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와 아이유가 서로 사랑한다고 한다.

 

아이유가 아직 많이 어리기는 하지만

그 동안 내가 보고 들어왔던 아이유는

적어도 나보다는 철이 더 든 어른스러운 모습이어서

제 앞가림을 무척 잘 하리라 생각하기에 난 이 연애 찬성이다.

 

장기하와 아이유는 즉각 열애를 시인했다.

아이유는 유애나라는 이름의 팬클럽 공간에 글을 남겼다.

"수천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상황인데도 막상 닥치니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갱년기 아줌마가 되기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기억상실에 비견할만한 깜박증에 시달렸다.

(지금 이 순간 깜박증에 해당되는 바로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나에게도

아이유처럼 수천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진저리치던 상황이 있었다.

휴대폰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기겁을 하며 달려가곤 했는데

기어이,,,

오늘 아침 그 일이 실현되고 말았다.

 

바지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나 답지 않게 쓸데없는 부지런을 떨어

세탁기를 돌려버린 것이다.

 

그 동안 몇 번이나 세탁통 안에서 사망선고를 기다리던

가련한 나의 휴대폰을

마지막 순간에 구해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이나 부처님의 가피가 가 닿지 않는 순간과 맞닥뜨린 것이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계단을 뛰어내려가 세탁실 문을 연 순간

내 가슴을 할퀴던

묵직한 것이 세탁통을 두들기는 드르륵 소리 ㅠ.ㅠ

 

엎어지듯 세탁기 앞에 당도하며 세탁물추가 버튼을 누르고

평소에 사오정이라 불리는 나의 귀가

오늘도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헛소리를 들었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문이 열리고

 

내 눈 앞에는

뽀글뽀글 날리는 거품을 뒤집어 쓴 휴대폰과 이어폰이 세트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둘러 마른 수건을 대령하여

쓸고 닦고 또 닦고

 

까맣게 의식을 잃은 액정을 쓰담쓰담 쓰다듬어보고

배터리 떼어낸 앙상한 뒷모습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어디선가 물에 빠진 휴대폰은 전원을 켜면 안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거품이 말끔히 닦인 모습을 마주하고 있자니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를 때 수습할 수 있는 방책이 있을 것만 같은

어리석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아무도 몰래 충전기에 연결하고 전원버튼을 눌렀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휴대폰을 보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라도 하고 싶었더라.

 

아직 할부금도 다 납부하지 못한 슬픈 현실,

 

한 가지 마음의 위안을 삼을 일이 있다면

불 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남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는 것 정도.

 

물론

다음에는 스마트폰은 생각지 말라고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남기기는 했지만

울그락푸르락 서로 부딪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다행이다 체념하고

되돌아가야하는 2G시대를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깊은 한숨!

 

여기에 넋두리를 남기는 것을 끝으로

내 깜박거림과 조바심과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미처 다 내지 못한 할부금을 갚기 위해 일하러 간다.

 

좋은 일도 하나쯤 생기는 저녁 무렵이 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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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10-1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유 ㅎㅎ아니 아이고 어쩐대요ㅠ 오후엔 좋은일 한가지라도 생기길 바랍니다 꼭.

miony 2015-10-10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에는 원래대로 게으름 피우며 밍기적거리다가
다 말린 빨래가 건조대에서 소나기를 흠뻑 맞고 말았답니다.
제 휴대폰을 삼킨 바로 그 옷가지들이 말이지요 ㅠ.ㅠ

미설 2015-10-1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어째..

miony 2015-10-11 14:27   좋아요 0 | URL
ㅠ.ㅠ;;;
 

요 며칠 사이 아이들이 아프다. 

아마도 사나흘 창문을 열어 둔 채 거실에 나와 잤던 까닭이려나? 

열이 오르고, 기운이 없어 늘어지고, 잠에 빠지고, 짜증과 어리광이 작렬한다. 

둘째는 눈이 충혈되고 코도 막히는지 말은 못하고 울음으로 하소연하고 

막내는 설사를 하느라 항문 주위가 발갛게 부어서 작은 몸을 움찔거린다. 

큰 딸은 기침도 콧물도 흘리지 않고 열도 오르지 않고  

자주 흘리는 코피만 가끔 흘리며 열심히 약도 먹어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뭏든 그래서 막내를 어린이 집에 보내지 않고 둘이서 하루를 났다. 

막내를 들여다보고 앉아서 토닥이고 책도 읽어주고 같이 놀아주어야 마땅했건만 

평소에는 먼지랑 티끌이 뭉텅이로 몰려다녀도 모른 척 하고 돌아보지 않던 마루를 쓸었다.  

청소기만 대충 돌려주어도 황송해 마지 않을 마루를  

두 손바닥으로 다 가려지는 작은 솔이 달린 키 작은 빗자루로 쓸기 시작했다.  

