롯된 권력욕"이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가들은 그럴듯한 정치 구호를 내세우며 "말로는 공공의 이익에 봉사한다면서도 사실 공공의 이익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그들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며 극단적인 잔혹 행위를 일삼았으며 정의나 국익을 무시하고" 불법과 폭력을 저질렀다. "수치스러운 행위를 미사여구로 정당화할 수 있는 자들"이 더높은 명망을 차지하였으며, "고상한 성품의 특징인 순박함은 조롱거리가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적대적인 이념에 의해 두 진영으로 나뉜 사람들은 서로 불신하며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만을 행동 기준으로 삼고 반대파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더 잔인하게 상대방에게 보복했다. 도덕적 타락을 가져온 내란이 파괴적인 이기심을 자극하자 더 이상 "말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말을 믿을 수 없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내란을 겪으면서 "통상적으로 쓰던 말의 뜻을 임의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신중함과 절제는 비겁한 자의 핑계와 남자답지 못함을 뜻하게 되었고, 만용과 충동적 열의가 충성심과 남자다움의 징표로 간주되었으며, "등 뒤에서 적에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통상적인 말의 뜻이 변했다는 것은 가치가 전도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사람들은 보복을 경건보다, 이익을 정의보다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전쟁 상태가 지속되면서 "일상생활이 혼란에 빠지고 법이 구속력을 잃자, 그러잖아도 법을 어기기를 좋아하는 인간 본성은 자신이 정념을 억제할 수 없으며, 정의를 경멸하며, 무엇이든 더 우월한 것에 대항한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법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케르퀴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케르퀴라인들은 자신들이 적으로 간주한 시민들을 계속 학살했다. 희생자들에게는 민주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그러나 더러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죽었고, 더러는 빚을 준 까닭에 채무자의 손에 죽기도 했다. 죽음은 온갖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러한 상황에서 있을 법한 모든 일이, 아니 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어서 투퀴디데스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한다. "이런 내란은 헬라스의 도시들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이런 고통은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잔혹함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주어진 여건에 따라 양상이 달라져도 되풀이 되고 있으며 언제나 되풀이 될 것이다." 전쟁과 그 고통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되풀이되며 인간을 훈육하는 "난폭한 교사"다.

케르퀴라 내전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치를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때 국가나 사회 전체의 물질적, 정신적 토대가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세기 말 내부와 외부에서 복잡한 양상을 띠며 시작된 전쟁 상태가 21세기 들어서도 끝나지 않은 채 온갖 위기의 징후들을 드러내는 한반도의 현실은 투퀴디데스의 분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되풀이되는 난폭한 훈육에서 인간은 무엇을 배웠을까? 당대 헬라스 철학자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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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시간은 숙명이다. 태초에 시간과 함께 천지가 창조된 후 인간은 영원한 생명이 아닌 선악의 심판자가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낙원을 잃고 시간의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 곧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면 선악의 판단은 불가능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명확한 증거다.

모든 시간이 항상 균일하지는 않다.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너무 짧아서 아쉬운 시간이 있다. 시간이 없어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죽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시간은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 수 없는 반면 어떤 사람의 시간은 놀라운 결과물로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류비셰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류비셰프는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성과를 남겼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에 의하면 그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많은 결과물을 남길 수 있었던 비밀은 독특한 시간 통계 방법에 있었다. 그는 "1916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그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가 쓴 "일기의 핵심은 바로 시간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신문을 읽은 것까지 포함하여 하루 일과가 모조리 계산되어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시간을 측정하고 통계를 작성한 결과 그의 시간은 "절대로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흘러가지 않았다.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늘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류비셰프는 시간을 '채굴해' 나간 셈이었다."

