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지나 어김없이 햇살이 품은 들녘
꽃 지고 새 잎 피고 휘돌아 바람드니
진부한 봄이 떠나는 시간의 산능선

구름이 흘러드는 초록물결 안은 나루
산그늘 성큼 딛어 뱃전에 일렁이니
물비늘 뒤채는 저녁 꿩 날아 솟구친다

노을빛 어지러워 발걸음 해매어도
산죽이 울어읊는 옛노래로 길을 잡아
세월은 돌고 또 돌아 그 자리에 앉았네


늘 되풀이되어 진부하게까지 여겨지는 일들이,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가? 자꾸만 내게 물어야했던 새봄이 다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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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무렵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종이접기를 장려했다.

산골소년도 접기, 오리기, 만들기를 좋아해서 몰두했다.

책을 보고 혼자서도 잘 접는다고 칭찬도 들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장려한 탓인지 요즘은 색종이만 보아도 손사레를 친다.

사줄까봐 질색을 한다.

 

좀 더 자라서는 블럭과 퍼즐에 몰두했다.

누가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전속력으로 블럭카페를 향해서 뛰었다.

한꺼번에 두 세 시간씩 끄덕않고 한 자리에 앉아서 가장 큰 블럭세트를 조립했다.

퍼즐도 1000피스는 기본이었고, 역시 몇 시간씩 자리를 지키며 끈기있게 완성했다.

그런데 요즘은 블럭카페 근처에도 가지 않고,

퍼즐도 다 만든 것이라는 얘기를 하며 절대 사지 않겠다고 한다.

 

지금은 치료교육 수업 사이사이에 짬 나는 시간에 슈퍼마켓 구경을 한다.

과자코너에서 햄버거, 라면 등 가루를 반죽해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는 일본과자를 구경한다.

수 없이 사다가 만든 후 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사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 사주지 않겠느냐는 멘트와 웃음과 눈짓과 손짓을 보낸다.

거절 당하고나서 호떡이나 팬케이크 가루를 하나 사는 날이 있다.

물론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가장 좋아하고 오래 머무는 곳은 쥬스 판매대 앞이다.

이건 너무 커서 살 수 없다는 얘기를 하며 1.8리터 들이 병을 들었다 내려놓고

토마토, 망고, 파인애플, 포도, 오렌지 다양한 후보군 중에서 경우에 따라 한 가지를 고른다.

오래오래 구경한 후에 고르거나, 하나 골라놓고 오래오래 구경한다.

이마트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는 날이면

투썸플레이스에서 오렌지자몽이나 레몬에이드를 사달라고 한다.

투썸 옆에 있는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던 나날도 이제는 지나갔다.

쥬스라면 몇 잔이라도 사양치 않고 즐겁게 마실 것이다.

 

한 두 잔짜리 조그만 믹서기 사용법을 익혀서

냉장고를 털어서 혼자 과일을 갈아먹는다.

토마토, 수박, 블루베리 웬만한 것은 다 좋아한다.

다만 뒷정리를 아직 할 줄 몰라서 산골소년이 지나 간 뒷자리가 난장판이다.

어떤 날은 고무패킹이 빡빡한 뚜껑을 열다가 그만

씻어엎은 그릇들 위로 쥬스 폭탄을 투척하기도 한다.

그리고나서 아무 말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므로 엄마가 발견했을 때는

과일찌꺼기 파편들이 그릇에 말라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또래보다는 여전히 작지만 키도 제법 자라고 살도 쪄서 차돌같이 여물고 있다.

고기는 거의 먹지 않지만 육개장,시래국, 된장국,미역국,순두부찌개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

감자, 호박, 양파, 대파, 고추까지 채소는 다 잘 먹는다.

뜨거운 것은 잘 먹지 못해서 식을 때까지 음식을 앞에 두고

후 불어서 조금 먹으며 기다렸다가 건더기를 다 먹고 국물만 남으면 밥을 말아 먹는다.

 

엄마랑 식당에 가면 자기 먹고 싶은 걸로 두 그릇을 시킨다.

전에는 그렇게 나누어 먹으면 되었는데 최근에는 혼자서 두 그릇도 거뜬하기 때문에

세 그릇을 주문해야 엄마 몫이 남는다.