위~ㅇ! 해버리면 그런대로 잠깐 사이에 끝낼 수 있는 일인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발라드 채널을 틀어놓고, 앉은 채 나아가며 쓸기 시작했다. 

윙거리지 않는 건 저 노래소리를 살리기 위해서야 이런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자, 이제부터 도를 좀 닦아볼까?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면서.. 

 

마루는 30평쯤 되지만 사방이 1터 정도로 보이는 한지장판을 발라놓아서 

한 칸 한 칸 쓸어나가면 어디까지 쓸었는지 분간하기 쉬워 좋았다.

 

처음에는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쉬엄쉬엄 놀기 삼아 하려고 작정하고 시작했는데 

절반을 미처 다 못 쓸어낸 지점에서 이미 조바심을 내고 있는 나를 만났다. 

얼른 마저 쓸어내고 끝내버리고 싶어서 살려보겠다던 노래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 앞 뒤로 돌아다니며 낱말카드랑 장난감 따위를 흩뿌리는 아이도 보이지 않고  

양 손에 들린 한 뼘 반 남짓한 빗자루랑 꼭 그만한 크기인 쓰레받기만 온 눈에 가득했다.  

어찌 이리 일이 더딘게야?! 하여 짜증이 솟구쳤는데

그러다 한 순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도 넉넉하고 바쁜 일도 없고 꼭 그럴 필요가 없는 걸 왜 이리 서두르고 있나 싶었다.  

큰 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쓸어나가니 

이번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넓은 마루 끝에 다다라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 꿈 속에서 자주 만나던 내 생각이 났다. 

숲 속 작은 집에서 면접관이 되어 나를 면접하던 나, 

저물녘 버스정류장에 오두마니 웅크리고 앉아 버스에서 내릴 나를 기다리던 나, 

슈퍼맨처럼 망토를 차려입고 내 한 손을 꼭 잡고 황무지 위로 날아오르던 나. 

 

둘째가 다니기 시작한 언어치료센터에 내걸어 놓았던 문구도 떠올랐다. 

아이들은 손톱이 자라듯이 자란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전혀 자라지 않는 것 같지만  

또 어느 새 깎아주어야 할 정도로 자라있곤 하는 손톱처럼  

느리게 그래서 단번에 알아채기는 어려울 정도로 그러나 꾸준히 조금씩 잊지 않고  

그렇게 자라고 또 변하고 있으니 참고 기다려주시라 어머니들이여 뭐 그런 내용이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비가 내린다. 

내일부터 며칠은 너덜이에서 아이들과 빈둥빈둥 뒹굴기로 했다. 

그 사이 열도 내리고 설사도 진정되고  

이제 남은 기침이랑 콧물이 멎고 기운을 차리도록 그렇게 놀기로 했다. 

큰 아이 혼자만 학교에 가라고 하면 조금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래 방치해 둔 방과 욕실과 겨울 운동화 여러 켤레와 집 안 곳곳에 무성한 거미줄과

부정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얇게 곰팡이가 핀 듯 끈적거리는 작지만 긴 마루와   

새어든 빗물에 젖어 씻어 널어야 할 장난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또 다시 도를 닦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능성이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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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0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10-07-15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많이 아프면 엄마가 더 힘들어지지요?
둘째가 언어 치료 받으러 다니나 보네요. 조금씩 좋아질 거예요.
30평이나 되는 마루.. 라는 말에 깜짝 놀랐어요. 그 넓은 마루를 어떻게 건사하면서 살아요 그래? 열평도 안 되는 마루에도 맨날 먼지 굴러다니는데...

miony 2010-07-15 22:01   좋아요 0 | URL
저희 집 마루는 아니구요, 남편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일종의 모임방이랍니다.
창피하지만 일 년에 하루도 제대로 닦지 않는답니다.
다녀가시는 분들이 쓸고 닦고 쓸고 닦고 그런 마루랍니다.^^

2010-08-02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들이랑 복작복작 너덜이에서 한 해가 갔다. 

일년 365일 중에 너덜이를 떠났던 날은 열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정신없이 어지러운 집안 꼴을 몇날 며칠이고 그대로 두고 보며 

간장에 비벼먹이고 물에 말아 김치랑 밥 먹이면 양반이고, 가끔 굶기기도 하면서 

한창 호기심 많은 첫째, 늦되는 둘째, 아직 어린 막내랑 하루종일 눈 맞추고 놀아주어도 모자라건만 

별스레 대단하지도 않은 책을 붙안고 읽었다. 