류비셰프에게 시간 통계는 "스스로를 평가하는 방법"이었다. "시간통계 방법을 통해 그는 자신을 연구했다. ... ... 그는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바로 그 한계까지 능력을 사용하였다. 이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자기 인식의 길이었다." 자기 인식이란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한계를 알기 위해서는 한계까지 자신을 밀고 나가야 한다.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끝에 대해 떠드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는 것이고 신 앞에 오만한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바로 그 한계까지 능력을 사용"했을 때에야 가능하다.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향한 자기 인식의 길이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은 시간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존재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균질하지 않은 시간 감각을 부여했다. 이는 진실로 자비로운 신의 선물이다. 이제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인간 스스로 선택할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류비셰프는 하나의 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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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순환으로 보았다. 역사에는 영원한 번영도 영원한 쇠락도 없다. "전에는 강력했던 수많은 도시가 미약해지고, 내 시대에 위대한 도시들이 전에는 미약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기록한 이유는 명료하다. "인간의 행복은 덧없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


《역사》 제1권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의 먼 원인으로 지목한 뤼디아 왕 크로이소스와 페르시아 왕 퀴로스 이야기이다. 아시아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번영의 절정에 있던"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테나이에서 온 솔론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고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솔론은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면서 "전하!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솔론의 이런 말이 크로이소스에게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디아를 무너뜨린 페르시아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에 불안해진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침공하였으나 전쟁은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 왕 퀴로스는 사로잡힌 크로이소스를 신하로 삼았다. 페르시아가 맛사게타이족 원정에 나섰을 때 퀴로스는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모든 신하가 한목소리를 낼 때 단 한 사람만 다른 의견을 말했다. "하오나 전하 자신과 전하의 신하들이 한갓 인간임을 알고 계신다면, 전하께서 맨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은 인간사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같은 사람들이 늘 행복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크로이소스였다. 한때 그는 솔론의 말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사》는 제9권 122장에서 퀴로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퀴로스는 이 제안을 듣고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 제안대로 밀고 나가라며, 그럴 경우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고 경고했다. "부드러운 나라에서는 부드러운 남자들이 태어나는 법. 놀라운 곡식들과 용감한 전사들이 같은 땅에서 태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오."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페르시아인들은 그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고 물러났고, 자신들의 견해가 퀴로스의 견해보다 못하자,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살던 페르시아인들이 제국을 건설하고 아시아의 평야에서 "놀라운 곡식들"을 마음껏 먹고 있을 때 헬라스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살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자 부드러운 페르시아인들은 척박한 땅의 헬라스인들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벌어졌던 양상은 얼마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고대의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덧없는 인간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이다. 기원전 5세기 지중해에서 기록된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이 수천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이름없는 누군가의 손에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덧없음을 둘러싼 놀라운 사태와 그 사태에 개입된 신비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신 앞에 무릎 꿇고 역사의 거울을 마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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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자가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배움의 문제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하고 실천하는 배움은 via negativa와 via positiva로 이루어져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배우는 자가 via negativa의 단계에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구체적 사례다.