사 먹는 음식으로는 한 동안 이어지던 죽의 나날이 지나가고

비빔칼국수, 수제비, 피자, 스파게티의 나날을 지내고 있다.

김밥은 좋아하지 않지만 샌드위치는 잘 먹는다.

 

요즘 고민은 무엇보다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이다.

작년 학습도움반 선생님이 무척 깔끔하셔서, 정리를 잘 하게끔 지도하신 후로

모든 물건을 쌓아서 바닥을 차지하는 면적이 적게 되도록 애를 쓴다.

책을 허리높이까지 쌓는 것은 기본이고

그 위에 카메라나 유리주전자, 다리미 따위가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는 날이 허다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을만했는데

책상 위나 서랍에 있는 물건을 몽땅 꺼내서 온갖 가방에 나누어 담고

책꽃이나 선반에 있는 물건을 한 칸이 꽉 메워지도록 모아넣어

다른 칸은 깨끗하게 비우는 바람에 뒤죽박죽 엉망이라

정작 필요한 물건을 제 때 찾을 수가 없다.

찾더라도 그 위에 쌓인 산 같은 물건들을 다 치워야 꺼낼 수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 단계 더 진화하니 모든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수건 장 안에 비누, 치약, 치솔, 면도기들이 알몸으로 들어가 있고

할머니 기저귀는 열 봉지 한 박스를 통째로 뜯어서 방구석에 쌓아놓고는

골판지 박스는 야무지게 접어서 현관 선반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구성품이 깔개, 겉기저귀, 속기저귀, 물티슈가 한 세트라서

각각 한 박스씩 분량이 엄청났는데 그 모두가 방구석에 쌓여있게 된거다.

 

포장된 과일도 다 꺼내서 늘어놓고

할머니 빨대도 수십 개를 뜯어서

박스로 준비해 둔 두유에 하나씩 꽂아 나란히 줄을 세워 놓기도 했다.

말리고, 화를 내고, 손바닥을 때려도 아무 소용이 없고

하루종일 밀착 방어할 방법도 없어서 날마다 한숨이다.

 

지금의 산골소년은 마치 예닐곱 살 장난꾸러기를 보는 둣하다.

한숨나는 정리벽은 문제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주장이 분명해져서

하겠다, 안하겠다  먹겠다,안먹겠다 좋다싫다를 명백하게 얘기하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간절하게 바라는 어떤 일이 있으면 세 단어로 구성된 문장을 단번에 또렷하게 말하기도 한다.

 

같이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운동도 하고, 놀아주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알지만

변명을 하자면 먹고 사는 일이 앞서다 보니 대가족이 함께 살아도 한계가 뚜렷하다.

어서 무언가 다른 일에 관심이 옮겨 갈 수 있게 하려고 궁리를 해보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어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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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방과 작업공간이 부족하다고 일터 증축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났지만

 

꼼꼼하게 짓고 돈이 마련되면 짓고 하다보니 여전히 공사 중이다.

 

그래도 이제 막바지라 좀 더 열심이다보니 엄마나 아빠나 지치고 신경이 곤두 선 요즘이다.

 

어느 날 아침부터 일도 너무나 많고 급해서 티격태격하다보니

 

치료수업을 데려간다 못간다 신경전을 벌였다.

 

일단 사촌누나가 데리고 갔다가

 

미리 정해진 일정대로 누나는 서울로 가고

 

수업 마치는 시간에 엄마아빠가 데리러 가기로 했지만

 

이렇게 바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과연 제 시간에 갈 수 있을지 엄마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예전에는 웬만큼 바쁜 날이면 그냥 오늘은 쉬라고 하는 날이 잦았었는데

 

원래 아들이 치료수업 나들이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지난 가을부터 부쩍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요즘은 무리를 해서라도 꼬박꼬박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가라고 배려를 해주어서 고마웠는데 ㅠ.ㅠ

 

어찌되었건 아침부터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배추모종을 다 심고 간신히 시간 맞추어 아들을 데리러 갔다.