첫아이를 기를 때는 일년 내내 단 한권도 읽지 못했다고 기억하는데  

아이들 팽개치고 책 읽은 나를 책망해야 할지 그래도 등 토닥여주어야 할지 헷갈린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운명이니 사주니 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새봄이 올 무렵까지 온 가족 사주를 안방 벽에 연필로 써 놓고  돌아봐가며 무척 열심히 재미있게 읽었고, 욕심껏 더 사들인 책은 아니나다를까 먼지 가득 앉은 채 책장을 지키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 재방송을 챙겨보다가 오래 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고 가슴이 아팠다. 소나무집 님 페이퍼에서 본, 바다를 바라보며 등을 보이고 선 장군의 뒷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김 훈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표지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들이길 망설였지만 그래도 박민규가 강력한 추천사로 붙드는 바람에 읽게 되었다. 헛웃음을 웃다가도 답답한 요즘 세상사를 생각하면 입맛이 썼다. 

 

  

  

  올해 가장 마음에 든 글이다. 그래도 뭐라고 독후감을 쓸 능력이 내겐 없다. 그저 줌파 라히리를 알게되어서 기쁘고 새해에 그녀의 글들을 한껏 기대하고 더 읽으려고 한다.

 

 사들이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한 가득인데 여전히 다른 책들을 사고 싶고, 그래도 또 새로 산 책들 중 몇 권만 읽게 된다.  

보관함에서 고르고 골라 망설이고 망설이며 주문한 것이건만 내 앞에 도착한 순간 읽는 순서가 밀린 책들은 어쩐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분명히 그 중에 펄쩍 뛸만큼 멋진 글들도 틀림없이 있을텐데도 말이다.  

새해에는 그렇게 묵은 책들부터 돌아보아야겠다. 

 

 

지금 무척 읽고 싶은 책 딱 한 두권만 더 주문하고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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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1-05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의 노래, 읽으셨으면 등을 토닥이셔도 됩니다.^^
음~ 나도 삼남매를 키우던 10년 세월은 책이나 영화를 거의 못 보고 살았어요.
마지막 구절에 동감의 미소를 날립니다.ㅋㅋ

소나무집 2010-01-1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아이 키우면서 열흘에 한 권 읽었다는 말에 감탄~
저도 <남한산성>을 읽고는 김훈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였는데
<칼의 노래> 서평 쓰면서 작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작가에 대한 이해도 되고 예전 작품들이 더 읽고 싶어지데요.
 

우리 부부가 하루종일 막내를 어머니께 맡기고 추어탕을 한 솥 가득 끓여  

마당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저녁을 먹었다. 

추어탕 한 그릇에 김치랑 나물 두서너 가지로 간소한 상차림이었지만 

설겆이 거리와 남은 반찬, 냄비 등 치울 것들이 큰 쟁반으로 서너번 옮겨야 할 정도는 되었다. 

나는 친정에서 저녁을 먹고 꼬리 셋을 달고 내려오면서 힐끗 보니  

바깥 상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부엌에 달려가 보니 역시나 남편이 다 옮겨다 놓았다. 

 

남편이 반찬들은 냉장고에 챙겨 넣고 설겆이는 깨끗하게 해서 그릇을 말끔히 닦아 정리 

할 리는 절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냥 두면 저녁상이 밖에서 밤을 지새는 일도 다반사라  

왠일로 밖에서 날라다가 부엌 싱크대 앞에 나름대로 말끔히 놓아 둔 것들을 보니 

그 정도로도 입이 헤벌어지며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 아빠가 저녁상을 치워주다니 엄마는 정말 감격스럽다." 

그랬더니 엄마 발치에 앉아서 책장을 뒤적이던 첫째 꼬리가 시큰둥하게 하는 말, 

" 당연하지!  

 드문 일이니까." 

- You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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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4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흥미진진한 지적 모험담

양아줌마님의 글을 읽고 나에게 떠오르는 글들을 두서없이 써서 남긴다.  

 

한글을 익힐무렵 떡 하니 맞닥뜨린 글자 <읽>. 

생애 처음으로 겹받침 글자를 만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융통성이 없는 나는 집에 계신 다른 어른들께 여쭈어도 좋았으련만

그 책의 임자인 언니가 학교에서 어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표지에 <국>자와 <어>자가 띄어씌어진 아랫 줄에 선명하던 <3-1>이 눈에 선하다. 

 

언니가 4학년 때 고전읽기용 교재로 학교에서 받아온  

초록표지에다 그림도 별로 없던 두꺼운 책 속에는 그야말로 별천지가 숨어있었다. 

알고보니 각색되지 않고 원작에 무척 충실했던 그림동화 몇 편과 창작동화 두어편.

백설공주와 신데렐라,황금새,흑두건  

그리고 한 남자가 팔베개를 하고 들판에 누워 있는 모습의 삽화가 실렸던 꿈을 찍는 사진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도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옛날 이야기 한 자락 들어본 적 없고  

내가 아는 동화는 모두 그 책에서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지경이다.  