에로스는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늘 있게 하는 것이다. 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사(不死)에 대한 욕망이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에 불사를 갈구하고, 불사를 갈구하기에 좋은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습"해야 한다. "연습은 떠나가는 기억 대신에 새로운 기억을 다시 만들어 넣어 줌으로써, 같은 앎으로 보일 정도로 앎을 보존"하며, 가사적(可死的)인 것은 "다 이런 방식으로 보존"된다. <<향연>>의 첫 문장 "이야기할 준비가 꽤 되어있다"는 "직역하면 ‘연습을 안 거친 상태가 아니다’, 즉 '꽤 연습을 거쳤다'라고 옮길 수 있다.” 이처럼 <<향연>>은 연습에 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연습을 통해 에로스의 사다리를 오를 때 고려해야 할 것은 “올바르게 가려는 자"와 "이끄는 자"의 관계, 즉 배움과 관련한 문제다. 올바르게 가려는 자인 동시에 이끄는 자인 소크라테스는 배움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주지하듯이, 소크라테스의 배움의 방법론에는 via negativa와 via positiva가 있다. 배움의 단계에 들어서면 먼저 via negativa를 통과해야 한다. 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via negativa는 버리는 것, 비우는 것이다. 참다운 것이 아닌 것, 자기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 여겼던 것)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via negativa를 거쳐 via positiva로 나갈 때 사다리의 한 단계 위로 올라서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막 끝났을 때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다. 그는 앞서 전개된 에로스의 사다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소크라테스를 오만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여러 차례 유혹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그분은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의 일을 하려 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거든. 그래서 나는 마치 세이렌들에게서 피하듯 어거지로 귀를 막고 도망쳐 나온다네.“ 알키비아데스는 via negativa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via negativa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 알키비아데스는 "여전히 소크라테스 선생님에 대한 사랑에 연연해"하고 있지만, 아가톤과 소크라테스의 살가운 대화를 듣고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아가톤은 "그(알키비아데스)의 뜻대로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 곁으로 가서 앉을 테니까요."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아무렴, 그리 하게. 이리 와서 내 아래쪽에 앉게."라고 대답한다. 참으로 좋은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해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원하지만,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 채 번번이 넘어지고 마는 자는 알키비아데스와 닮은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참으로 씁쓸하고도 쓸쓸한 自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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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시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역사에서 그 시대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시대에 누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무엇을 탐색했는지 질문한다. 2차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몽테뉴라는 16세기의 "위로하는 정신"을 만난다.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1919년부터 1934년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다." 이때는 "독일에서 기승을 부리던 히틀러의 나치가 차츰 오스트리아로도 그 막강한 세력을 뻗어 오던 시기"였다. 자신의 시대에 대해 "새로운 성과와 기술의 기적, 완벽한 조직 등이 가장 끔찍한 파괴의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말한 츠바이크는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에서 "그의 삶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다. 그 당시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국가사회주의(나치) 광신자들"처럼 몽테뉴 시대에는 "내란(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전쟁)이 일어나 광신적인 이데올로기들로 프랑스를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두 세력은 서로에게 "범죄에는 범죄로, 분노에는 분노로, 잔인함에는 잔인함으로 응수했"으며, "야만성에 사로잡혀 그 어느 쪽도 상대방을 향해 너그러움을 베풀 줄 몰랐다." 츠바이크와 몽테뉴의 시대는 "집단 광증의 시대"였다.

"인류의 광증의 폭발"을 경험한 츠바이크에게는 몽테뉴가 "회의론자냐 아니면 기독교도냐, 쾌락주의자냐 아니면 금욕적인 스토아학파냐"와 같은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몽테뉴가 오늘 우리 시대와 비슷한 시대에 스스로의 내면을 어떻게 자유롭게 만들었는가, 우리가 그의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만 그에게서 감동을 얻는다"고 단언한다. 몽테뉴는 "미친 듯이 패거리 짓는" "당파들의 광기 어린 분노"와 파괴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야만성 한가운데서" 단 한 가지 질문에 열중했다. "곧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츠바이크에게 있어서 몽테뉴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 자신의 '본질'을 혼탁하고 독성이 짙은 시대의 거품에 뒤섞이지 않도록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 정직하고 격렬하게 싸운 사람"이었으며, "내적인 자아를 자기 시대에서 구하여 모든 시대를 위해 보존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몽테뉴가 끊임없이 탐색한 것은 "바로 자신의 자아였다." 동시에 "역사를 읽고 철학을 공부"하면서 "보편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탐색했다. 이러한 탐색을 통해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이어가면서도 "이 질문을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 그는 "인간을 가르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인간이 스스로 탐색하도록,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안내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유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시대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광신주의의 시대에도 언제나 휴머니스트들이 살았"다. 자유에서 비롯한 관용의 정신으로 "그 어떤 믿음이나 관점도 처음부터 거부하지는 않았고, 그 어떤 선입견으로도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았"던 몽테뉴는 "인간이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츠바이크는 비인간적인 시대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내면의 자아와 그 자유를 지켜내는 것이 현재와 미래의 자유를 확장하고 유지하는 것임을 몽테뉴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대립하는 신념이 서로 피를 튀기며 충돌할 때, 자기 편의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닌 모두의 자유를 위한 "체념"과 내면의 자아로 "물러섬"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체념과 물러섬"이야말로 신이 이 세상에 개입할 더 많은 여지를 만드는 겸손한 인간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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