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까워지며 해는 길어질 대로 길어져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문을 나서는데 해가 중천에서 조금 기운 정도였다. 하늘이 맑고 햇볕이 따뜻했다. 그 솔밭 밑 너럭바위에 혼자 누워 뒹 굴뒹굴하기 좋은 날이었다. 맹수들은 싸우다 전투력을 잃을 정도로 상처를 많이 입으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장소를 찾는다. 그곳에 혼자 웅크리고 혀로 제 상처를 핥으며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전투력을 회복해야 한다. 나만의 장소인 솔밭 밑 너럭바위는 나에게 그런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가는 것은 한가하게 쉬러 가는 게 아니었다.
나의 매일매일은 거의 전투에 가까웠기 때문에 내일을 위한 최소한의 전투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감 같은 게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내 네 발의 근육과 발톱뿐이었고, 그 근육에 다시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건 내 혀밖에 없었다. 나는 그 솔밭 밑 너럭바위에 갈 작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p. 138
내가 가장 싫어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원주택이다, 통나무집이다, 도시 근교 시골 생활이다, 자연과의 합일이다, 생태다, 뭐다하면서 이상한 양식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상생을 좀 압네, 예술가입네하는 사람들이다. p.198
어른들의 편견이란 참 어처구니가 없어.
때로 자기 주장에 합리성이 없음을 깨닫고도 기득권의 권위랄까 그런걸로 케케묵은 이론을 끝내 고집하지. 그 얄팍한 위신 때문이야.
기존의 정치, 사회도 매일반이지.
어른들의 그것처럼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존 관념의 보호막에 집착할 밖에 없어.
결국 완고하게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사회는 정체되어 그냥 썩게 되는 거야.
- 홍석영, 사람의 탈 (바람과 사슬, 살림, 1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