경이롭다는 단어와 마주칠 때면 떠오르는 책이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나 또한 소년생활칼라북스를 읽었다.  

두 세권 씩 사와도 늘 차례를 기다려 읽어야 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만화방에 다닐까봐 엄마는 만화를 금지했기 때문에 

소년중앙과 어린이새농민에 연재된 만화(꺼벙이나 쭉정이,맹꽁이 서당 등)를 열심히 봤다.    

부록으로 아주 얇지만 별책으로 나왔던 <벤허> 도입부를 읽고나서 영화를 보았을 때 

한 장면 장면이 만화와 아주 똑같은 것을 보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중요한 영화 장면을 그려내어 이어붙이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어린 혹은 멍청한 나는 만화랑 똑같이 영화를 찍었다는 생각으로 어찌나 놀라워했던지,ㅋ

 

그리고 한 페이지에 한 가지씩 단편적인 과학상식이 실려 있던 컬러도 아닌 과학학습만화!  

<제트기류>와 처음보는 물고기였던 개복치 그림,  

나무 이름을 죽 소개하면서 "십리 절반 오리나무"로 끝맺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역시 내가 아는 과학 상식은 그 책에서 다 배웠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책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는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해 선정된 목록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었다. 

단지 짧은 글이었기 때문에 선택했을 거라고 짐작된다. 

여러 번 읽고나서야 겨우 이게 부모님을 비유한 이야기인가 하고 깨닫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한 번 척 보고 그걸 몰랐단 말이냐?는 비웃음을 날려서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거의 줄거리 수준의 엄청난 축약본이 다수였지만  

찰스 램이 쓴 세익스피어와 오 헨리를 빠뜨리면 섭섭해 할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 20년 후 같은..  

어느 날 또 독후감을 쓰기 위해 뒤적이던 책에서  

조지 오웰이 쓴 <파리와 런던의 영락생활>중 한 단락을 만났는데 왠지 뇌리에 박혔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돌려읽으며 눈물을 쏟았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생각난다. 

아무리 읽어도 난 눈물이 나지 않아서  

감수성 예민해야 할 나이에 대책없이 무딘 나 자신에게 조금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여덟 명이 함께 <미션>을 보던 날 일곱 명만 울었다. 

오보에 선율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폭포에서 떨어지는 선교사가 등장한 첫 장면부터  

무척 감동적이긴 했어도 울 일은 아니었건만 친구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와 쟝 그르니에가 있다. 

아마도 범우사에서 나온 문고판 제법 두꺼운 <데미안>을 두 세번 읽었다.  

<섬>은 알베르 까뮈의 서문에 나도 전염된 탓이었는지 몰라도 금새 매료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이게 소설인가 아닌가 혼자서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던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그 때까지 소설만 소설만 읽던 내가 처음 발견한 비소설이다. 

 

대학 때는 역시 헤세의 단편<페터 카멘친트>에 매혹되었다.  

읽고 나서 그 옛날 <사랑의 삼중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청소년용 문고에 실려있었던 걸 알게됐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기억난다. 

내가 보낸 대학시절은 책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여러군데 구멍이 나 있다. 

아니 거의 텅 비어있다.  

짧게 한 동아리 활동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계속 연락하는 친구 하나 없을 정도로 흘려보낸 시간이다. 

왜 그랬는지, 그냥 너무 게을렀는지 단순히 멍청했는지 진단을 내리기조차 힘들다. 

 

그렇게 한심한 대학 시절을 보낸 댓가로 방황하던 백조의 나날에 

새털같이 많은 시간을 메우고자 읽었던 <토지>가 기억난다.  

걸어서 멀지 않은 도서관에 가서 순서대로 빌려와 밤을 새워 읽었다. 

 

마무리를 하려니 뜬금없이 양귀자의 아마도 연작이었던 <원미동 사람들>이 불쑥 떠오른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고 언제쯤 읽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첫인상을 남긴 한국소설이었던 것 같다. 

요즘 공선옥의 소설을 읽다보면 또 생각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한 때는 소설만 읽는 것도 독서라고 할 수 있는가  

나름대로 심각한 반성을 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읽고 싶은 것들을 재미있게 읽는 것이 내가 책에 기대하는 전부다. 

소설이란 게 이야기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다. 

만화도 좋고 에세이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대세는 역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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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2009-07-1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 나도 그 책 기억 나. 되게 잔인한 그림 동화책. 무지 재밌게 읽었었는데.
그리고 과학 학습 만화도- 만화 치고는 재미 없어서 별로 안 보긴 했지만..
그 전집 속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찰스 램이 소설로 정리한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듯. ㅎㅎ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만화 잡지 보물섬도 생각난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