 

엄마는 아무 생각없이 수업마친 아들 이름을 불렀는데

 

어쩐 일인지 언어치료수업이 끝나도 책상 앞에 그대로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아들이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펄쩍 뛰어일어나며 손뼉까지 크게 치고 달려나와

 

엄마를 부르며 품에 와 안겼다.

 

알고보니 첫 수업인 음악치료 시간에는 크게 분 풍선에 가족들 이름을 매직으로 써 넣다가

 

엄마를 부르며 풍선 위로 엎어지며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데리러 오지 못할까봐 내심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따로 일러주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만큼 인지능력이 향상되고

 

또 엄마 자리가 우리 아들에게 그렇게 컸던가 싶어서 깜짝 놀랐다.

 

늘 일에 쫒기느라 같이 생활하시는 큰엄마와 사촌누나에게 기대는 일이 많은데,

 

한편으로는 엄마라는 좁은 관계에만 매이지 않도록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가지라도 더 엄마가 직접 챙겨야겠다는 반성을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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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친구사랑주간 행사로 친구자랑 글짓기를 했단다.

 

유치원을 같이 다니고 입학도 같이 했다가

 

몇 년 전에 전학 간 중원이 이름을 요즘 갑자기 계속 들먹이는데

 

이번엔 작년에 전학 온 한웅이가 산골소년 자랑을 해주었다고 선생님께서 문자를 보내주셨다.

 

 

내 친구 **이를 소개합니다.

**이는 블럭을 잘 만듭니다. 그리고 한 번 본 것은 기억을 잘한다.

**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색칠도 잘 합니다. **이는 정리정돈도 잘 합니다.

**이는 성격도 좋고 착한아이지만 다만 전화기, 컴퓨터를 너무 좋아해서 가끔 문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좋은 아이입니다. 또 **이는 선생님이 시키는 것도 잘 합니다. 이상으로 **이 자랑을 마칩니다.

 

2016/7/4 한웅이가

 

 

지난 봄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잡월드에서 포인트를 획득해서 받은 블럭 장난감을

 

승환이가 산골소년에게 선물해주기도 했다.

 

엄마는 친구들이 고맙게도 산골소년을 있는 그대로 큰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이미 다섯 해 동안 별다른 문제없이 함깨 해오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아빠는 놀림 당하고 따돌림 당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지나친 나머지

 

술 취한 밤이면 친구들이 뭐라고 놀리느냐고 산골소년을 다그쳐서

 

결국 눈물 흘리게 하는 날들이 종종 있다.

 

엄마도 염려하는 문제이고 아빠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서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산골소년에게 오늘 학교에서 뭐했느냐고 물었더니

 

5학년 친구들이랑 교실에서

 

라는 평소와는 다른 대답을 웃는 얼굴로 들려주었다.

 

사실은 아침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서는 것만 보아도

 

지금 이 순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을 열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으니

 

엄마아빠의 괜한 의심과 욕심은 똘똘 묶어 멀리 버려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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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시간마다 한 사람씩 자기 마음을 움직인 시를 돌아가며 발표하는데

 

하이쿠나 단문으로 된 시라든가

 

은유가 굽이쳐 흐르거나

 

함의가 석류알처럼 빼곡히 박혀있거나

 

의식의 흐름이 징검다리를 퐁퐁 건너는 그런 시는

 

선생님께서 판단하시기로는,

 

천방지축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며 해들거리는 열네살 아이들이

 

제대로 느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라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시 중에 한 편을 골라오라고 하셨단다.

 

휴대폰을 들고 그 작은 화면 속에서 시를 찾는 따님을 위해

 

나도 잘 모르는 몇몇 시인을 천거하여 뒤적인 끝에 하나를 골랐다.

 

 

         소스라치다                     

                                     -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하지만 발표할 날까지 아직 여유가 남았다고 하니

 

몇 권의 시집을 사주고 읽혀서 진짜 따님의 마음을 움직인 시를 고르게 하고 싶다.

 

엄마의 일천한 책읽기는 소설에 국한되어 있는지라

 

목적에 맞는 시인이나 시집을 고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시집이라곤 동시집도 읽어 본 적 없는 드 넓은 백지를 품안은 열 네살 소녀의

 

첫 마음을 움직여 줄 누군가를 아시는 분, 추천을 좀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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